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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Apr 08. 2021

책 리뷰_<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정체성 정치를 넘어

노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당과 노동당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여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당과 여성당도 다르다. 우리는 소수 정당이 되지 않으면서도 소수자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당일 수 있으며 그런 정당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선 시민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학교에서 듣는 <현대사회와 정체성> 수업에서 다루는 논점과 반대되는 논점을 지닌 책이고, 교수님이 <파리테:성적 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라는 책과 함께 읽어보길 권하신 책이어서다. 수업에서는, '국민'이라는 획일화된 보편적 가치가 어떻게 개별 정체성과 인권의 보장에 위협이 될 수 있는지를 개별적 사안부터 헌법까지 다루며 탐색하는 과정에 있다. "국민"이라는 안온하고 보호적인 가치가 어떻게 인권을 훼손한다는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수업을 따라갔다. 수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집합론적 뒤틀림은, 먼저 국민이 되어야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모순이다. 


 수업의 주된 내용이 된 <파리테>라는 책은, 프랑스의 남녀동수법을 가능케 한 사상을 다룬 책이다. 남녀동수법은 남성과 여성은 "국민"이라는 하나의 보편적 개념으로 뭉뜽그릴 수 없는, 애초에 각기 다른 존재이며, 이 다름을 인정한다면 공직 후보자의 비율도 딱 50:50으로 맞추어 양성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평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오늘 다루려는 이 책은, 파리테 사상에서 비롯된 diversity rhetoric 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책이다. 즉 국민을 균질적이고 연대할 수 있는 일반적 의지의 주체로 보아야 하며, 정체성 정치는 이 국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만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두 반대되는 의견의 충돌로부터 함의를 이끌어내자는 교수님의 의도가 흥미로워서 읽었던 책이고, 대중서답게 쉽고 짧다.  


이 책은 반정치, 사이비정치, 정치 의 세 목차로 구성되어있다.

반정치는 레이건 정부 시절, 시민들이 개인주의와 자기번영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시되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사이비정치는,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기 위한 마크릴라의 언어이다. 정치인 것 같지만, 사실상 개개인의 정체성을 표명하는데에 과도하게 함몰되어 있어 제대로 된 논의가 부족했던 정치상황을 지칭한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생각하는 정치는,(저자는 진보주의자다) 연대와 토론의 정치이며, 보수의 색을 입은 반정치도, 정체성 정치도 이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책이 쓰인 계기는, 트럼프의 당선 이후, 진보주의자들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이다. 진보의 패인에 대한 분석 결과인 것이다. 


 유권자가 된 지 4년이 된, 태어나서 투표를 딱 한번 해본, 정치외교학과여서 의무적으로 국내 정치를 공부하지만 국내 정치 현실에 큰 관심은 없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진보 정치'의 이미지는 은연중에 동세대들의 자기표현 욕구와 합쳐져 정체성 정치의 이미지로 변질되고 있었다. 저자는 왜 진보주의자들이 대중의 감정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는지, 왜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 이 시대와 맞물리는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을 무시하거나 진보의 비전을 이미지화하여 내놓지 않는지 비판하고, 나도 이 점에서는 매우 동의한다. 요즘 공부하고 있는 대중의 투표 행동에 따르면, 대중이 후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어떻게 '느끼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책은 바이든 대통령 당선 이전에 쓰였지만, 바이든이 정체성 정치를 어떻게 다룰지, 미국 유권자의 꽤 많은 비율을 (아직도) 차지하고 있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감정을 어떻게 잠재울지는 아직 미지수다. 저자는 비전의 부재는 마치 미국 진보주의자들이 '기권'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저자가 20세기 미국 정치사를 1) 루스벨트 통치체제 (연대, 기회, 공적 의무)와 2) 레이건 통치체제 (자기 신뢰, 최소 정부)의 두 가지 통치체제로 나누어 본 것이 인상 깊었다. 미국은 건국 당시에 정체성에 대한 주된 논의는 유입된 이민자들이 자신을 미국과 동일시하는지에 대한 개념이었고, 시민권 운동 당시에도 미국의 원칙에 부합하도록 평등한 시민권의 개념을 목표로 했으나 그 이후 시민의 지위 대신 개인의 정체성이 주된 논점으로 등장한 것이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 하의 미국의 낭만주의로부터, 개인들은 자기 정의와 자기 이해를 반영하는 정치운동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다른 누군가가 당하는 억압에 눈감는, 오로지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을 위한 정치라며 비판을 가한다.  


루스벨트 통치 체제 당시의 진보주의자의 이미지는 '악수하는 2개의 손'이었다가, 우파의 부상과 진보주의의 정체성 정치로의 변질을 거치자 그 이미지는 '프리즘의 무지개'로 바뀌었다는 말은, 진보의 비전이 연대에서 다양성으로 상반되게 바뀌었다는 점을 잘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파 정권 하에서도 정체성 정치는 이루어졌다. (개인주의와 정체성 정치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저자는 "정체성은 좌파를 위한 레이건 주의"라고 말한 바 있다) 정체성 정치는 레이건 정권 하에서는 대규모 민중 계층을 중심으로 권리 보장과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바로잡음의 양상으로 이루어졌다면, 1980년대 즈음에는 점차 배타적이고 협소한 의미의 정체성 정치로 변질된 것이다.  그렇게 각 정체성 집단은 모아지기보다는 오히려 흐트러졌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적 입장이  특정 집단을 보살핀다면 오히려 그 집단을 취약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모순이 있다. 

진보적 정체성 의식의 전진은 진보적 정치의식의 후퇴를 의미한다. 

저자는 소수자 집단을 돕는 길은 오로지 선거에서의 승리와 이를 위해 그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관통적 메시지, 그리고 연대라고 말한다. 일단 권력을 차지하고 장악해야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일단 진보정치가 미국에서 주도권을 쥔 뒤, "시민의 지위"를 바탕으로 한 "공통된 미래"에 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진보는 "시민적 진보"인 것이다. 이 시민의 지위는 "정체성에 대한 애착을 초월한 연대"를 가능케 하는, 각기 다른 사람들 간의 유일한 공유 지점이 될 것이다. 결국 개인을 원자화하는 교육이 아니라, 자신에게 함몰되지 않는 바깥세상에 대한 관심, 타인에 대한 연대감을 양육하는 시민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오직 시민이 있을 때만, 우리는 그들이 진보적 시민으로 되는 것을 바랄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운동정치보다 제도정치를, 자기표현보다 민주적 설득을, 개인의 정체성보다 시민의 지위를, 그리고 시민 교육을 진보의 재건을 위한 핵심 과제로 제시한다. 


"운동의 목표에 공감하지만 기꺼이 느리고 끈기 있게 선거운동을 벌이고 법안을 만들고 협상을 통해 법안을 통과시키고 관료들을 감독하면서 법이 진행되는지 감시하는 시스템 정치가들과 공직자들"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그는 제도화되고 의도적으로 느린, 온건한 성격의 진보주의를 주창한다. 사법의 정치화나 엘리트와 민중의 분리 대신 "평범한" 민주 정치에서의 설득 과정(민주주의에서는 다른 의견의 존재가 항상 전제되니까)과 민중과의 동일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거는 teaching moment 가 아니니, 이만 설교단에서 내려와라!) 진보주의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견해 간의 우열이 나뉘는 순간, 진보주의는 많은 지지자를 잃게 되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대한 나의 생각>


  1) 선 권력 후 도움의 안일함 

마크 릴라는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한 진보주의자들의 결집을 우선적 과업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중도 진보 정권이 권력을 잡는 순간, 집단적 정체성은 과소 대표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선 권력 후 도움'은 모두에게 선한 결과를 위해 잠시 정체성을 흐려두고, 이후에 시혜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허무맹랑한 약속으로 들릴 수 있다. 


2) 중첩적 합의의 존재 가능성

롤스는 다원주의 하에서 모두의 선관이 합의되는 정의관의 도출 지점을 '중첩적 합의'로 지칭한다. 저자는 정체성 정치 하에서의 이 선관의 중첩을 완전히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페이스북 모형"을 통해 "모든 정체성은 유동적이고 여러 차원을 지녔고, 그 차원들 각각이 인정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각 집단들 사이의 공통적으로 공유될 수 있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가장 크리티컬 한 비판은, 정체성 정치 하에서는 "금기가 논쟁을 대체"한다는 점이다. 과연 다양성을 의도적으로 획일화하는 것이 당위적으로도, 기능적으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3) '시민', '국민'이라는 개념이 가진 무매력성과 배제성 

정체성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시민 이외의 것으로 분화시키는 것을 금하고, 오로지 균일한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라는 말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정치의 장에서 시민이 얻을 것이 무엇일까.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려는 유인은 그렇게 크지 않다. 정치에 관심을 끊고 살아가던 일반인의 그나마의 참여 통로인 투표만 해도, 별다른 요인이 아닌 '시민으로서의 도덕적 책무'가 유권자를 투표장에 끌어다 놓는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도래한 일상생활에서 시민으로서의 도덕적 책무를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심지어 대한민국에서 시민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이 원활히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시민으로서의 공적 의무보다는, 지지하는 당에 대한 애착을 비롯한 자신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투표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국민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배제적인가. 미국 사회에서는 국민이 되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정치화되고 있으며, 시민이 되기를 강요하기에는 사람들은 이미 너무나 탈시민적이라고 생각한다. 

책에서는 공동체 의식의 퇴조와 정치적 파편화, 다수파를 형성하여 선거에서 승리를 하려는 진보가 아닌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으로써의 진보 등을 문제로 삼으며 시민이 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의무를 지녀야만 좀 더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제도정치, 정당 등의 정치 없이는 사회적 평등을 실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라면, 민주주의는 더 이상 자유주의와 함께지속 가능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방점을 어디에 두는지의 문제에서 자유주의에 치우친 것이 정체성 정치의 형상이라고 생각한다. 우선적으로 모든 소수 집단들이 동등한 존중감을 느끼고 합의를 위한 준비가 되었을 때, 드디어 공적 장이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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