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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Jul 25. 2021

영화 리뷰_<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찬찬히 하나하나 기억하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영화를 고를 때 다른 사람들의 평을 신중하게 고려하는 편이다. 

하루 중 2시간을 할애해서 온 집중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꼭 그럴 가치가 있는 영화에만 시간을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래 이 영화는 내가 보지 않기로 한 영화였다. 영화 속에서 잡지의 필름 사진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직장인으로 설정된 주인공 월터가, 그를 자르기 위해 고용된 회사의 구조조정 매니저와  초능력 영웅이 되어 대결을 펼치는 뚱딴지같은 상상을 하는 장면이 당시의 나에게는 너무 지나친 '탈'현실성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시작 30분도 전에 영화를 껐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다시 찾아보게 된 건, 요즘 유행하는 성격 유형 테스트 비슷한 것 때문이었다. 어떤 영화 아카이빙 플랫폼의 마케팅 목적으로 만들어진 테스트였는데, 자신의 영화 속 '부캐'를 확인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매트릭스의 주인공인 논리적인 사색가 '네오'가 나왔다. 사실 매트릭스도 끝을 보지 않고 껐다는 사실이 기억났지만, 그 유명한 빨간약과 파란 약을 고르는 장면은 봤다. 살다 보면 두고두고 떠오르는 장면인데, 나는 그때마다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빨간약을 고르기를 마음속으로 선택한다. 용기나 호기심도 그 이유일 수 있겠지만, 나는 '진실'을 아는 것이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테스트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네오'들에게 추천하는 영화 목록이 있었고 그중 하나는 <인터스텔라>, 하나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였다. 

요즘 이런 테스트는 소름 끼치게 내 성격과 취향을 잘 파악한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인터스텔라는 길지만 나중에 꼭 다시 보기로 다짐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다) 




서론이 길었다. 

이 영화의 몇 가지 포인트 들에 대해서만 짚어 기록해두고자 한다. 



1. 월터의 여정 도중에 계속해서 전화가 오는 온라인 데이팅 어플 직원 '토드': 


 월터가 속한 데이팅 어플의 직원인 토드는, 월터가 여정 중에 쌓아 올린 업적들을 어플에 고스란히 추가하는 작업을 한다.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거나, 바닷속에서 상어를 물리치거나, 히말라야 산을 등반하는 등의 경험이 이 어플 속 월터의 '매력'란에 추가된다. 그린란드, 아일랜드, 아프가니스탄까지 가서 숀을 찾은 여정을 경험한 월터는 최고의 매력 어필 란을 완성했지만 결국 어플 탈퇴를 결심한다. 월터는 왜 최고의 조건을 달성한 상태에서 어플을 탈퇴했을까. 작가는 왜 데이팅 어플이라는 장치를 스토리 전체 흐름의 핵심으로 추가한 걸까. 


 영화를 보면서 데이팅 어플에 "글자로 쓸 수 있"는 매력은 "사회가 요구하는 이력서"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텍스트 몇 마디로 규정지어질 수 없는 사람이고, 텍스트라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편견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기계의 사양을 비교하고 고를 때라면 몰라도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 적합한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라는 존재를 텍스트화해서 끊임없이 어필해야 하는 현대의 사람들은, '허세와 과장'이라는 손쉬운 경로를 찾아 자기 존재를 실제 자기 자신보다 부풀리고 부풀린다. 결국 사회에 진출하려면 진정성을 버리고 기만적인 사람이 되기를 강요받는다. 루소는 이 현상을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타자화'라고 표현하며 자본주의 내의 인간 소외의 단초라고 주장했다. 


 나는 꽤 어릴 적부터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심 불편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오히려 드러내지 않는 것에 집착했는지 모른다. 나를 드러내야 한다는 압박이 생기면 어떤 방식으로든 진정성을 상실하게 될까 두려웠고, '드러냄'이라는 행위 자체에 들이는 시간이 아까워서, 차라리 그 시간을 드러나지 않는 나를 채우는 데에 쓰고 싶었다. 월터 또한 매력란을 채우기 위해 여행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플을 탈퇴했을 것이다. 사실 월터에게 중요했던 것은 남에게 보이는 매력란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다. 월터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용기 있게 여행을 떠난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토드의 전화를 받고 쩔쩔매는 월터로 시작되지만, 후반부에서 그는 직접 토드를 만나 당당하게 대면한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직접성, 대면성, 진정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2. 몽상가 월터에게 실행의 용기를 주었던 것은 무엇인가 


 영화의 초반부, 월터가 출근하는 장면에서부터 회사의 모토가 벽에 멋지게 새겨져 있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인물들의 대사에서 줄곧 등장하기도 하고, 숀이 남긴 지갑에도 새겨져 있는 월터의 회사 <라이프>지의 모토인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라는 문구가 드러나는 장면들이다. 같은 목적을 위해 뭉친 개인들, 이들을 비로소 하나의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 '미션'이나 '모토'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 같다는 공포가 은연중에 스며들 때가 있다. 니체의 영원 회귀설처럼, 지금 하는 일이 나의 미래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인과관계의 안정적인 사슬에서 비참하게 쫓겨난 것과도 같은 공포다. 한편으로는 지금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지만, 역시나 인간은 시지프스와도 같은 무의미한 노동에 쉽게 무력해진다. 이런 연약한 인간들에게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의사를 충분히 부여하는 것이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월터가 몸담은 공동체인 잡지 회사에는 파산이라는 '마지막'의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월터가 여행을 감당하기 위한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과거의 월터처럼 실행의 용기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최근에 면접 질문 비슷하게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정말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도전 결핍인 채로 23년을 살아온 것이다. 안일함과 안정에 대한 추구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덕분에 나는 크게 실패하거나 다치거나 상처 받은 일이 없다. 또 예상 면접 질문 따위의 완벽한 모범답안 작성을 적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도전을 안 해봤다는 사실에 위기의식은 느낀 것은 아니다. 그냥, 아직 나에게 실행의 용기를 줄만큼 애정을 쏟았던 공동체에 속했던 경험이나, 어떤 것의 '마지막'에 큰 의미를 둔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도전의 기회가 오기를 호시탐탐 노리기로 했다. 


 3.  삶의 정수이자 아름다움은 어떤 풍경이나 현상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임을. 


 한 사람은 여러 겹의 기억과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가 설정한 월터의 가족사나 인간관계 하나하나도 생각할 것들이 참 많았는데, 그중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스케이트 보드를 배워 대회에 나갔던 어린 월터의 경험이 가장 좋았다. 월터가 그 경험을 여행에서 시의적절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돌을 손바닥에 묶은 것을 보호장갑 삼아 뻥 뚫린 도로를 스케이트를 타고 달리는 장면은 나에게 '자유'라는 모호한 개념을 영상화한 것으로 와닿았다. 


 한 사람은 여러 겹의 기억과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가장 복잡하고 기적적인 존재다. '필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남은 월터의 삶의 정수는, 바로 자신의 일에 몰입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결국 그것이 모든 도전과 여행을 감당하면서라도 알고 싶었던 목적이자, 자신도 모른 채로 누리고 있었던 삶의 정수인 것이다. 

 글을 다 쓰고 보니 이 영화가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영화 속 회사의 모토 자체가 인간성이 무엇인지를 정의한다)과 노동에서의 인간 소외를 비판한 영화라는 추측이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단순히 동기부여와 해피엔딩을 선사하는 영화가 아니어서 좋았고, 내가 좋아하는 메시지가 남아서 더 좋았다. 인간이라면 삶의 정수를 찾아 지구 반대편까지 헤맬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 자신을 둘러싼 일상, 그리고 자기 자신 속에서 삶의 정수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려도 좋고, 어떤 방식의 기이한 여정을 떠나도 좋다. 자유롭게 고민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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