파란수영장,
샤워 부스도 거의 날마다 하는 자리가 정해진다. 자폐증도 아니건만, 다른 자리에서 하면 낯설다. 아니 강박증인가? 오늘도 늘 가던 방향으로 몸을 튼다. 첫 번째 줄 구석이다. 한참을 씻고 있는데 언니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필이 옆에 옆에 있는 언니와 바로 뒤에 있는 언니가 이야기를 나눈다.
"어디서 했는데? 색깔 예쁘네.“
"그자? 예쁘제? 맨날 가는데 말고 다른 데 갔다. 마음에 안 들어갖고."
언니들은 발톱을 앞으로 쭉 내민다. 마치 발레에서 발끝을 쫙 펴서 앞으로 내미는 동작과도 닮았다. 언니들은 서로의 발톱을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이름하여 발톱 자랑! 아니 정확히는 발톱에 한 매니큐어 자랑.
"내는 이리이리 하면 색깔이 변한다. 신기하제? 돈도 더 줐다.“
뒤쪽에 언니가 발을 좌우로 움직인다. 빛에 따라 색깔이 변한단다. 눈이 나빠서인지 잘 모르겠다. 아님, 샤워장의 뿌연 김이 빛을 막아버렸을까?
"얼만데?“
"육만 원.“
"비싸네. 내는 사만 원인데.“
"그래, 원래는 사만 원인데, 이게 새로 나온 거란다. 뭐라 하더라? 뭐라 했는데."
헉!
발톱에 매니큐어 바르는데 사만 원? 육만 원? 언니들 말에 따르면 이건 비싼 게 아니란다. 여기에 뭐라도 붙이거나 하면 가격이 더 비싸진단다. 어디 한 번이라도 해봤어야 가격이 비싼 건지 안 비싼 건지 알 텐데. 필이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아니, 관심 자체가 없다. 없었다.
필이가 언니들 말에 귀 기울이는 이유는 하나다. 이제 혼자서 발톱 정리하는 게 힘들다. 발톱 정리를 하고 나면 꼭 유혈사태가 벌어진다. 목욕을 하고 보들보들할 때 하는데도 늘 그렇듯 피맛을 본다. 조심조심 해서 하는 데도 항상 발톱 정리 후엔 피가 동글동글 샘솟는다. 지가 무슨 약숫물도 아니고 샘솟기는 뭐 한다고 샘솟는지 모르겠다. 어느 발톱 모서리에서든 꼭 샘물을 만들고야 만다. 피가 제법 많이 난다는 말이다. 흘러서 피가 고일 정도로.
걸을 때마다 아니, 닿을 때마다 아플 정도다. 가만히 있어도 아린다. 조금만 있으면 검은 방울이 샘솟다 못해 흐르기 시작한다. 반창고로는 부족하다. 휴지를 두껍게 붙이고 그 위에 테이프로 동동 동여맨다. 피가 멈출 때까지.
다리 감각이 현격히 떨어졌기 때문이 첫 번째 이유다. 발가락 감각은 더하다. 만지면 살짝 남의 발 같은 느낌이다. 항상 전기가 찌르르르~ 하고 흐르는 그런 느낌.
두 번째는 무릎 굽히기가 힘이 든다. 무릎 수술 후 분명 무릎을 구부리는 재활치료를 했건만 그럼에도 무릎이 제대로 굽혀지지가 않는다. 자꾸만 뻣뻣한 일자 다리를 유지한다. 그러다보니 다리를 쭉 뻗은 상태에서 한다. 하다가 안될 경우 잠깐씩 아주아주 잠깐씩 다리를 접어서 발톱을 깎는다. 발톱 정리 후에 벌어지는 유혈사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퇴원할 때는 네일샵에서 발톱 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같은 병실에 있는 언니가 외출을 해서 발톱 정리를 하고 오는 걸 본 뒤로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돈이 뭣이 중한가. 건강이 중하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퇴원하고 집에 오니, “이번 한 번만 내가 하지. 뭐.”가 된다. 한 번만은 두 번이 되고 두 번은 세 번이 되고 그게 지금까지다.
피가 날 때마다 "다음에는 꼭!"이라고 다짐하면서도 막상 그다음이 되면 또 이번만이 된다. 참, 사람 잘 안 변한다는 게 맞나 보다. 나를 위한 투자? 나를 위해 쓰는 돈은 어찌 이리도 인색한가. 그러다 건강까지 이 지경이 되고서도.
시골 어르신들이 허리 수술, 다리 수술 하면서 다시는 농사고 뭐고 안한다 다짐한다. 그러다 퇴원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농사일을 한다. 꿈쩍거릴 힘만 있으면 논이며 밭에 가서 일을 한다.
필이도 딱 그짝이다. 파란수영장 언니들처럼 돈 주고 매니큐어는 바르지 않더라도 이번 만큼은 아니 앞으로는 샵에 가서 발톱 정리를 하자. 단단히 마음먹는다.
"어디에서 해요? 여기 근처에 샵이 있어요?“
"여기에 있나? 시골에. 모르겠네. 우리는 ㅈㅈ에 가서 한다 아이가.“
그 그 그렇구나! 가까이에 있으면 가보려고 했더니, 이것 참. 여태 샵에 가지 않은 게 '않'은 게 아니라, '못'간 것이었다는 듯 안도한다. 하하하하. 그래도 가까이에 하는 곳이 있는지 찾아봐야 할래나?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발톱과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할 때가 왔다.
오필리아처럼~
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