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이스탄불]을 읽고
내가 태어나 평생을 살았던 이스탄불은 내게 논쟁의 여지가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이 운명에 관한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도시 이스탄불을 비애한다. 그의 비애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사라지는 것을 기록하려는 허물어지는 시간에 맞서는 조용한 저항에 가깝다.
그는 이스탄불의 거리, 골목, 낡은 건물, 검은 안개가 낀 보스포루스 해협을 기록하며 사라지지 않으려는 기억의 싸움을 쓴다.
왜인지 모르게 파묵이 사랑하고 두려워했던 그 도시가 낙엽 쌓인 숲과 닮아 있다.
우리는 삶에서 경험하는 것들의 -가장 깊은 희열조차- 의미를 다른 사람들을 통해 아는 것을 습관화한다.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서 듣고 열정적으로 받아들인 후, 우리가 기억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여, 굳게 믿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했던 이 아기 시절 '기억들'처럼, 우리가 인생에서 했던 다양한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말했던 것은 시간이 흐른 후 단지 우리 자신의 생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했던 것 자체보다 더 중요한 기억으로 변한다. 우리가 경험한 삶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의미도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게 된다.
- 본문 중에서
파묵에게 이스탄불은 한 도시를 바라보는 개인의 기억이자 사라져 가는 정체성에 대한 애도이다.
글을 읽어가며, 그가 자신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을 붙잡기 위해 이 글을 썼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이 폐허, 상실감, 슬픔을 도시와 공유하면서,
- 본문 중에서
나의 어린 시절의 보스포루스를 특별한 곳으로 만든 많은 것들이 서서히, 마치 하나하나 불타 버린 해안 저택들처럼 사라지자, 보스포루스에 가는 것은 어떤 추억을 상기시키는 즐거움도 주기 시작했다. 사라진 오래된 양식장에 대해, 양식장이 그물을 사용해 물고기들에게 파 놓은 일종의 함정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어떻게 설명했는지에 대해, 나룻배를 타고 해안 저택들을 돌아다니며 과일을 파는 상인들에 대해, 어머니와 함께 갔던 보스포루스 해변에 대해, 보스포루스에서 수영하는 즐거움에 대해, 하나하나 닫히고 버려진 후 호화로운 레스토랑으로 바뀐 보스포루스 선착장에 대해, 이 선착장 옆에 나룻배를 정박시킨 어부에 대해, 그들의 나룻배를 타고 짧은 여행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나도 이제 좋아한다. 하지만 보스포루스는 내게 여전히 어린 시절의 보스포루스와 같다. 그러니까 내게 보스포루스는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회복시키고, 도시와 삶을 건재하게 만드는 무한한 어떤 선과 긍정의 원천이다.
나는 때로 이렇게 생각한다.
"삶이 그렇게 최악일 수는 없어. 여전히 보스포루스로 산책 나갈 수는 있으니까."
- 본문 중에서
파묵은 이스탄불의 낡은 건물들을 애써 묘사하며 그곳에 깃든 비애를 줄곧 이야기한다. 그는 도시의 몰락을 슬퍼하고 그 몰락을 통해 그 자신을 들여다본다.
우리가 이 감정과 이 감정을 도시에 퍼뜨린 풍경, 장소, 사람을 잘 느끼고, 그것에 길들여졌을 때, 어느 순간 이후 도시 어느 곳에서든지, 마치 추운 겨울 아침에 갑자기 해가 나면 보스포루스 물 위로 가느다랗게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그 수증기 같은 슬픈 감정이 풍경과 사람에게서 볼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드러난다.
- 본문 중에서
내가 말한 비애라는 감정이 세계, 물질적 이익 그리고 희열에 집착한 결과라는 것을 암시하는 첫 번째 관점은 "만약 당신이 이 덧없는 세계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당신이 진실하고, 좋은 무슬림이었다면, 어차피 이 세계에서 비롯된 상실감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신비주의에서 비롯된 두 번째 관점은 단어의 의미 그리고 이 상실감과 고통이 우리 인생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관해 더 긍정적이며 더 사려 깊다. 신비주의 관점에 따르면, 비애는 신에게 충분히 다가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충분히 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결핍의 감정 때문이다. 진정한 신비주의 구도자는 재산이나 재물, 더욱이 죽음같은 세속적인 문제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는 신에게 다가갈 수 없고, 영적인 삶에서 심오해지지 못하기 때문에 공허감, 상실감, 부족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이러한 이유로 비애의 존재가 아니라 비애의 부재가 고뇌의 원인이 된다. 비애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비애의 원인으로 간주하고,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기 때문에 슬퍼하며 이성 끝까지 추적하는 이 사고는, 이슬람 문화에서는 비애에 고매한 존경심을 표시했다. 최근 200년 동안 이 단어가 이스탄불 문화, 일상생활, 시에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음악에서 지배적으로 사용된 것도 이 고매한 존경심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최근 세기에 이스탄불 그리고 이스탄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전염시킨 가장 강력하고 가장 영속적인 감정이 비애라는 것을, 단지 단어에 대한 신비주의적 고매한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명하는 것은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 본문 중에서
파묵에게 글쓰기는 잃어버린 것들을 완전히 잃지 않게 하는 사라짐에 맞서는 일이다.
낙엽이 썩고 나무가 쓰러져도 그 흔적은 흙 속에 남아 다른 생명을 키운다. 그것이 숲이 가진 순환의 지혜이고 인간이 글로 남기는 기록의 이유인 듯하다.
아버지는 우리가 인생에 대해 물었던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절대 찾을 수 없을 테지만 그런 질문은 좋은 것이며, 삶의 목적과 행복은 우리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고 싶지 않았던 곳에 있지만 이 모든 고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 고민들로 고심하거나 삶에서 기쁨이나 심오함을 추구할 때 자동차나 집이나 배의 창문을 통해 보았던 모습들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삶은 음악이나 그림이나 이야기처럼 변화무쌍하게 끝이 날테지만, 우리 눈앞에서 흐르는 도시의 모습은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꿈속에 나오는 추억처럼 우리와 함께 남을 거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사라지는 것을 붙잡으려 애쓰는 대신 사라짐 속에서도 살아 있는 것들을 기억하는 글...
이스탄불의 삶에, 치유할 수 없는 병처럼 배여 있는 도무지 벗어날 수 없고, 운명처럼 존재하는 빈곤, 혼란 그리고 지배적인 백색과 흑색은 이렇게 해서 실패와 무능이 아닌 어떤 영광으로 지속된다.
- 본문 중에서
폐허와 비애, 그리고 한때 소유했던 것을 잃었기 때문에 내가 이스탄불을 사랑한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다른 물건들을 얻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폐허를 보기 위해 나는 그곳에서 멀어져 다른 곳을 향해 걸어갔다.
-ㅡ본문 중에서
책을 덮고 나면 묘한 정적이 남는다.
파묵의 슬픔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라짐을 경험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다.
파묵의 ‘이스탄불’은 한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사라짐과 존재 사이에서 자신을 지켜낸 이름인 것이다.
사람짐 속에서 남는 것, 그는 그것을 지킨 것 같다.
베이올루의 거리가, 그 거리의 어두운 구석이, 도망치고 싶은 욕구와 죄책감과 함께 내 머릿속에서 네온사인처럼 꺼지고 다시 켜졌다. 가끔 화가 나고 극도로 예민한 순간에 그랬듯이, 내가 좋아하는 그 반쯤 어둡고 매력적이며 더럽고 사악한 도시의 거리에 있는 내가 도피할 두 번째 세계는 이미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날 밤 어머니와 나 사이에 싸움이 나지 않을 것이며, 잠시 후 문을 열고 나를 위로할 거리로 나갈 것이며, 한동안 걸은 후에 한밤중 집으로 돌아와 거리의 분위기에서, 내가 사로잡혔던 어떤 화학 작용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내어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화가가 되지 않겠어요. 난 작가가 되겠어요."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