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치료해줄 '사'자 어디 없나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리뷰

by 도나

올해 초 회사에서 신년회 일정을 조율할 때쯤이었나. 나는 조심스레 1월 13일에 ‘불가능’ 표를 던졌다. ‘불금’(불타는 금요일)도 아닌 화요일 저녁에 선약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집에 일찍 가야만 했다. 바로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2 (이하 흑백요리사)> 마지막 화가 공개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재작년 하반기에 방영을 시작한 요리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흑백요리사’는 블라인드 평가에서 안대로 눈을 가린 채 입을 크게 벌린 백종원의 모습, 미쉐린 가이드 3스타 레스토랑 ‘모수’의 오너 셰프(chef) 안성재의 “고기가 ‘이븐’(even) 하게 익지 않았어요”라는 심사평 등 다양한 장면과 대사들이 ‘밈’(meme)화 되어 큰 화제를 몰았고, 1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시즌 또한 “전편만 한 속편은 없다”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글로벌 흥행에 성공했다. 프로그램 참가자들 또한 매력적이고 강한 개성으로 팬덤이 형성돼 우승자 나폴리 맛피아’(권성준), 최강록을 필두로 새로운 스타 셰프들이 대거 탄생했다.


‘흑백요리사’ 제작진은 요리계에서 명성이 높은 유명한 셰프들을 ‘백수저’, 그 외 요리사들을 ‘흑수저’라는 계급으로 분리했지만 결국 프로그램에서 부각된 건 계급을 아울러 요리에 대한 열정이 있고 모두 주방에서 땀 흘리는 자영업자라는 점이었다. 이는 시청자들에게 묘한 동질감과 위로를 선사했다. 시즌 2 우승자 최강록의 “나는 특출난 음식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전국에 숨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요리사분들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수상소감이 그의 말대로 고된 하루를 마친 후 ‘흑백요리사’를 보던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다. 또한 화려해 보였던 파인 다이닝(fine dining) 레스토랑의 수익은 실상 마이너스에 가까웠고, 그곳에서 일하는 셰프들의 월급도 평균보다 적은 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몇 년 전 ‘오마카세’ 열풍으로 퍼진 ‘서민통’(계급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을 뜻하는 자조적인 신조어)도 어느 정도 해소된 듯 보인다.


우리는 오랫동안 어른들로부터 의사, 변호사, 판사 등 ‘사’로 끝나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일명 ‘화이트칼라’ 전문직에 종사해야 금전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생을 안 한다는 의미다. 이 관념은 어느덧 만연해졌는지 이제 위 직업들은 자연스레 긍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떠올리게 된다. 더 나아가 대중문화 속 미디어는 ‘사’자 직업의 주인공들을 선한 사람처럼, 마치 영웅처럼 표현하는 듯 보인다.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 시리즈의 의사 주인공이나, SBS 드라마 <천 원짜리 변호사>의 변호사처럼 말이다. 그러나 의사에 대한 환상은 지난 의료 파업 때 사라졌고, 그 외 다른 직업들에 대한 낭만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셰프’(요리사)라는 직업이 우리 사회에 새로운 영웅적 모델이 된 건 아닐까. 어쩌면 요리사는 ‘사’로 끝나는 직업 중 가장 친근하다. 거리의 영웅 스파이더맨이 가장 인기 있는 히어로인 이유처럼 말이다.


‘흑요(흑백요리사)’ 출신 셰프들은 이제 유튜브 채널이나 각종 OTT 프로그램에서도 활약하여 그 세계관을 이어가고 있다. JTBC 예능 <냉장고를 부탁해> 또한 ‘흑요’ 열풍에 힘입어 재론칭됐고 최근 가장 화제인 프로그램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유튜브 ‘냉장고를 부탁해’ 클립 영상에 “이제 무한도전의 역할을 ‘냉부’(냉장고를 부탁해)가 하고 있다”라는 댓글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다. 요즘 예능 프로그램들은 전부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를 자랑하거나, 연애를 하든 여행을 하든 고생 없이 놀러 다니는 포맷이기 때문에, ‘혐생’(혐오스러운 인생)에 치인 시청자들은 이를 보고 더 이상 재미를 느끼기 힘들다. 현 시점 모두가 ‘통(痛)’ 없이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은 ‘흑백요리사'나 '냉부' 같은 요리 프로그램 뿐이다. 하기야 “식사하셨어요?”라는 질문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인사말인 한국인에게 ‘식(食)’은 꽤나 중요한 일이지 않는가. 평생 한식만 고집하던 ‘아재’ 입맛 아빠가 ‘흑백요리사’를 보더니 처음으로 딤섬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신기하면서도 괜히 기뻤던 적이 있다. 비록 대기 앱을 통한 예약 전쟁에 실패하고 서울 강남의 유명한 식당은 데려가지 못해 또 잠깐 미묘한 ‘통’을 느꼈지만 말이다.



#흑백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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