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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린이맘 May 11. 2022

계란볶음밥과 보리차

평범함 속 특별한 밥상

보리차의 구수한 향이 집안을 가득 채운다.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아이에게 물을 먹이고 있는데 맛이 없는지 잘 먹지 않는다. 그래서 보리차를 주려 끓이고 있는 것이다. 아이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보리차를 마신다. 어릴 적 우리집은 항상 보리차만 마셨다. 아빠가 맹물을 좋아하지 않은 탓에 엄마는 항상 보리차를 끓여야 했다. 큰 주전자에 팔팔 끓인 다음 식혀서 물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는 일이 엄마에게는 일상이었다. 무더운 여름에도 엄마는 땀을 뻘뻘 흘리며 보리차를 끓였다. 날씨가 더워지면 물을 많이 마시니 매일 보리차를 끓여야 했다. 고생하는 엄마를 보면서도 말리지 못한 것은 보리차가 맛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친정집에 가면 냉장고에서 보리차부터 꺼내 마신다. 결혼을 하면서 보리차를 마시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생수의 비릿함에 한동안 고생했다. 보리음료가 있기는 하지만 끓여서 마시는 보리차와는 확실히 다르다. 보리차를 끓이는 귀찮음을 알기에 결국 생수에 나를 적응시켰다. 보리차 냄새를 맡으니 엄마가 보고 싶어 전화를 건다.


“엄마! 나야. 나 보리차 끓였어. 런린이 주려고 끓인 건데 나도 마셨어. 오랜만에 마시니까 너무 맛있다.”

“응 그래. 근데 점심은 먹었어? 잘 챙겨먹어. 대충 떼우지 말고. 다음에 뭐 해갈까? 먹고 싶은 거 있어?”

“나 감자볶음이랑 소고기뭇국 해먹었어. 걱정하지마. 다음에 오면 제육볶음 해줘. 매콤한 고기가 먹고 싶네.”

“응 알았어. 아이 잘 보고. 남편도 잘 챙겨주고.”

“응 끊을게.”


사실 오늘도 나의 점심은 계란볶음밥이다. 아이를 키우다보니 나 혼자 먹자고 요리를 하는 일이 귀찮다. 그렇다고 라면을 먹자니, 냉동식품을 데워먹자니 건강에 안 좋을 것 같아 쉽게 내키지 않는다. 계란은 항상 집에 있으니 건강에도 좋고 간단하게 만들 수 있으니 계란볶음밥이 제격이다. 요리를 하는 시간을 줄여 차라리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는 것이 더 좋다. 그래서 계란볶음밥을 자주 먹는다. 간장, 소금, 굴소스, 케첩, 카레가루를 넣어 다양하게 즐길 수 있어 자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따로 반찬도 필요 없으니 나에게 충분한 한 그릇 요리가 된다.


생각해보니 어릴 때부터 계란볶음밥을 자주 먹었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셔서 나와 남동생은 할머니 손에 자랐다. 저녁밥은 항상 할머니네 집에서 먹었는데 자주 해주신 요리가 계란볶음밥이었다. 할머니가 즐겨 드시던 고사리, 무조림, 시래기 같은 음식은 어린 우리가 먹기에는 영 입맛에 맞지 않았다. 할머니 집에서 밥을 제대로 못 먹고 집으로 오니 엄마는 할머니에게 계란볶음밥을 해주면 된다고 했다. 할머니 입장에서도 계란만 있으면 되고 더 이상 손주들의 반찬투정을 듣지 않아도 되니 이만하면 최고의 절충안이다. 할머니는 계란볶음밥에 항상 케첩을 넣어 주셨다. 아마 어린 아이들은 케첩을 좋아하니 계란볶음밥에도 케첩을 넣으면 될 거라고 생각하셨나보다. 고슬고슬한 밥에 노란 계란, 빨간 케첩까지.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질릴 법도 하지만 신기하게 매일 먹어도 맛있었다. 계란볶음밥은 나에게 밥상에 매일 차려지는 흰 쌀밥과도 같은 것이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는 일을 그만두셨다. 나와 남동생은 더 이상 할머니 집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엄마가 있는 집으로 가는 기쁨에 설렜다. 할머니가 엄마의 손이 되어주셨지만 알게 모르게 엄마 품이 그리웠나보다. 엄마는 그동안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을 맛있는 저녁밥으로 달래주셨다. 달큰한 간장불고기, 뽀드득 뽀드득 소시지볶음, 얇게 채 썰어 튀긴 고구마스틱. 매일 다양한 반찬이 올라왔다. 그렇게 밥상에서 계란볶음밥은 점점 사라져갔다. 


그런데 지금은 일주일에 족히 네 번은 계란볶음밥을 먹는다. 다시 밥상에 올라온 계란볶음밥은 그때만큼이나 여전히 맛있다. 아이가 언제 깰지 모르는 항상 대기상태에 있는 나에게, 기어 다니기를 시작하며 언제 어떻게 사고를 칠지 몰라 돌발 사태를 대비하는 나에게, 너무 피곤해 요리할 기력마저 없는 비상사태에 처한 나에게 계란볶음밥은 언제나 최고의 요리가 된다. 오늘은 보리차와 함께 계란볶음밥을 먹는다. 나는 아이에게 어떤 음식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보리차의 향만 맡아도 내가 가족을 떠올리는 것처럼, 계란볶음밥을 보고 과거의 나를 추억하는 것처럼…. 허기를 채운다고만 생각했던 늘 같은 밥상이 보리차 덕분인지 오늘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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