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경로제도못피한인종차별을내가어케피하노 → 그냥 ㅈㄴ소리 지르세요
“뤠이씨스트! 디스꼬스팅!” 지난 추석 연휴, 가족 여행으로 영국 런던에 가게 됐다는 친구와 함께 열심히 연습한 문장이다. 단호하면서도 앙칼진 발음이 묘하게 웃긴 이 대사는 바로 유튜버 ‘명예영국인 world’(본명 백진경)이 유행시킨 ‘인종차별 대처법’인데, 현재 인스타그램 릴스 조회수 약 천이백회를 돌파했고 ‘밈’(meme)으로 자리잡았다. 백진경은 영국 런던에 거주하는 한국인으로, 그곳에서 겪는 일들을 타고난 입담으로 유쾌하게 풀어내는 것이 그 채널의 매력이다. 특히 우리가 학창시절 영어를 배울 때 사용하여 익숙한 미국식 억양과 다른 특유의 영국식 발음을 유창하게 구사하여 많은 유행어를 탄생시켰다. 대표적으로 “아유 맏?” = “Are you mad”(너 제정신이야?), “유오롸잇?” = “You are right?”(네 말이 맞아?) 등이 있고, 앞서 언급한 문장 또한 “Racist! Disgusting! (인종차별주의자! 역겨워!)”을 영국 악센트로 표현한 것이다. 유럽에서 인종차별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시청자의 질문에, 그는 기죽지 말고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서 상대에게 창피를 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동안 많은 콘텐츠가 유럽의 일상을 소개할 때 낭만적인 이미지를 주로 그려냈다. 나도 2010년 초반 많은 인기를 끌었던 유튜브 ‘영국남자’를 보며 언젠간 젠틀하고 위트있는 영국 남성들과의 대화를 꿈꿨고, 이십대 초반에는 페이스북 인기 페이지 ‘여행에 미치다’ 같은 게시글을 보며 멋진 음악과 함께 프랑스 거리를 걷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현실의 불투명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콘텐츠 속까지 파고 들게 되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마냥 속을 수 없게 됐다. ‘영국남자’ 채널은 과거 영화 홍보 영상 중 동양인 배우의 분량만 현저하게 삭제했다는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인 전적이 있고, ‘낭만/젊음/사랑’의 프랑스는 이제 큰 목소리로 “당신 빠트롱 나오라” 외치며 살아남아야 하는 (유튜브 ‘침착맨’ 라이브 방송 중 프랑스어 교수 정일영은 프랑스에선 “절대 주눅들면 안된다” 당부했다) 여행지의 이미지가 강해졌다. 아무리 한류의 위상이 높아졌다고들 해도, 여전히 한국 연예인들이 인종차별 피해를 겪었다는 기사를 자주 접하고 있다. 최근에는 영국의 패션 잡지 '엘르 UK'가 케이팝 그룹 블랙핑크 로제의 인종차별 논란(공식 사진에 그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에 사과 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어디 한국 뿐만이겠는가. 작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무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양자경(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미국의 배우 엠마스톤에게 공식 석상에서 교묘한 차별을 당하는 장면을 모두가 보았으니 말이다. X에서 굉장히 공감가는 게시글을 발견했다. “걍 양자경, 로제도 못 피한 인종차별을 내가 어케 피하노 싶어짐…” 모든 인종을 피라미드로 구분한다면 나는 아마 최하위권에 속하는 동양인 여성일텐데 무력감이 느껴진다.
백진경은 워킹홀리데이로 런던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식 영어 악센트를 구사하는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 때문에 영국식 억양을 연습했다고 한다. ‘브맅이쉬’의 환상을 깨는 그의 영상에서 유쾌함과 동시에 왠지 모를 독기가 느껴지는 이유 같다. 세계최강국인 미국 덕분에 세계 만국어가 된 영어. 영어만 잘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줄 알았고, 성공한 사람이 되면 차별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영어는 악센트로도 출신 지역과 계급을 나타내는 교묘한 언어였고, 돈과 명예는 인종과 성별의 차별을 극복하기엔 여전히 모자란 도구다. 그동안 차별의 잘못을 바로잡기보다, 차별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그나마 좀 더 나은 위치를 차지하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지 않았을까. 인류학자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에 따르면, 차별당하는 집단은 조건적 환대를 통해서만 그 사회 안에 머무를 자격을 얻게 된다.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거기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 바로 스스로를 비가시화한다는 조건이다. 보이지 않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은 대상을 선택적으로 비춰 온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다. 세상에서 나의 위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내가 겪는 부당함이 사회구조의 문제임을 깨닫는 것. 그리고 이런 깨달음을 서로 공유하는 일에서 즐거움이 많을수록 지치지 않을 것이다.
#명예영국인백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