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의 등장인물이 되다니 영광인데.. 몇 편 읽다가 회사에서 못 보겠어~ 감동적인 장면이 많아서.. 눈시울이 붉어져서.. 넘 멋지다 서소시 ~
M 언니였다.
문자를 보다 눈물이 났다. 너무 고마워서..
이름만 떠올려도 눈물이 나는 사람..
살면서 외로울 때, 힘들 때, 좋은 소식 나누고 싶을 때, 무엇보다 새로운 곳으로 갑자기 떠나야 했을 때.. 삶의 크고 작은 순간들을 들어주고 응원해주며 가족 같은 정을 나눠준 고맙고 또 고마운 언니.. 그렇게 우리 아이들의 많은 순간을 함께 해준 언니라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더니읽다 눈물이 났다 하셨다. 글 속에 자주 등장하는 제주 언니, 제주 지인이 나 맞냐고 물어온 언니에게 당연하죠 했더니 그 부분을 캡처해서 주변분들께 자랑해야겠다 하셨다. 감사하게도.. 또다시 눈물이 났다.
M 언닌 내게 "제주"인 분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정해진 남편의 제주 발령..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제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서웠던 그때 언니를 만나지 못했다면.. 언니 덕분에 진짜 '제주'를 알아갈 수 있었고 외롭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런 언니에게 돌아보면 미안할 정도로 폐만 잔뜩 끼쳤다.
십수 년 전 그때.. 제주에서 집을 구하려고 부동산을 찾아갔던 남편은 땅 거래만 한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신구간이 끝난 뒤라 괜찮은 집이 별로 없다며 고를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신구간이 뭔지 몰랐기에 대체 무슨 소린가.. 왜 부동산에서 집 거래를 안 한다는 건가 당황스럽기만 했다.
'우리나라 맞아?' 싶었다.
그렇게 구한 집은 제주시에서 먼 외곽에 있었다. 회사까진 해안도로를 따라 삼십 분 정도 운전해야 했지만 남편은 행복해했다. 날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고.. 꽉 막힌 도심의 빌딩숲 출근길에 비하면 얼마나 좋으냐고.. 그런데 삼십 분 운전하는 거리란 이야기에 제주분들은 다들 너무 심하다 하셨다. 그렇게 먼 거리에 집을 구했냐고..제주분들의 거리 개념이 우리와 다르구나 싶었던 순간이었다.
(Photo by Chadmin pictures on Unsplash. 아름다운 제주)
갓 돌 지난 첫째와 이사 간 후에도 처음엔 여기가 우리나라 맞나 싶었다. 나 홀로 아파트도 아니고 나름 세대수가 많은 아파트였는데 낮 시간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놀이터에 나가서 또래 엄마들과 친구 하자 해야지 싶었는데 낮에 놀이터에 나와 노는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동네 소아과를 가도 마친가지였다. 오후 다섯 시 이후 어두워져야 드문드문 아이들이 놀이터에 나와 놀았다. 분명 밤이 되면 집집마다 불은 다 켜지는데.. 낮엔 사람이 잘 없으니 밤에만 가득 채워지는 유령도시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게 많은 제주분들이 대부분 맞벌이라 아이들도 일찍 어린이집에 가기에 낮에 사람이 별로 없었던 거였다.
너무 외로웠다. 아이도 나도.. 그래서 당시 제주시에 딱 하나 있던 문화센터를 찾아갔다. 아이 연령에 맞는 수업에 가면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 같아서..
택시를 타고 문화센터로 가는 동안 기사님은 푸근한 제주 사투리로 언성을 높여가며 많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여기 정말 우리나라 맞죠 묻고 싶을 만큼 대부분 못 알아 들었지만 대충 이런 말씀이었다. 젊은 사람이 사지 멀쩡한데 왜 낮에 아이 데리고 택시 타고 다니며 시간 낭비, 돈 낭비하고 다니냐는.. 안타까워하시며 젊을 때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위해주는 말씀이었지만 혼난 기분이었다. 나처럼 육지에서 남편 따라오신 어떤 분은 너무 외로워서 아이 업고 매일 집 앞에 나와 바다를 바라봤는데 해녀 한 분이 아이 맡기고 오라고..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물질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단다. 그분도 나도 생활력 강한 제주의 맞벌이 분위기를 잘 모를 때라 괜히 혼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문화센터 수업에서 또래 아이들과 엄마들을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수업 끝나고 인사해 봐야지 싶었는데 어쩐 일인지 수업 끝나고 나가면 아무도 안 보였다. 친구 사귀러 멀리까지 오는데 다들 어디로 사라지나 싶었다. 이 미스터리도 나중에 알고 보니 차로 운전해 오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 바로 주차장으로 간 거였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하루는 용기를 냈다. 친절한 미소를 보내주시던 분에게 정말 나쁜 사람 아니니 밥 한번 같이 먹자고 했다. 그때 같이 밥을 먹어준 언니가 M 언니다. 나중에 다시 육지로 가게 됐을 때 밥 한번 먹자 외치던 내 첫인상이 사기당하기 딱 좋을 캐릭터였다며 어디 가서 그러지 말라고 했다. 너무 불쌍해 보였다고.. 그때 그만큼 외롭고 절박했었다.
그렇게 함께 밥을 먹으면서 시작된 인연..
또래의 아이들 함께 키우며 외롭던 내 제주 생활에 언닌 따뜻한 빛이었다. 나의 민폐의 역사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많이 바쁘고 회식이 잦아 퇴근이 늦었던 남편은 저녁을 먹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일찍 달려가 저녁 준비해야 하지 않으니 여유 부리며 언니네 집에서 놀다가 일찍 퇴근하시는 형부를 종종 만났다. 언니네 형부는 솜씨가 좋으셔서 뚝딱 맛있는 저녁을 만드셨고 같이 먹고 가라고 자주 권하셨는데 눈치 없이 끼어 앉아 참 많이 얻어먹었다. 입이 짧아 잘 안 먹던 아이도 언니 집에선 그렇게나 맛있게 잘 먹었었다. 민망하게도.. 요리 실력이 형편없던 난 언니에게 맛있는 식사 한번 그럴듯하게 차려 준 적이 없었다. 매번 얻어먹기만 하고..
얻어먹은 건 그뿐이 아니었다. 언니네 부모님이 가족을 위해 약 안치고 키우시던 귤도 컨테이너채 얻어먹었다. 육지에서 온 우리 집에 귤 컨테이너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던 분도 있었다. 제주에 친적 있냐고.. 그 귀한 귤을 해마다 얻어먹었는데.. 한두 번도 아니고 언니 덕에 다섯 해 꼬박 그렇게 귤 부자일 수 있었다.
(Photo by Hoyoung Choi on Unsplash. 추억의 노란 귤 컨테이너)
철이 없었나 보다.. M 언니가 둘째를 낳고 얼마 안 되었던 그 맘때 내 민폐는 최고치였다. 언닌 열심히 일도 하면서 둘째를 돌보던 때라 어쩔 수 없이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냈었다. 손 많이 가는 젖먹이 둘째에 일도 바쁜 시기였는데.. 그 힘든 시기에 날 위해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다.
대학시절 첫 방학에 운전면허를 따려고 도전했던 난, 마지막 주행시험을 남겨두고 큰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신호등을 건너는데 달려온 자동차에 치여서 하늘 높이 날아올랐었고 사고 대비 크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방학 내내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집고 다녀야 했다. 안타깝게도 몇 년 후 버스를 타고 가다 또 한 번 더 사고를 당해서 입원까지 했었기에 차에 대한 극심한 공포가 생겼었다. 앞자리 보조석에 앉기도 어려웠고 시속 100km만 달려도 손잡이 부여잡고 혼자 롤러코스터 탄 듯 비명을 질러댔다. 그렇게 차 앞자리에 타는 것도 무서운 상황이었기에 운전은 꿈도 못 꿨다.
그런데 제주에 살다 보니.. 그것도 외곽지역에 살다 보니 운전을 못하면 불편한 게 너무 많았다. 버스가 가고 싶은 지역을 다 가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안고 짐도 많으니 주로 택시를 탔는데 택시비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내 상황을 안타까워해 주던 M 언니가 아이를 봐줄 테니 운전면허를 따라고 권해줬다.제주에선 차가 필수라고.. 이제 막 둘째를 낳고 큰 아이는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손 많이 가는 우리 아이까지 봐주겠다니..
지금 돌이켜보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싶은데.. 철없던 당시의 난, 낯을 많이 가리고 예민해서 어린이집은 꿈도 못 꾸는 아이인데 가족처럼 스스럼없이 잘 따르는 언니가 봐준다면 걱정 없을 거 같아 덜컹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을 했다. 어쩜 그리 철없고 염치도 없었는지..
그렇게 아침마다 아이를 데려다 언니네 집에 맡기고 운전 연습을 하러 다녔다. 엄마가 안 보이면 울고불고하던 아이가 언니 집에선 얌전했다. 오가는 시간까지 합쳐서 제법 많은 시간을 소요했는데.. 언니 아인 어린이집에 보내고 둘째 챙기랴.. 일하랴.. 손 많이 가는 우리 아이 챙기랴.. 언니가 그 시간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되돌아보면 너무 미안해서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인데.. 십수 년 전 난 그저 고맙다는 인사로 때우고 매번 아이를 맡겼었다. 언닌 오히려 아이 봐주는 걸 생각해서 열심히 해 꼭 붙으라고 응원을 해줬다. 이렇게 고마운 언니니 미안한 줄 모르고 그렇게나 염치가 없었나 보다.
언니가 도와준 덕분에 정말 핸들만 잡아도 벌벌 떨던 난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고 합격해서 당당히 제주에서 면허를 받을 수 있었다. 싱가포르까지 와서 운전을 하고 다니는 것도 다 언니 덕분이다.
흘러간 시간만큼 나이를 먹고 보니 그 시절 언니가 베풀어준 건 그냥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눈물 나게 고마운 은혜였다는 걸 세월이 갈수록 더 느낀다.
제주에서 두 번째 유산했을 때도.. 다 내 탓같아 힘들었을 때도.. 다시 임신하고 혹독한 입덧으로 고생할 때도.. 너무나 다행스럽게 무사히 출산해 둘째를 만났을 때도.. 먼 곳에서 외롭던 내게 언닌 늘 함께해줬다. 둘째를 제주에서 출산하고 잠시 머물던 조리원에서 내 설움은 폭발했었다. 매끼 나오는 미역국에 옥돔, 조개, 새우.. 매번 각종 해산물이 들어있는데 익숙한 맛이 아니라 맛있지만 아는 미역국이 먹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다들 가족, 친구, 지인들이 찾아오는데 출산 소식을 듣고 비행기 표를 끊은지라 아직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기에 참 외로웠었다. 그런 외로움을 채워준 것도 언니였다. 고생했다며 찾아와 준 언니를 보는데 너무 반갑고 고마워 눈물이 났었다. 어쩜 매순간 그렇게도 고마웠는지.. 그렇게 따뜻했었는지..
그 뒤로도 나의 민폐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다 나열하기 부끄러울 만큼..
참 많은 순간을 함께해주고 큰 도움 준 언니에게 지금도 가끔 이야기한다. 한 번에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받아서 살면서 천천히 꾸준히 갚아 나가겠다고.. 고마운 마음 늘 기억하고 있다고..
제주의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M 언니가 있어 그렇게 제주는 내게 고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