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사 리드센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을 읽고
"언젠가는 이 땅의 삶도 끝을 맺게 될 거예요. 그게 세상의 이치죠."
- 본문 중에서
숲길을 걷다 보면 마음이 먼저 조용해진다. 작고 평화로운 소리들이 내 맘 깊이 들어와 앉는다. 나뭇잎의 바스락 소리, 숲을 가로지르는 바람소리, 운이 따라주면 만나는 새소리까지.
리사 리드센의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을 읽었다. 이 소설 속 주인공 보는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정리한다. 낙엽이 떠나면서 바닥을 비옥하게 만드는 가을 숲처럼...
나는 스카프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면서 타들어가듯 아픈 마음을 감은 눈꺼풀 뒤에 숨겼다. 나이가 들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물은 대부분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 본문 중에서
보는 치매로 요양원에 들어간 아내의 체취를 잊지 못해 그녀가 늘 매던 스카프를 항아리에 보관한다. 그녀가 그리울 때면 항아리 뚜껑을 열어 그녀의 냄새를 맡는다. 이 소설은 소소한 일상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식사를 차리는 모습, 반려견을 돌보는 모습, 노인을 돌보는 요양보호사들의 기록들. 부모와 자식의 갈등과 사랑. 이런 사소한 장면들을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그가 끝까지 무엇을 지키고 싶어 하는지가 궁금해졌다. 보의 몸은 서서히 쇠약해지고 익숙했던 집은 요양에 맞춰 조금씩 바뀌며 사랑하는 것들은 손에서 멀어진다...
이 모든 것이 꿈을 통해 내게 되돌아왔다. 나는 감상에 젖어 편지를 썼다. 그런 뒤 비누로 손을 씻고 따뜻한 물로 헹구었다. 그 순간을 더 소중히 간직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적어도 나는 당신에게 서로 다른 꽃 이름을 물어보거나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초롱꽃, 클로버, 데이지, 서양벌노랑이꽃. 내가 편지에 썼던 것은 그것이었다. 기억할 수 있는 모든 풀과 식물의 이름을 다시 듣고 싶다고. 하지만 이제 그건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젠 내 삶도 얼마 남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
잠에서 깼을 때 본능적으로 식스텐에게 손을 뻗었지만 손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허함이 나를 덮치자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의 괴로운 감정을 어루만져 주었고, 삶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 본문 중에서
보의 곁에는 늘 애견 식스텐이 있다. 보가 느끼는 식스텐의 체온은 그의 존엄을 지탱해 주는 작은 모닥불 같다. 때로는 그 모닥불마저 꺼질 위험에 놓이지만 보가 그것을 끝까지 지키려 애쓰는 장면들에서 나는 깊은 위로를 받았다. 늙어간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끝까지 지키고 싶은지 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가 선택한 것은 완벽한 회복도, 기적 같은 반전도 아니다. 그는 끝까지 가능한 한 자기 자신으로 남아 보는 일을 선택한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불안한 생각을 떨쳐보려 애썼다. 이전에는 사서 걱정하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하지만 내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씩 무너져 내려가는 최근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문득 거울 속의 남자에게 애틋한 연민을 느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 본문 중에서
나는 이제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엇이 좋은지 간섭해 오는 일에 너무나 지쳐버렸다.
- 본문 중에서
나는 한스가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패자가 된 듯한 느낌과 함께. 너무나 푹신한 침대 속에서 금방이라도 푹 꺼져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식스텐은 바닥에 누워 있었다. 한스가 침대보를 손으로 두드리며 올라오라는 신호를 주었음에도 식스텐은 꿈쩍도 하지 않았었다.
"얼른 올라와. 우리에겐 선택을 할 권리가 없단다." 나는 조심스레 내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식스텐은 불안한 듯 주저하더니 뛰어올랐다.
- 본문 중에서
그녀가 내 몸을 더 깨끗하게 씻겨줄수록 가슴속의 공허함은 더 커졌다. 그녀가 그 빌어먹을 스펀지를 문질러 내 피부가 더 빨개질수록 나는 점점 작아졌다. 그녀가 대문을 닫고 나선 후 침대에 누웠을 때, 내게 남은 것은 껍데기뿐이었다. 공허함이 내 몸속에서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견딜 수 없다고, 이제 더는 견딜 수 없다고. 그것이 내 안에서 들려오는 유일한 소리였다.
- 본문 중에서
보는 아들 한스와 관계가 매끄럽지 않다. 늘 아내가 그 사이에서 많은 중재를 도와주었다. 그래서 답답할때면 그는 늘 곁에 없는 아내를 그리워한다. '당신이 있었다면...' 하고 되내인다. 둘 사이에는 오해와 서운함 그리고 오래된 거리감이 있다. 이 소설은 폭발적인 클라이맥스 대신에 낙엽이 조금씩 쌓이는 속도로 관계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 한마디의 어조, 침묵, 돌아서는 걸음의 망설임 같은 것들이 미세하게 어둠을 걷어낸다. 보와 한스가 결국 나누게 되는 작은 동의들과 공감이 둘 사이의 진정한 화해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사실 할아버지도 아버지가 왜 그렇게 걱정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시잖아요." 엘리노르는 내 질문을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건 할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엘리노르는 가끔 나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느낌이 어떤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목소리에 나는 자극도 되고 불편하기도 했다.
"그래, 호박벌...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 말고도 많은 것이 있단다."
-본문 중에서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 거대한 신념이나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두루미가 남쪽으로 향하기 전에 보가 하고자 했던 일은 거창하지 않다. 세월을 견디며 삶의 끝자락에서 마주하는, 결국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떠올리고, 그들과 몇 마디를 더 하고, 사랑했던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일...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사람이 한스였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를 내 곁에 두고 그를 바라보며 그에게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비록 내가 겉으로는 심술궂고 무뚝뚝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마음속으로는 항상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 본문 중에서
떠남의 이야기를 읽으며 머무름을 배우고 상실의 장면에서 위로를 느낀다. 숲이 내게 오래 가르쳐 준 것처럼 사라짐은 끝이 아니라 순환이며, 끝은 언제나 다른 시작의 문턱이라는 사실을...
나는 숨을 고르기 위해 숲 가장자리에서 발을 멈추었다. 여기에 수도 없이 왔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때,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이곳을 찾곤 했다. 한스가 온건 청년회에 가입했을 때, 투레가 난생처음으로 크게 아팠을 때, 그리고 당신이 집을 떠났을 때도 나는 개를 데리고 이곳에 왔다. 이곳을 찾는다 하더라도 상황이 나아지거나 내가 더 현명해지는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본문 중에서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요와 감당 가능한 이별...
나는 어머니에게 살아생전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던 것을 너무나도 후회했다. 어머니는 노인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 말을 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노인에게 향하는 분노를 어머니와 나 사이에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어머니와 단둘이 있을 때도 진심으로 행복할 수 없었다.
- 본문 중에서
이 소설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슬프거나 가슴 저리지 않는다. 주인공 보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그 준비는 아주 소박하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나 자신도 뭔가 정리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관을 보았다. 다음번에는 아마도 당신의 사진이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문득 무거움과 기대감이 묘하게 뒤섞여 나를 엄습했다. 당신을 흙 속에 묻는다는 생각은 너무나 매정하고 비현실적이었지만, 동시에 얼른 그 일을 끝내버리고 싶다는 마음도 함께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 나는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
- 본문 중에서
남쪽으로 떠난 새들이 다음 해 다시 돌아오듯 계절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책장을 덮으며 나는 내 삶의 가을을 생각한다. 남겨둘 일과 덜어낼 일을 구분해야겠다.
"너도 알다시피 난 네가 자랑스럽단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겨우 말을 이었다.
"네 어머니도 마찬가지야."
한스는 내가 잊고 있던 그만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소년 시절의 눈빛이었다. 내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을 때의 눈빛. 마치 이 세상에는 그와 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
그가 눈을 깜박였다.
그가 허리를 굽혀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잘 알고 있어요. 아버지."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