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라는 숲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by 고 온
찰스 강가를 1시간쯤 달리면, 마치 양동이로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입고 있는 모든 것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버린다. 햇볕에 탄 살갗이 따끔거린다. 머리가 멍해진다. 정리된 생각은 어느 한 가지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참고 끝까지 달리고 나면, 몸의 중심에서 모든 걸 깡그리 쥐어짜내 버린 것 같은, 어쩌면 모든 걸 다 털어내 버린 듯한 상쾌함이 거기에 우러난다.
- 본문 중에서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하루키가 매일 신발을 신고 길을 나서 맛보는 그 상쾌함이 궁금했다. 그는 내내 달리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은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달리기와 글쓰기를 겹쳐 이야기하고 있다. 나에게 독서와 숲을 하나로 잇는 다리처럼.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비슷하다. 여러 가지 형태의 여러 가지 크기의 구름. 그것들은 왔다가 사라져 간다. 그렇지만 하늘은 어디까지나 하늘 그대로 있다. 구름은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그것은 스쳐 지나서 사라져갈 뿐이다. 그리고 하늘만이 남는다. 하늘이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체인 동시에 실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넓고 아득한 그릇이 존재하는 모습을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 본문 중에서

하루키는 말한다. 달리기는 기록을 세우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과의 대화라고. 내가 책을 읽는 이유도 비슷하다. 한 장, 또 한 장을 넘기는 과정에서 오직 나와 마주하기 위해서다. 숲길에서 남과 경쟁하지 않듯 독서 역시 누구와 비교할 필요가 없다. 내 속도를 지켜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하루키는 기록을 깨기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자신이 어제의 자신을 조금 넘어서는 순간을 붙잡는다. 나 역시 책 속의 모든 문장을 이해하지 못해도 단 한 줄이 나를 어제보다 조금 더 깊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 공백 속에서도 그 순간순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공백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하루키는 매일 같은 시간에 달리고 글을 쓴다.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반복이 그를 작가로 만들었다. 꾸준함의 힘이 그를 그가 원하는 인생으로 이끌었다.


나는 신체를 끊임없이 물리적으로 움직여 나감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극한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직감적으로.
- 본문 중에서

하루키는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가고 그것을 견뎌내는 자신을 좋아한다. 독서를 하다 보면 이해되지 않는 문장 앞에서 지루한 장 앞에서 멈추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순간을 견뎌내면 문득 환한 공터가 나타나듯 책 속에서도 뜻밖의 깨달음이 열린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여 거리를 뛰어간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 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아마 비슷한 이 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계속하는 것-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 본문 중에서

달리기를 하며 하루키가 얻은 하나의 깨달음은 ‘리듬’이다. 그는 일정한 호흡과 보폭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독서에도 리듬이 있다. 무리하게 속도를 내지 않고 책이 요구하는 호흡을 따라갈 때 비로소 문장이 내 것이 된다. 숲의 바람이 계절마다 다른 속도로 불듯 책마다 다른 리듬이 있다. 그 리듬을 존중하는 순간 독서는 더 이상 과제가 아니라 동행이 된다.


나 자신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실무적으로. 얼마만큼, 어디까지 나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면 좋을 것인가? 얼마만큼의 휴양이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휴식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타당한 일관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편협함이 되는가? 얼마만큼 외부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얼마만큼 내부에 깊이 집중하면 좋은가?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얼마만큼 자신을 의심하면 좋은가? 만약 내가 소설가가 되었을 때 작정하고 장거리를 달리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은 전에 내가 쓴 작품과는 적지 않게 다른 작품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거기까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무엇인가가 크게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은 확실히 든다.
- 본문 중에서

숲의 나무들은 자라는 것 같지 않지만 해마다 어김없이 나이테를 새긴다. 눈에 띄지 않는 성장은 결국 가장 확실한 증거로 남는다. 독서도 그렇다. 책 한 권을 다 읽었다고 당장 달라지는 건 없어도 시간이 쌓이면 분명 내 안에 흔적이 남는다. 그것이 나의 나이테가 된다. 숲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지만 그 길을 걸을 때마다 조금 더 단단해진다.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없이 항상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 본문 중에서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건, 하루키가 달리기를 통해 얻은 ‘침묵의 시간’에 관한 고백이다. 그는 달릴 때 오직 호흡과 발걸음 소리에만 집중하며 잡념이 씻겨 나간다고 했다. 나는 이 경험을 독서에서도 느낀다. 숲길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바람과 새소리에 귀 기울이면 복잡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나를 소란에서 꺼내어 고요 속으로 이끄는 일.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 본문 중에서

그는 달리기가 늘 즐겁지만은 않다고 한다. 때로는 괴롭고 지루하며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다고 솔직하게 쓴다. 숲을 걷다보면 발이 아프고 길이 지루한 순간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끝까지 걷는 것이다. 하루키가 달리기를 통해 배운 인내가 글쓰기를 가능하게 했듯 나도 책과 숲을 통해 그 인내를 조금씩 배운다.


여기서 중요한 목적은 '이 정도 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몸에 선고하는 것이다. '선고한다'는 것은 물론 비유적 표현이고, 아무리 말로 선언했다고 해도 몸은 그렇게 쉽게 말을 듣지 않는다. 몸이라는 것은 지극히 실무적인 시스템인 것이다. 시간을 들여 단속적• 구체적으로 고통을 주면 몸은 비로소 그 메시지를 인식하 고 이해한다. 그 결과 주어진 운동량을 자진해서(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수용하게 된다. 그 뒤에 우리는 운동량의 상한선을 조금씩 높여간다. 조금씩 조금씩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 본문 중에서

나는 책을 덮으며 독서를 하나의 훈련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단순히 지식을 얻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나를 단련시키는 과정.

숲이 매일 조금씩 자라듯, 달리기가 근육을 단련하듯, 독서는 마음의 근육을 단련한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 본문 중에서

나는 질문한다. “너는 오늘, 너 자신을 조금은 넘어섰는가?” 완벽한 답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어제보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내딛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내일이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그것은 내일이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숲은 매일 자라지만 그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책을 읽는 나 역시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 뒤돌아보면 나무의 나이테처럼 내 안에도 조용히 쌓인 시간이 있을 것이다. 하루키가 달리기로 자기 세계를 지켜낸 것처럼 나는 독서라는 숲에서 나의 세계를 지켜가고 싶다.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 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 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그렇다, 아마도 이쪽이 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 본문 중에서

하루키가 매일 달리며 자기 자신을 붙들었듯 나는 매일 책장을 넘긴다. 숲이 나무를 키우듯 독서는 나를 키운다. 그리고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늘을 내어주는 나무가 되기를... 하루키처럼 꾸준히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를 꿈꾼다.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 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놓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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