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에 낭만하나쯤
지루한 장마가 시작되었다. 부쩍 후덥지근해진 날씨와 무거워진 공기는 곧 장마의 시작을 알린다. 이렇듯 장마는 늘 조용히 오는 법이 없다. 방바닥에 자꾸만 끈적끈적 발이 달라붙고 코와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창문 너머로 강한 바람에 맥없이 처지는 나무는 여지없이 장마가 오기 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장마가 싫은 건 비를 싫어하기 때문이고 비를 싫어하는 건 바깥생활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후드득, 조르륵, 톡톡, 뚝뚝, 토도독토도독, 우드득, 투득투득 각양각색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소리는 신나는 리듬이 되어 귀를 간지럽히지만 어쩐지 빗방울이 몸에 떨어지는 감촉은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비에 젖은 몸은 기분 나쁜 꿉꿉함을 가져온다. 휴지나 마른 수건으로 비를 닦고 젖은 양말을 벗어 창틀에 말리고 옷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도 즐겁지 않다. 축축해진 머리와 방울방울 얼굴에 맺혀있는 빗방울을 털어내는 것도 마찬가지. 내리는 비에 몸을 맡기며 시들해진 기운을 불러일으키고 푸르게 되살아나는 대지와는 정반대로 몸은 더없이 무거워지고 기분은 한없이 추락하고 만다.
여행을 다닐 때나 날씨에 그중에서도 특히 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이를 키울 때 더 날씨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것도 시간 단위로 자꾸만 날씨를 확인한다. 차라리 장마철이라고 하면 일찌감치 날씨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되지만 애매하게 비가 올 듯 말 듯 한 기운이라도 있으면 언제 비가 오는지, 대체 언제 그치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요즘에는 시간 단위로 날씨를 알 수 있어 바깥활동을 계획할 때 도움이 된다. 물론 하늘의 일이라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를 백퍼센트 맞추기 어렵지만 아이와의 하루 일정을 짤 때 날씨예보에 기대게 된다.
비가 오면 꼼짝없이 아이와 집에만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유모차에 레인커버를 씌우거나 아기띠를 하고 우산을 쓰고 나가도 되지만 나가는 불편함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집에 있는 편이 낫기에 나가려는 마음을 접게 된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아이까지 데리고 나가면 고생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온종일 아이와 부대끼며 지내다보면 절로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나가 비를 맞으며 빗소리의 발랄함과 첨벙대는 발소리의 즐거움을 느낄 수도 없으니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수밖에…. 아이와 보내는 시간에 종종 바깥활동의 힘을 빌리곤 했는데 장마라도 시작되면 ‘오늘은 아이와 무얼 하고 놀지?’라는 고민은 더 커진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밖에 나가는 일이 불편해 비가 싫었는데 엄마가 되고 나니 밖에 나갈 수 없어 비가 싫어진다. 비가 싫은 건 여전히 같지만 이유는 확연히 달라졌다.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아이의 시선이 자꾸만 베란다로 향한다. 태어나서 이렇게나 많은 비가 내리는 것을 처음 보는 것일 테니 신기할 수밖에. 집에만 있어 답답한 나의 마음과는 달리 빗줄기는 시원하게 내리다 못해 베란다까지 들이치고 있었다. 바닥으로 튄 빗방울이 모여 만든 작은 웅덩이에 혹시 미끄러질까 두려운 마음과 닦을 생각에 짐짓 기분이 상해 다시 거실로 들어온다. 세 시간을 내리 아이와 놀고 재워주다 깜빡 잠이 들었지만 천둥 번개 소리가 알람이 되어 몸을 일으키고 거실로 나온다. 마른 걸레를 들고 베란다로 나가 여전히 내리는 빗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아 베란다 바닥에 빗물을 닦는다.
“꺄아아” 노란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은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 몇몇이 비오는 게 신이 났는지 소리를 지른다. 떨어지는 비를 맞고 빗물에 발을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고 펴지도 않은 우산을 친구에게 휘두르며 장난을 친다. 그림책에서나 볼법한 비오는 날의 풍경이 베란다 밖에서 펼쳐지고 있다. 해맑게 비를 즐기는 아이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어쩌면 어린 시절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게 비를 즐길 수 있는 시기가 아닐까. 아이들은 자라면서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리니까, 옷과 가방, 신발이 젖으니까, 부모님에게 혼나니까,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니까. 여러 이유로 비를 맞지 않게 될지 모른다. 아이들이 온몸으로 맞는 비는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비 오는 날에 낭만 하나쯤은 누구나 있을 테다. 누군가는 지글지글 바삭한 부침개를 먹는. 걸쭉한 막걸리를 마시는. 일 년 중 몇 안 되는 장화를 신는. 버스나 지하철에 우산을 두고 내려 두고두고 아쉬워하는 경험이 있는. 차창으로 흐르는 비를 구경하는. 흐르는 빗물에 슬쩍 눈물을 감추는. 자기만의 낭만과 방식으로. 오늘의 비는 아이를 안고 베란다에서 처음으로 구경했던 특별한 비로 기억되겠지. 아이를 안고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이게 비라는 거야. 하늘에서 주르륵 물이 떨어지네. 아이 차가워!"라고 속삭일 수 있는 날이 몇이나 될까. 시간이 흐르면 오늘의 비가 그리워질 수도. 어쩐지 야속하기만 했던 비가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장마는 여전히 지루하고 답답하지만 오늘은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고 싶다. 나는 앞으로 아이와 비오는 날에 어떤 추억을 쌓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