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숲의 경계에서 변화하는 존재

영화 <프랑켄슈타인> 리뷰

by 도나

프랑켄슈타인이 괴물 이름이 아니라고?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모티브를 받아 창작된 작품들이 워낙 많기 때문일까? 많은 사람들은 주인공 괴물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괴물이 아닌 그를 만들어낸 남작의 이름이 바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다. 프랑켄슈타인 이름의 반전이 유명해지자 “’프랑켄슈타인처럼 걸어 매니악’이라는 아이돌 그룹 스트레이 키즈의 가사는 결국 그냥 사람처럼 걷는다는 뜻 아니냐"라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글이 ‘밈’화 되어 퍼지기도 했다. 그런데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두 주인공 모두 ‘프랑켄슈타인’이라 불러도 된다는 허락처럼 느껴진다.


창조물 빅터, 피조물 괴물은 곧 아버지와 아들 관계와 다름없기에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같은 성을 갖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영화에서 그들은 마치 동일 인물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먼저 서막을 제외하고 1부(빅터 이야기)와 2부(피조물 이야기)가 동일한 분량을 가진다는 구조적 측면이 그렇다. 또한 두 주인공은 설정상 공통점이 많은데, 어머니 없이 냉혈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고, 생명의 숭고함을 믿는 한 여성을 사랑했다. 두 사람의 삶은 기묘하게 닮아 있다. 괴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운 단어는 바로 ‘빅터’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아버지를 가리키는지 자신을 가리키는지 헷갈려 한다. 그들이 같은 궤도를 맴돌 것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항상 복잡하다. 살면서 한 번쯤은 자신의 모습이 어느 순간 부모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극의 후반부 동생 부부의 결혼식을 앞둔 갈등 상황에서 거울을 통해 괴물과 빅터가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처럼 말이다.


반면 시각적으로는 두 주인공을 정반대의 개념에 두는 것 같아 흥미롭다. 영화에서 빅터는 빨간색, 괴물은 초록색과 함께 표현되는데 이 둘은 보색 관계로 색상 대비 상 극과 극에 위치한다. 빅터에게 빨간색은 곧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사건 이후 생과 사의 힘을 다스리겠다는 욕망이다. 이는 곧 불의 이미지로도 이어진다. “불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프로메테우스? 아님 옮기다 손만 데고 끝날 겁니까” 극중 빅터의 시체 연구 상황에 대한 하인리히의 걱정스러운 질문이다. 그의 뒤틀린 광기로 인해 어쩌면 괴물보다 빅터가 진짜 괴물처럼 느껴진다.


그동안 많은 작품들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초록색으로서 그 기이함을 묘사했다. 초록색 피부에 관자놀이에 나사가 박힌 괴물의 모습 말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기존 초록색의 이미지를 뒤집었다. 흉측한 괴물이 아닌 숲의 정령으로 말이다. 프랑켄슈타인 괴물은 좀비처럼 자아 없이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시체가 아닌 태어나서 점차 성장하는 인간이다. 괴물은 불의 저택에서 태어나 초록색의 숲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언어를 배우고 타인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자연의 섭리를 통해 고통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마침내 눈먼 노인의 집에서 책을 통해 세상과 자아를 깨우쳐 진정한 인간이 된다.


이러한 불과 숲의 대비는 단순한 시각적 효과를 넘어 세대 간의 은유로 확장된다. 불 태우는 윗 세대와 그로 인해 숲에서 고통받는 아랫 세대로 말이다. 이는 기예르모 델 토로가 지속적으로 보여온 환경과 전쟁에 대한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그의 영화들은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연출과 특유의 미장센을 통해 관객에게 마치 잔혹 동화를 보는 듯한 감각을 준다. 이러한 동화적 형식은 현실의 폭력과 비극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며, 문제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더 나아가 델 토로는 동화의 서사적인 측면, 즉 ‘이야기’의 힘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영화에서 빅터와 괴물은 ‘이야기’라는 매체를 통해 각각 상처를 극복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공간이 ‘얼음에 속박된 배’라는 점이 흥미롭다. 배는 육지도 바다도 아닌 경계 위에 놓인 공간이다. 그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인간과 괴물,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사이의 불안정한 경계를 부각시킨다. 얼음에 속박된 설정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 즉 물리적 시간과 공간이 정지된 상황을 의미하며 이 경계를 더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움직이지 못하는 공간에서, 인간은 이야기로 움직인다. 얼음에 갇힌 배 위에서 그들은 더 이상 어디로도 갈 수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직면하게 된다. 이는 델 토로가 ‘이야기’라는 행위를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제삼자인 선장의 변화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극의 초반 선원들의 의견은 무시하고 본인의 주장만 고집했던 선장은 두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변화한다. 선원들을 위해 집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화자뿐만 아니라 청자까지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다. 극 중 엘리자베스의 대사—“선택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유일한 선물”—은 이러한 맥락에서 더욱 의미를 갖는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과거를 직면하고, 그 위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엔딩 신에서 프랑켄슈타인 괴물은 지평선에 떠 있는 태양의 아지랑이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그 풍경은 빨간색도 아닌 초록색도 아닌 여러 색이 섞인 아름다운 모습이다.



#프랑켄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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