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겨울 숲을 걷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나무는 묵묵히 제자리를 지킨다. 삶의 무게를 말없이 견디는 그 단단함이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속 인물과 닮아 있다.
이 소설은 1980년대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석탄 상인 ‘빌 펄롱’의 이야기다.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본문 중에서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 본문 중에서
어느 날 그는 지역 수녀원에 배달을 갔다가 학대받는 소녀들을 목격한다. 사회 전체가 침묵으로 덮어둔 잔혹한 현실 앞에서 펄롱은 자신의 작은 선의가 얼마나 무력한지 깨닫는다.
그는 현실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지만 결국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조용히 선택할 뿐이다. 그 선택이 바로 인간이 세상과 맞서는 방식이며 이 책이 전하는 가장 큰 에너지다.
곧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과를 머릿속으로 돌려보고 실제로 닥칠지 아닐지 모르는 문제를 고민하느니보다는.
- 본문 중에서
이 작품은 폭력이나 격렬한 대립 대신 사소한 친절과 그로 인한 변화를 그린다. 하지만 그 사소함이 쌓여 인간의 존엄을 지켜낸다는 점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소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분노도 비난도 없다. 그 대신 빌 펄롱의 조용한 행동 하나로 인간의 양심이 얼마나 큰 울림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숲이 주는 에너지는 화려한 빛도 거창한 변화도 없다. 하지만 고요 속에서 생명은 자라나고 나무는 묵묵히 제 몸을 키워낸다. 책의 에너지도 그렇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지만 그 여운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펄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 본문 중에서
세상은 늘 거대한 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지탱된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자리에서도 묵묵히 숨을 쉬는 존재들의 조용한 생명력처럼 이 책은 작은 선의의 힘을 믿게 만든다.
누군가의 하루를 따뜻하게 바꾸는 일, 누군가의 침묵을 이해해 주는 일, 그 모든 사소한 일들이 모여 세상이 조금 더 밝아지는 것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 본문 중에서
세상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모른 척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누군가의 하루를 바꾸는 건 언제나 거창한 정의가 아니라 이처럼 사소한 용기와 친절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 본문 중에서
삶이란 결국 그런 선택의 연속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일, 말 대신 행동으로 마음을 건네는 일,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아도 옳다고 믿는 길을 걷는 일.
그의 선의는 세상을 바꾸진 않지만 분명 누군가의 마음을 지탱할 것이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 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본문 중에서
사소한 선의...
그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보여준 가장 인간적인 품격이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수많은 겨울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누군가는 여전히 불을 지피고 또 누군가는 그 불빛을 멀리서 바라본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 본문 중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돕는 '이처럼 사소한 일들'을 선택함으로써 어쩌면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