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내게 건넨 질문

유선경 [질문의 격]을 읽고

by 고 온
이처럼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은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끈다.
- 본문 중에서


숲을 걸을 때 종종 내 마음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 괜찮은가?’

‘이 길은 정말 네가 가고 싶은 길인가?’

나는 문득문득 올라오는 이런 질문들에 답을 미루며 살고 있다는 걸 안다.


질문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알아야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즉 질문의 수준은 ‘앎’에 달려 있다. 질문은 얼마나 모르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아는지를 드러낸다. 아무런 질문도 할 게 없다면 알아서가 아니라 몰라서, 혹은 알고 싶지 않아서일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살면서 내 안에서 질문이 일어나는 순간을 잘 직시해야 한다.

여느 때와 내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를 돌봐야 한다.

그러나 나는 매번 질문하지 않는 것을 택한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며 나를 책망하거나 답을 미루는 순간이 많다.

답을 찾게 되면 아플 내가 두렵다.


착각하지 말자. 당신이 안다고 여기는 것이 진실로 '아는 것'인가, '아는 것처럼'인가. 스스로 생각하고 탐구하고 추론해서 선택 판단 결정해야 할 사안을 인터넷 플랫폼에 위탁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놓고 자기가 똑똑하게 처리했다고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나라는 정체성은 어떠한 방식과 과정으로 생각, 탐구, 추론, 선택, 판단, 결정 등을 경험하느냐가 기억으로 켜켜이 저장되면서 형성된다. 남이 만든 표시에 위탁한다면 그 정체성은 '남에게 있는 나' 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 '남'만 있고 '나'가 없다.
- 본문 중에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나에게 남만 있고 나는 없다'라는 대목이 깊이 와닿는다.

남에게 얻는 대답, 남에게 위탁해서 사는 삶.

자신에게 진실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요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갈듯한 기세로 집중하는 모습이 위험하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주는 듯하다.


문장에 '왜'를 넣는다고, 문장 끝에 물음표를 매달아 놓는다고 다 질문이 될 수 없다. 질문에는 목적과 방향이 있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답을 찾거나 문제를 파악해서 해결하기 위해 방법을 찾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문제를 파악해서 해결하기 위해'가 목적이라면, 답이나 방법을 찾는 것이 방향이다. 앞서 예시로 든 질문(아닌 질문)들에는 그러한 목적과 방향이 없다. 불평, 불만, 비난이거나 무턱대고 투척해서 뭐라도 걸려라 하는 말 미끼다. 솜씨 좋은 재단사라도 된 양 판단을 끝냈고 답을 정해 놓았기에 상대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다. 그러므로 질문이라 할 수 없다. 여기서 잘못된 질문의 특징이 드러난다. 잘못된 질문은 대화하기 싫게 만든다. 할 말 없게 만든다. 심지어 갈등이나 불화를 조장한다.
- 본문 중에서


내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의 온도가 곧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 된다.

나는 나에게 단단하게 묻는다

“나는 지금, 내 마음에 진실한가?”
“나는 오늘, 나에게 다정했는가?”

그 물음들에 선명한 대답은 없다.
하지만 그 질문들이 나를 일깨우고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조금씩 자란다.


대충 아는 것은 무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무지의 주요 특징은 질문하지 않고 자꾸 답을 하려든다는 것이다. 잘 안다고 스스로 믿기에 타인의 말이나 생각에 관심도, 호기심이나 궁금증도 없다. 그저 답을 하려고만 든다. 그 답으로 상대를 설득하려거나 통제하 려거나 가르치려 든다. 그러는 이유가 '상대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구태여 그 진심까지 의심하지 말자. 그러나 질문하지 않는 사람이 내놓는 답을 믿지 마라. 무지한 답이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숲은 늘 말없이 묻는다.

삶은 매 순간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에 답하려 애쓰는 존재다.

어쩌면 사는 일의 전부가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는 동안 크고 작은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질문을 통해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제대로 질문하고, 제대로 답을 듣고, 제대로 내용을 해석하는 습관을 들이면 분별력이 생겨 문제를 방지할 수 있고 문제가 발생한다 해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분별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강조했다. 그러니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질문을 찾으라. 질문이 당신의 인생을 축조한다.
- 본문 중에서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묻고 답한다. 그러나 정작 질문의 격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많지 않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누구라도 논리적 사고나 비판적 안목을 갖추지 못한, 생각하기의 무능함이 일상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악을 저지를 수 있다. 이들은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자신하며 직감을 믿는다. 그러니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한다.
- 본문 중에서


우리는 때로 묻는 척하지만 사실은 이미 답을 정해놓고 있을 때가 많다.


질문은 몰라서도 하고 확인하기 위해서도 하지만 다른 답을 알기 위해서도 한다. 알고 있는 답보다 더 나은 답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런 태도는 언제나 현명하다. 답이 하나라고 믿으면 많은 기회를 놓친다. 답이 여러 가지라고 믿으면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상상하지 못한 다른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나에게 숲은 언제나 질문의 공간이었다. 고요하지만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존재...


매개체가 사람이든 무엇이든 어디부터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 일절 비판하지 않고 의심조차 없다면 거짓과 오류, 허위가 판을 치는 데 비옥한 토양이 된다. 순식간에 잭의 콩나무처럼 뻗어 올라가 온 세상에 콩깍지 터지는 소리를 퍼트리며 심각한 경우 갈등을 부추겨 전쟁까지 일으킨다.
- 본문 중에서


질문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느낀다.

잭의 콩나무 비유는 정말 절묘한 발상이다.


대상이 같아도 상황이 바뀌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더 이상 예전의 답이 맞지 않다. 질문을 바꾸면 답이 달라진다. 예전에 확신했던 답이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고 느끼는가. 질문을 바꿔야 한다. 같은 질문을 고집하면 오답의 연속이다. 그러면서 나는 맞는데 세상이, 사람들이 틀렸다며 갈등이나 좌절에 빠질 수 있다. 질문을 바꾸자. 질문을 바꾸면 사고의 전환이 생기고 시력에 맞는 안경을 이제야 찾은 것처럼 다른 관점이 탄생한다.
- 본문 중에서


묻는다는 건 아직 배우려는 마음이 있다는 뜻이고 그 마음이 곧 살아 있음의 증거다.

책을 덮고 나는 나에게 묻기로 한다.

빠른 대답 대신 오래 머무는 질문으로...

그 질문들이 쌓여 내 삶의 방향이 되고 그 길 위에서 나는 조금씩 자라날 것이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으로 질문하라
- 본문 중에서


숲은 오늘도 묻는다.
“너는 너 자신에게 어떤 질문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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