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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정말 이 수업을 추천하신다고요?

국제학교 멋진 아트 선생님..

by 서소시

'응? 이게 지금 무슨 말이지?'

학교에서 방금 온 메일을 읽고 또 읽어봐도 내가 이해한 게 맞나 싶었다.

첫째 국제학교 아트 선생님 미스 K가 보내온 메일이었는데.. 보고도 믿을 수 없어서 정말 제대로 본 건지 확인하고 싶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미스 K 선생님이 보내온 메일 봤어요?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요?"

남편도 보고 놀랐다며.. 아이가 오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이 생각을 들어보자고 했다.


아트 선생님 미스 K가 보내온 메일에는 이번에 어렵게 준비된 특별한 아트 수업에 첫째가 꼭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 같아 추진한 수업이라고 했다. 이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학교 측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의논해왔고, 학교 측에서 많은 지원을 해줘서 어렵게 준비된 수업이니 꼭 참여해 이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쓰여 있었다. 특별 수업이라 참가비가 조금 있다고도 했다.


아이에게 큰 도움이 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시겠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메일을 읽고 또 읽은 이유는 그 특별 수업이 무엇인가 하는 설명이었다.

준비된 수업은 라이프 드로잉 (Life Drawing).. 바로 '누드 크로키' 수업이었다.



첫째는 한국에선 고등학교 1학년 나이였기에.. '사춘기 아이에게 웬 누드 크로키 수업?' 싶었다.

'미대 가야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수업 아닌가?' 싶었고, 남학생들도 아트 수업 들을 텐데 싶어 신경이 쓰였다.

정말 이 수업을 추천하신다고???

어머나~ 이것도 문화 차이인가 솔직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학교 다녀온 첫째에게 이런 수업에 대해 들어봤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미스 K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따로 설명해 줬다고 했다. 아이도 좀 놀랬다고..

아이들 수업에 굉장히 열정적이고 열심인 선생님이라 늘 고맙게 생각하는 선생님인데.. 아이들에게 너무 좋은 기회라고 설명하셨단다. IGCSE(International General Certificate of Secondary Education) 시험 중 아트 과목을 선택한 학생들을 위해 준비한 수업이고, 이 수업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하셨단다.


(IGCSE는 영국제 국제학교의 중학교 과정 졸업 시험으로 중학교 3, 4학년에 해당하는 2년간 필수과목과 선택과목을 선택해서 공부하고 치는 시험이다. 첫째는 선택과목 중 하나로 아트를 선택했다. )


"어.. 설명 들어보니 어때? 듣고 싶어?"

아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조금 긴장하고 물어봤다.

"아유~ 아니요.. 전 꼭 들어야 하는 수업 아니니 그냥 안 들을 거예요."

'휴 ~~ '

왜인지.. 아이가 듣고 싶다고 하면 어쩌나 긴장했나 보다. 아무리 도움이 되는 수업일지라도 사춘기 아이가 다른 사람의 누드를 보고 그림을 그린다 싶으니.. 걱정부터 앞섰다. 이렇게 매번 여지없이 고지식한 엄마임을 들킨다.


아이도 "굳이~" 하는 반응이니..

우린 참석하기 어려울 거 같다는 답을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미스 K 선생님에게서 다시 메일이 왔다. 왜 참석하지 않는지 물어봐도 되냐고..


그래서 솔직히 아직 어리고 미술을 전공할지도 모르니 이 수업이 좀 부담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첫째가 아트 수업을 하면서 얼마나 열심이고 잘하는지.. 아이의 표현력을 키우는데 이번 누드 크로키 수업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정지해 있는 그림을 보고 그리기보다 다양하게 움직이는 사람의 인체를 짧은 시간 안에 그리면서 집중력, 관찰력, 표현력이 향상될 거라고.. 학생들이 갖기 어려운 기회를 주고 싶어 본인이 열심히 준비한 기회라며 아이를 위한 긍정적인 성장을 설명하시는데.. 이 고지식한 엄마는 '누드'란 단어에 놀라서 선생님의 큰 뜻을 몰라봤구나 싶었다.

이렇게 열심이신데.. 아이들을 위해 학교 측을 대상으로 어렵게 설득해 특별 수업을 준비해주신 선생님을 믿고 참여시켜야 할까 마음이 흔들렸다.


"다른 친구들은 한대? 애들 반응이 어때?"

내 궁금증에 아이는 재미있고 유쾌한 S 포함.. 몇 명의 친구가 이미 참가 신청을 했다며, 재미있을 거 같다고 기대들 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나라 엄마들은 나만큼 놀라는 엄마가 없나?'

참.. 겪어도 겪어도 크나큰 문화 차이..


난 언제쯤 쿨한 엄마가 될 수 있으려나..

선생님이 이 수업 들으면 도움이 된다고 적극 권하시니.. 들어도 좋을 거 같다고 말했다.

아이도 솔직히는 좀 긴장되고 걱정된다고 했다. 그런데 미스 K 선생님이 첫째에게 넌 꼭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리 적극적으로 권하시니 참가 신청을 했다.




어릴 때부터 첫째는 그림책을 좋아해서 책 읽어달라고 자꾸만 책을 가져오는 아이였다. 책 읽어주면 한글을 빨리 깨친다고 해서 더 열심히 읽어줬는데, 아이는 글자보다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글 읽어주느라 글자만 보고 있는 내가 놓친 그림 속 장면을 짚어내며 나름의 해석을 했다. 그림자 책을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주인공의 표정을 이야기해 주는 아이였다.


"아 ~ 그림을 좋아하는구나.' 싶었지만,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 기본적인 미술 공부를 배워 본 적은 없었다.

싱가포르에 갑자기 와서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모든 과목을 공부하게 됐을 때, 어쩌면 아트 과목이 마음 편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선생님과의 상담 시간에 만난 아트 선생님 미스 K는 매번 아이의 스케치북을 구석구석 보여주며 칭찬을 해줬다. 작가 리서치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그리고 그 기법을 그냥 따라 하지 않고, 얼마나 다양한 재료로 새롭게 표현해보려 도전하는지..

미술을 전혀 모르고 경험 없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국제학교 수업인지라.. 그냥 국제학교 선생님들은 칭찬도 열심히 해 주시나 보다 싶었다.


아이가 열심히 노력한 과정과 결과물은 도치 맘인 내 눈에야 너무 훌륭했지만..

미술 기본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칭찬받을 만한 건가 싶었다.

선생님은 내 걱정을 들으시더니.. 절대 미술 학원에 보내서 테크닉을 배우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아이가 좋아서 계속 시도해보고 경험하면서 스스로 성장하는 기회를 주라고..

참..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방식의 접근이었다.


그날 상담에서 선생님은 아트 과목을 선택한 다른 학생과 부모님들에게도 첫째의 스케치북을 보여주며 상담을 진행해도 되냐고 물어 오셨다. IGCSE 아트 과목 시험은 완성된 작품만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고, 스케치북에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리서치한 것과 여러 가지 시도들, 연습 과정 등을 다 담아서 함께 평가받기 때문에 중요한데.. 이렇게 하는 거라고 예시로 보여주고 싶다고..

선생님이 아이의 노력을 알아봐 주고 계신 거 같아 참 감사했다.




드디어 걱정하던 첫 라이프 드로잉 수업 날이 왔다.

이번 수업은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이후 저녁 시간에 따로 진행되는 특별 수업이라.. 이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과 미스 K 선생님, 그리고 다른 학년 아트 선생님만 참여해 미술실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만 기다리며 괜히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수업 후 집에 온 아이는..

"아.. 생각보다 수업 재밌었어요. 그런데 너무 그리기 어려웠어요."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한 내 표정이 아이 눈에 다 읽혔는지.. 아이는 수업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수업 분위기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먼저 수업 시작 전에 핸드폰 사용은 모델분 떠나시지 전까지 사용 금지라 다 한 곳에 모으셨구요.. 아트 수업하는 교실 사방이 다 유리 창문으로 되어 있어서 수업 전에 커튼 치고 수업받는 인원 외에 출입하지 못하게 철저히 막으셨어요.

오늘 모델분은 인도계 여자분이었구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그냥 “30초 줄게, 시작!” 하면 자기 그림 그리고..
끝나면 바로 “이번에는 1분.."
그럼 그 잠깐 사이에 종이 바꾸고 모델분은 포즈 바꾸고 다시 그리고..
그렇게 반복이었어요.

연필, 펜, 먹물, 오일 파스텔 같은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구요..
미스 K 선생님도 같이 그림 그렸어요.
때론 우리가 그림 그리는 걸 곁에서 지켜보기도 하시구요.

30초, 1분, 3분, 5분, 10분 등으로 천천히 시간을 늘렸어요.
시간이 짧은 크로키를 더 많이 했구요..

그 이유는 모델분들의 다양한 포즈를 더 많이 접하기 위해서고..
소묘가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그 분위기 같은 걸 담아내는 방법을 배우려고 그런 거라고 설명해 주셨어요.

수업하다가 물 마실 수 있는 쉬는 타임이 한 10분 있었는데..
그때 잠깐 애들이랑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하고 서로의 그림 피드백 주고 할 수 있었어요. 수업이 진행되고 있을 때는 학생들끼리 대화할 수 없었구요.

짧은 시간 안에 그림을 그리려니 다들 집중하느라 진지했고..
장난치거나 농담하거나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가끔 모델 분도 가운을 입고 쉬면서 우리가 그린 그림을 직접 보기도 하셨어요.



"그랬구나.."

선생님은 자신이 그린 그림과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같이 보면서 어떤 점에 더 집중해서 그렸는지.. 어떤 부분이 잘 표현되었는지 칭찬하시며 격려했다고 한다.


해볼 기회를 주고 어떻게 해내는지 지켜봐 주면서 그 이후에 피드백을 주고받는 방식의 수업.. 국제학교의 이런 교육방식은 늘 내게 충격이고 참 신선한 경험이었다.


괜히 걱정을 했구나 싶었다.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수업을 할 기회를 만들어준 선생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한 주 뒤.. 두 번째 수업을 하고 온 아이는..

"엄마.. 오늘 모델은 남자분이었어요. 좀 부담되고 불편했는데.. 모델분이 정말 유쾌하셔서 긴장이 풀렸어요. "

"정말? 어머나.. 남자 모델이었다고?"

지난주 여자 모델이 왔다고 해서 좀 안심이 됐었다.

"한국에서 대중목욕탕도 가봤으니 뭐 어때?" 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는데..

남자 모델분이 왔다니 어쩌나 싶었다.


"진짜?.. 음.. 다 벗니? 너 놀라지 않았어?"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었던 말을 못 참고 해 버렸다.

"네.. 저도 긴장했는데 모델분이 어떤 포즈를 원하냐며 재밌는 포즈도 막 해주고.. 쉬는 시간에 가운 입고 아이들 그림 보면서 내 다리가 이렇게 짧냐.. 내 머리가 이렇게 크냐.. 속상하단 표정 지으셔서 아이들이 많이 웃었어요."

모델분이 긴장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재치 있게 분위기를 풀어주셨나 보다. 심각했던 내 걱정보다 아이는 유연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여줬다.


그렇게 이어진 한달 동안 네 번의 수업이 끝나고.. 미스 K는 학부모를 초대해 아이들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작은 전시회를 열어주었다. 이번 누드 크로키 수업에서 나온 작품들과 그동안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진행해온 작품을 함께 전시해 주었다.


학교 미술실에서 열린 작은 전시회..

아이들의 작품을 둘러보면서..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말로만 들어오던 미스 K 식 아트 수업의 결과물이 펼쳐져 있었기에..


첫째는 아트 수업을 특히 좋아하고 재미있어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미스 K 선생님의 수업 진행 방식 때문이었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저마다 작가를 리서치한 다음에 작가의 표현기법으로 따라 해 보고,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서 계속 자신만의 작품으로 발전해 나아가게 돕는 방법의 수업이라서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같은 주제를 주지만 같은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게 아니라, 찾아보는 작가가 다 다르니 표현 기법도 달라지고, 거기에 본인이 좋아하는 스타일과 아이디어가 더해지니 친구들마다 작품이 다 달라 구경하는 재미가 가득하다고 했다.


어떤 친구는 페이퍼를 오려 페이퍼 아트를 하고, 어떤 친구는 본인의 자화상을 아주 큰 캔버스에 유화로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친한 친구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서 오린 다음 그걸 재배치해서 모자이크처럼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고.. 선생님이 다양한 재료를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고 경험하게 해 주었단다.


대체 그게 가능해 싶을 만큼 열정적으로 다양한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열심히 도와주셨다고 듣긴 들었는데.. 학교에 가서 전시를 보니 아이가 왜 이리 좋아하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 이게 그거구나~~' 하고 놀라워하며 구경했다. 다양한 작품들이라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예상보다 뛰어난 실력의 작품에 아이의 친구들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내 눈엔 아이들 작품이 다 피카소 같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았다.


실력의 뛰어나고 아니고를 떠나서..

정말 다양한 표현으로 꾸며진 아이들 작품과 그 밑에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적힌 설명들을 보니..

미스 K 선생님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상을 줄 수 있다면 <멋진 선생님 상>, <최고의 선생님 상>.. 마구 드리고 싶었다.


미스 K 선생님은 함께 첫째의 작품들을 들여다 봐 주시면서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드는지 말씀해주셨다. 유화를 접해 본 적 없던 아이가 처음으로 유화 물감을 여러 번 도전해 사용해보고 연습해서 그려낸 그림도 전시해 주셨는데, 아이의 노력으로 피어난 작품이라며 칭찬하셨다. 선생님의 진심이 느껴져서 진심 너무 감사했다.


(아이가 처음 그려본 유화)



아이들이 그린 누드 크로키 작품도 한쪽으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처음 그려본 크로키니 인체 비율이 안 맞는 작품도 있고 강렬한 작품도 있고.. 여러 번의 시도로 점점 나아진 성장도 한 그림에서 보였다.


(아이와 친구의 라이프 드로잉.. 그림을 조금 잘랐음을 이해해 주시길..)


이렇게나 고마운 기회를 만들어 주셨는데.. 고지식한 엄마라 좋은 기회를 놓칠 뻔했구나 싶었다.




그렇게 선생님이 열심히 경험할 기회를 만들어 주신 덕분에..

아이는 나중에 IGCSE 아트 과목에서 이 학교 생긴 이래로 처음으로 만점을 받았고..

성적을 받으러 간 날 아트 선생님 미스 K가 달려 나와 꼭 안아주시며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셨다고 했다.


이렇게 감사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한지..

나중에 아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는데.. 옮겨간 학교에서 이렇게 열정적이고 훌륭하신 아트 선생님을 만날 순 없었다. 모든 국제학교 선생님이 다 미스 K 같진 않구나 하는 걸 그때 알았다.


국제학교의 가장 큰 단점 중 하나는 좋아하는 친구들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나게 돼서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건데.. 선생님들의 이동도 잦다는 점이다.

최근까지 아이의 진로 결정에도 많은 조언을 주셨었는데.. 얼마 전에 학교를 그만두시고 다른 학교로 옮기셨다고 한다.

아이에게 행복한 시간을 선물해주신 고마운 아트 선생님 미스 K..

어느 곳에서든 좋아하시는 아트 수업 행복하게 하고 계실 거라 믿는다.

항상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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