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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Jul 11. 2021

책 리뷰_<세습 중산층 사회>

지금까지 부모님의 계층을 세습받기 위해 잘 짜여진 인생을 살았다.

 

사진 출처: yes 24


나의 부모가 중산층이 아니었다면, 내가 누리는 것들의 반절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을 꽤 오래 전부터 확신했다. 

이 확신 속 나의 딜레마는, 이를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였다. 

그저 부모님 덕에 재정적 지원을 누릴 수 있으니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안도하며 즐길 것인가,

불평등의 교정을 위해 양심을 부풀릴 수 있는 한 부풀려 나름의 고군분투를 할 것인가. 

후자는 줄곧 나의 선택지였지만, 불평등의 수혜자라고 스스로 생각해 왔던 나에게는 당사자성,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화를 낼 '명분'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가끔씩 지방대의 취업 혜택이나 인국공 사태 등 현실의 공정성을 납득할 수 없을 때, 그리고 내가 누리는 것을 빼앗긴다는 생각이 들 때, 교묘하게도 '기만적인' 내가 아니라 '솔직한' 내가 등장해 몰래 불평등의 고착화를 응원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사회 구조적 문제의 해결은, 문제로 인해 직접적 피해를 입는 당사자와 비당사자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성을 확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느꼈다. 중요한 것은 비록 내가 지금은 불평등의 피해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불평등 구조가 나와 어떻게 연결지어질 수 있는 문제인지 탐구하고, 언제든 나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어쩌면 이미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는 것이다. 


이 책은 경제학자인 저자의 입장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우리'세대에 어떻게 세습되고 고착화되는지의 전 과정을 다룬다. 



-한번 아싸는 영원히 인싸집단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경고 


 노동시장 진입 단계는 2중 선별과정으로 이루어진다. 1차적 선별은 대입, 2차적 선별은 최종적 단계로서의 노동시장 진입이다. 이 두 가지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한번이라도 삐끗해서 노동시장의 '외부자'가 된다면, 다시 '내부자'로 승급하기 쉽지 않다. 그러니 그 시작이 되는 대입이 곧 '계층 사다리'로 불리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학벌이 높은 사람, 그 중에서도 최상위 13개 대학의 졸업자들이 노동시장에서의 우위를 점한다. 대기업은 명문대 졸업자를 원하고, 명문대 졸업자는 높은 임금을 받는다는 당연한 수요공급의 논리. 책에서는 "기업들이 고숙련 노동자에 대한 상대 수요를 늘렸기 때문에" 최상위 대학과 나머지 대학 졸업자들 간의 임금 격차가 벌어진다고 설명한다. 대기업 정규직의 초봉과 중소기업 비정규직의 초봉은 2.2배 정도 차이가 난다. 학벌에 따른 임금격차는 궁극적으로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노동시장 지위를 거쳐서 발생한다. 


 문제는 "대기업 정규직"의 관문이 여간 좁혀진게 아니라는 점이다. <수축사회>라는 책에서 말했듯이, 적어도 우리나라의 경제는 지금 팽창이 아니라 수축 중이기 때문에, 대기업은 그리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기업 사무직에 요구되던 업무는 점점 "루틴화"되면서 IT 기술로 대체가능한 모든 사무직들의 일자리는 줄어든다. (책에서는 이 내용을 루틴화 가설, 그리고 업무편향기술발전 이라는 용어로 제시한다.) 


높아진 성공의 문턱 앞에서 청년들을 좌절시키는 요인들을 정리해 보았다. 

1. 젠더 갈등 

그 와중에 여성이  남성의 노동시장 지위를 빼앗았다는 논리가 젠더갈등의 기폭제역할을 한다. 하지만 책에 따르면 "가장 좋은 일자리에 있어서는 예나 지금이나 남성들이 훨씬 더 많은 몫을 가져간다"고 말한다. 즉 여성들이 약진을 보이는 부분은 "번듯한 일자리와 아닌 일자리의 경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차 노동시장(소위 말하는 번듯한 일자리가 포진한 노동시장)의 주변부 및 탈숙련화된 대기업 일자리에서 남성의 몫이 줄어들게 되자...(중략)... 여성이 강력한 경쟁자처럼 비춰질 수 있을 것이다."


2. 대학의 의미

과연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우리를 '고숙련 노동자'로 만들기 위한 교육인가? (대학의 설립 목적에조차 부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3. 지방대 출신 (또는 지방 거주) 청년들과 고졸 청년들의 투명화 

서울에 사는 것이 스펙으로 간주될 만큼, 지방에는 좋은 일자리는 그를 위한 청년 세대의 준비의 장이 부족하다. 그리고 고졸 청년들이 경력을 쌓아 좋은 일자리로 이직하는 그림은 환상에 불과하다. 즉 "직업 사다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근로 빈곤층(일은 하지만 소득이 워낙 낮아 가난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의 주 공급원이 된다. 

우리 사회가 "일단 대학부터 가고 보자"라는 인식에 잡힌 것은, 대학에 가지 않는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빈곤해지기를 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졸자들이 이 명제로 굳어버린 고졸-빈곤의 논리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과연 대학을 포기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첫 번째 관문인 '대입'부터 살펴보자. 

 중산층은 자신의 자녀에게도 중산층이라는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이르면 유치원 때부터 대입을 준비시킨다. '명문중-명문고-명문대-전문직 또는 괜찮은 일자리' 루트를 성실하게 밟게 한다면, 부모의 계층 세습 플랜은 완벽한 성공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부모의 계층에 자녀의 계층이 매우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물론 중산층의 자녀들도 지난한 노력 끝에 사회적 성공을 일구어냈다고 반박할 수 있다. 문제는 '노력'도 부모의 계층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책은 "환경이 좋을수록 자녀가 일정 시간 이상 혼자 공부할 확률이 더 높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한다. 노력 뿐만 아니라, 부모로부터 영향 받는 문화적, 사회적 자본 등 경제적 지원 이외의 계량화할 수 없는 세습의 요소들이 존재한다. 이쯤되면 나는 나의 학벌이 부모님으로부터 제공된 특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일종의 자기비판이다.)


-'명문대 진학'과 '단란한 가정'은 단품이 아니라 세트메뉴였다


 이 계층의 세습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부모에게로부터 물려받는 세습의 내용에는 '정상 가족'이라는 특권 또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혼과 주거(부동산)는 청년세대의 고질적 문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하위 계층의 남성은 미혼을 강제당한다. 즉 남성의 소득이 결혼 선택의 여부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반면, 여성에게 경제력은 결혼 선택의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이 여성도 중산층 이상 계층의 여성과, 하위 계층의 여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계층적 하강혼을 거부하고 '완벽한 결혼'을 추구하는 데에 반해, 후자는 오히려 부모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결혼을 선택한다. 이 사실이 나에게 조금 크게 와닿았던 이유는, 평소에 가치관이나 판단에 있어  부모님에게 매우 의존적이라는 나 자신에 대한 판단과,  완벽하지 않은 배우자를 만날 바에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나의 결혼관이 전형적인 중산층 이상 계층 여성의 생각과 일치했다는 점이다. 즉 내가 느끼는 안정감 (조금 부정적으로 말하면 부모님에 의존함으로써 얻는 안정감)조차, 부모님의 경제적 배경 덕분에 누리는 감정임을 깨달았다. 

 

 이 책에서는 부동산 문제를 세대와 계층이 교차하는 이슈라고 설명한다. 부동산의 현재 매매가격에는 미래의 사용가치가 포함된다.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는 상황에서는, 미래의 사용가치가 하락하는 곳의 부동산 가격과 

미래의 사용가치가 상승하거나 줄지 않는 곳의 부동산 가격은 큰 격차를 유발한다. (미래가치를 현재가치로 바꿀 때 사용하는 이자율이 경제성장률 하락폭만큼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미 서울에 부동산이 있는 부모의 자녀는 고스란히 가격 상승의 수혜를 받는다. 세습받을 부동산 따위 없는 청년들이 악착같이 돈을 모아 서울에 있는 집을 사려면, 서울의 집을 물려받은 중산층 자녀들에게 점점 높은 가격을 지불하며 집을 사야 한다. 그리고 매우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임금을 좌우하는 경제성장률보다, 자산 가격 상승률이 더 높기 때문에 후자의 청년들이 돈을 벌어 전자의 청년들과 격차를 메울 수 없다. (이 부분은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서 제시하는 이론과 같다. 즉 '부동산 자산의 수익률'이 지속적으로 '경제 성장률'을 초과했을 때 불평등 확대 가능성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서울 거주- 2주택 보유 중산층"은 현대에 새로 등장하는 신분이 되었다. "21세기 한국은 중세 유럽 도시에서 도시의 성 안에 거주하는 사람이 '부르주아지'라고 불리던 것처럼 서울 안 자가 보유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게 됐다."


-아빠 때랑 우리 때랑은 정말 다르다니까


그렇다면 이 세습 중산층의 기원은 어디인가. 바로 우리나라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절 노동시장에 진입했던 586 세대 (50대, 80학번, 60년대생)부터다. 당시부터 공교육-대학입학의 모든 과정은 개인의 자유의지라기보다는 인재의 육성과 기업의 충원을 위한 국가의 과제로 간주되었다. 수출대기업이 급격하게 성장함으로써 도시 화이트칼라(사무직)과 전문직 급여생활자들의 소득이 증가했고, 이것이 2000년대 중반의 불평등 확대의 원인이 되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화는 80년대 학번-60년대 생의 시기에 이르러 학력과 전문지식, 직업, 경제적 지위가 맞물린 테크노크라트에 가까운 집단을 대규모로 창출했다" 특히 IT와 금융 산업에서 구성된 1세대 엘리트층은, 부동산을 기준으로 자산에 격차가 생기기 직전에 토지를 점유하여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계급의식에 기반한 20대 정치 성향


세습의 대상이 되는 현 20대는 계층과 성별 이라는 두 가지 기준에서 분열된다. 부모세대로부터의 경제적 세습은, 자녀 세대가 정치 집단을 형성하는 과정에도 관여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책에서 재미있는 사실들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1. 20대 여성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층일수록, 20대 남성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하층일수록 사회 구조에 불만을 표시하고 진보적 성향을 띈다. 


2. 20대 남녀의 정치적 양극화는, 결국 중산층 집단의 '그들만의 리그'이다. 즉 20대 여성의 진보화와 20대 남성의 보수화 담론은 상당 부분 중상위층의 자녀들에 국한된 이야기이다. '20대 보수화 담론'에서 배제되는 계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중산층 출신의 20대가 말하는 공정성 담론과, 하위 계층 출신의 20대가 말하는 공정성 담론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기회의 공정성에 대한 동등한 보장을 통해 "번듯한 일자리"를 쟁취하기 위한 담론이며, 후자는 개인의 노력을 무력화하는 사회 구조적 불평등에 대해 공정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청년은 "논문 제 1저자나 인턴 같은 건남의 세상 얘기 같다"고 말한다. 1%의 계층 세습의 수혜자에 대해, 20%의 중산층 출신 청년이 외치는 불공정과 나머지 계층 청년이 외치는 불공정의 분노에는 온도 차이가 존재한다. 


3. 20대 남성은 보수화된 것이 아니라 비당파화된 것이다. 이들은 "반기성 정당파", "적극적 비당파"라고 불리며 진보와 보수의 이념구도에 염증을 느끼고 반감을 가진 집단에 해당한다. 저자는 청년들이 '지지정당 없음'을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당들이 상위 10퍼센트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하는 정당들에 대해 정치적 일체감을 가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세대가 교체되면서 지금처럼 민주당이 30대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지형은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를 명확히 정의해야 해결책이 보인다


 임금피크제 따위로 단순히 60년대생이 90년대생에게 일자리를 양보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 능력의 문제로 포장하여, 중산층 60년대가 자신의 자녀인 90년대생에게 고스란히 일자리를 물려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능력'이 부모에 의해 세습되고, 중산층의 자녀만이 '인재'로 길러져 합당하다고 보여지는 절차를 통해 사회적 지위를 얻는 양상 자체가 문제의 본질이다. (이것이 과거의 세습과 지금 20대가 겪는 세습이 다른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나름의 해결책은, 공허한 공정성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세습 중산층이 경제적, 사회적 의무를 부담하는 것이다(그 의무는 과세로 표현된다). 그 방법으로 유아기 시절 부터의 공교육 도입 등, 근본적 수준의 "기회의 평등"을 강화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에서 보장해야 하는 최소 수준에 대한 합의와 세원의 확보도 제시한다. 즉 패자부활전과 품위 유지를 위한 부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청년세대가 노력과 능력에 집착하느라 외면한 지점이 있다. 

가난을 개인의 능력 부족이라고 치부해 그들을 가장 낮은 사회적 지위로 끌어내리면서, 

정작 그들에게 가난을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는 폭력적인 사회 구조. 


중산층에 속하는 20%가 느끼는 불편한 안도감. 

하지만 언제든 끌어내려질지 몰라 아등바등대는 불안감. 


우리를 물고기떼처럼 몰아가려는 '성공한' 어른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다가는, 

계층 세습은 커녕 모두가 자본주의 파멸의 그물에 갇혀버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공포심이 든다. 


드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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