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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서 무서운 야누스를 만났다.

(해외살이 서러움)

by 서소시

유난히 하늘이 맑고 푸른 날이었다. 며칠 내리던 비가 멈추고 오랜만에 보는 쨍한 파랑과 초록초록한 풍경에 이게 싱가포르에 사는 즐거움이지 싶었다.

정말 오랜만에 반가운 지인을 만나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쨍한 날씨만큼 기분 좋은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유모차에 앉아있던 작고 귀엽던 지인의 아이는 어느새 초등학교를 입학했다고 했다. 그 작던 아이가 새벽 일찍 일어나 가방 메고 학교를 다닌다니..


듣다 보니 오랜만에 보고 싶은 마음도 앞서고 무더운 날씨에 하교하느라 힘들 텐데 마침 근처니 가는 길에 태워서 집까지 데려다주겠노라 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지인분 아이가 다닌다는 초등학교로 향했다.


싱가포르 공립학교는 보통 HDB라 불리는 공공주택 단지들 사이에 있어서 아이들 등하교 시에 HDB 야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이들을 태우곤 한다.

( 싱가포르 HDB 야외 주차장 ㅡ photo by 서소시)


하교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지 HDB 야외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지인분 아이가 나온다는 교문에 최대한 가깝게 차를 세우고 아이가 나올 시간까지 차 안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리자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나둘씩 차들도 많아지고 교문 앞쪽에서 기다리는 부모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지난번 봤던 때보다 얼마나 더 컸을지 상상해 보며 마냥 즐겁던 그때였다.


딱 봐도 크고 고급스러운 자동차 한 대가 내 차 오른편에 주차하려는 듯 다가왔다. 한 마리 맹수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그 차를 보는데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건너편 오른쪽에 이미 차가 주차되어 있어서 이렇게 큰 차가 그 사이에 들어오긴 무리일 텐데 싶어 눈을 못 떼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쏜살같이 앞으로 차를 움직였다가 속력을 안 줄이고 그대로 훅 후진해 왔다.

'설마 설마..'

"드드득~~ 득득~~"

'아.. 불안한 예감은 왜 빗나가지 않는 건지..'

좁아 보이는 공간에 주차하면서 속력도 안 줄이고 후진하던 그 차는 그대로 내 차의 사이드 미러를 박아버렸다. 주변에 주차할 공간이 넘쳐나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싱가포르에서 운전한 지 여러 해가 되었기에 가벼운 접촉 사고 시 어떻게 하면 되는지 매뉴얼은 알기에 화가 났지만 차분히 창문을 내리고 옆차를 바라봤다. 내리려고 봤더니 차문을 열기엔 틈이 너무 좁아 보였다.

(가벼운 접촉사고가 나면 서로 상대방의 운전 면허증을 사진으로 찍고 연락처를 교환하면 된다. 그 이후 따로 연락해서 보험으로 처리할 건지 확인하고 보험사가 있으면 그들이 잘잘못을 판단해서 해결하기에 렌터카인 경우엔 사고 경위를 보험사에 보고하면 된다.)


놀란 마음 진정시키며 옆차를 봤다. 눈이 마주치자 같이 창문을 내리던 상대 운전자는 짧은 한마디를 던지더니 이내 창문을 쌩 올려버렸다.

맙소사!!!

내가 들은 그 짧은 문장에 너무 놀라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당황스러웠다.

이럴 수가.. 어렵게 차에서 내렸는데 상대 운전자는 전혀 미동 없이 여유롭게 앉아 내릴 생각도 안 하고 자기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최대한 숨을 고르며 창문에 노크를 했다.

그 운전자는 세상 귀찮다는 듯이 창문을 내리더니 방금 전 한 말과 똑같은 말을 던지듯 내뱉고 빠르게 다시 창을 올려버렸다.

"You didn't park properly. "

(네가 제대로 주차하지 않았잖아 )

가만히 있는 차를 와서 박아놓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놀라서 내 차를 돌아보니, 맙! 소! 사!

바퀴가 주차라인을 밟고 있는 게 아닌가.. 주변에 주차할 공간이 아주 많아서 부주의했나 보다.


'대체 뭐지 이 사람.. '

잠깐 사이 그걸 다 보고도 속력을 안 줄이고 이렇게 무리해서 주차를 강행했다고? 근처에 주차 공간이 아주 여유로운데 굳이 이 틈에 들어와서 박아 버리다니..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잘못은 내가 했다 덮어씌우니 당황스러워 말이 안 나왔다. 이 수리비를 내가 다 덮어쓰면 어쩌나 싶어 머릿속이 하얘졌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그에게 차에서 내려 이야기하자 했더니 공간이 좁아 차문을 못 연다며 못 내린다고 했다. 내 차는 렌터카이기에 사고 보고서를 써야 하니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고 연락처 교환을 하자고 다시 말해봐도 그는 자기 잘못이 없다며 차 안에서 뻔뻔하게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안 나오고 있었다. 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런 황당한 운전자는 처음 봐서 난감했다. 해외살이 여러 해 동안 친절한 사람만 만난 건 아니었지만 이런 사람을 만나다니..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어 보여서 일단 같이 계신 지인 분께 경찰에 신고해 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주차된 상황과 피해 부분 사진을 먼저 찍으면서 경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쳐다도 안 보던 그 차 운전자가 다시 한번 더 네 잘못이다 소리치더니 자기 오른쪽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게 빨리 빼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들 아이를 데리러 왔으니 아이가 안 나오면 나갈 수 없는데도 화를 내고 있었다.


이런 사람은 처음 봐서 겁도 나고 이대로 차를 빼 도망가면 안 될 거 같아서 경찰에 신고 전화를 한 건데 잠시 뒤 돌아온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경찰에선 사고로 다친 사람이 있느냐, 사고 정도가 어느 정도냐 묻고는 큰 사고가 아니고 다친 사람도 없는 작은 일이니 서로 잘 이야기해 보라며 바로 와 주지 않았다.

이 정도 접촉 사고로 경찰에 신고할 일이 아닌 건 맞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상대의 대응에 경찰 도움이 필요하다 싶었는데.. 다른 방법이 없어서 상대 운전자의 태도를 이야기하며 한번 더 경찰 도움을 요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차 안에서 나오지 않는 그에게 경찰에 전화하고 있으니 기다리라 했더니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까딱이며 자기 쪽으로 오라는 시늉을 했다. 좋게 말할 때는 쳐다도 안 보더니 그의 태도는 너무도 불량했다. 거칠고 신경질적인 그의 태도에 겁이 나서 나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가까이 가겠는가.. 그랬더니 좁아서 못 내린단 시늉을 했다.

그러니까!!!

주차선을 즈려밟은 나도 잘못했지만 이렇게 큰 차를 내리지도 못할 공간에 굳이 주차하고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됐다.


잠시 뒤 그 운전자가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이려고 했다. 차를 빼 가버리면 안 될 거 같아서 그 차 앞을 막아섰다. 경찰과 통화 중이니 기다리라고 하면서..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실상은 너무 무서웠는데 진심 화가 났다.


그는 두 눈을 부라리며 뚫어져라 나를 째려보면서 차를 앞으로 전진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핸드폰으로 나를 찍고 있는 게 아닌가.. 스탑을 외쳐도 보란 듯이 전진해 오는 차를 보며 경찰이 끝까지 안 오면 어쩌나 너무 무서웠다.

정말 울고 싶었다. 경찰을 불렀으니 기다리라고 소리치면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지인분도 너무 놀라서 그 상황을 같이 동영상으로 찍어줬다. 그리고 그의 위협적인 태도를 알리며 경찰과 다시 통화해 주셨다. 그제서야 경찰이 오겠다고 했단다. 세 번 만에.. 나를 향해 위협적으로 그 차가 돌진해 온 뒤에야..


으르렁 거리며 앞쪽으로 밀고 나오던 그는 경찰이 온다는 소리에 멈춰 섰다. 이 정도 일에 경찰이 안 온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시끌시끌한 상황에 아이들을 데리러 온 다른 학부모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가 비정상적이니 위험한 상황을 염려해 그냥 보내주라는 분, 앞을 막고 있으면 내가 불리하니 옆으로 서 있으라는 분, 사진 찍고 가게 두라는 분도 있었고 사고 피해가 크지 않으니 별일 아니다 하는 분도 있었다. "낫띵라 ~~"를 외치며..

네네.. 알죠. 별일 아니고 말고요..

그냥 기본 정보만 교환하고 가면 되는 일인 것을 이렇게 일이 커지다니..


사람들이 모여드니 못 내린다던 상대 운전자는 몸을 구겨가며 억지로 차에서 내렸다. 드디어 이야기를 할 수 있으려나 했는데 아이들이 나오는 교문 앞쪽으로 가더니 머리 위로 큰 동그라미를 그려대며 사람들을 향해 내 탓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울고 싶었다. 잠시 정차했다 나가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잠시 뒤 자기 아이를 데리고 나온 그 운전자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수리비 줄 테니 오라며 거만하게 굴었다. 대체 왜 내쪽으로 오지 않고 나더러 오라고 하는 건지 괘씸했다. 경찰이 온다고 했으니 기다려보자고 했다. 이렇게 나쁜 운전자는 따끔한 맛을 봐야지..




많던 학부모들과 아이들이 떠나가고 정말 한참을 기다려서야 오토바이를 탄 경찰이 왔다.

'아.. 이제 됐다."

경찰을 보는 순간, 긴장해서 잔뜩 뭉쳐있던 마음에 겨우 바람이 통하는 거 같았다.


그런데.. 이제 됐다 싶던 안심은 순식간에 부서져 버렸다. 조금 전까지 손가락만 까딱이며 위협해 오던 그는 한순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경찰은 한 명씩 이야기를 들어 보겠다며 각자 이야기 할 시간을 줬는데 태도부터 공손해진 그는 순진한 표정으로 완전 다른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고 뒤 처리를 안 한 것이 아니라 공간이 좁아 못 내려 그랬다며 앞으로 돌진해 온 것도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 내려야 해서 그랬다고.. 나중에 전화번호와 운전 면허증 교환하고 보상하겠다고 했는데 내가 대화하지 않았다고..

완전 소설을 쓰고 있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너무 화가 났다. 그래도 화를 내면 오히려 손해라고 주위에서 주의를 주셔서 꾹 참고 사고 경위를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해 나갔다. 가뜩이나 버벅거리는 영어 수준이 상대방의 교활한 거짓 진술에 너무 놀라 더 뒤죽박죽 흘러나왔다. 아.. 진짜 부족한 영어 실력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그래도 지인분이 찍어준 위협적인 동영상이 있어 그걸 보여주며 그가 얼마나 위험하게 행동했는지 알리려 애썼다. 혼자 있던 게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가 아까와는 너무 다르게 태도를 바꿨다고.. 무서웠다고 전했다.

그는 그것도 대화를 위해 내리려고 공간 만든 거라고 했다.

그럼 노려보던 그 눈은 뭐란 말인가.. 너무 속상하고 무서웠다. 빤히 째려보면서 위협적이게 밀고 나와 놓고선.. 꿈에 나올까 무서운 그의 이중적인 태도에 너무 충격을 받았다.

경찰 앞에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내가 외국인이라 오해가 있었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자기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며..


사고 자체가 경미하고 내가 필요한 건 상대방의 연락처와 운전면허증을 찍은 사진이면 되는 거였는데.. 저 무시무시한 두 얼굴의 야누스는 나중에 교환하려 했는데 내가 응하지 않았다며 말을 바꿨다. 그의 연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야기를 들은 경찰은 내게 두 가지 옵션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상대가 전화번호와 면허증 교환을 하겠다고 하니 교환하고 가는 것.

두 번째는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면 변호사를 사서 소송을 하라는 거였다.

이 일로 경찰서에 가서 사고 경위서 써야 하냐고 물었더니 다친 사람이 없어서 안 해도 되고 작은 일이라 본인도 리포트 안 하겠다고 했다.

난 분명 위협을 받았고 너무 무서웠는데.. 너무 억울했지만 지금 눈앞의 그의 태도가 달라져 있으니 다른 방도가 없어 보였다.


경찰이 오면 저렇게 위협적이고 비정상적인 운전자에게 어떤 조치를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적어도 사과는 들을 줄 알았다.

결국은 너무 당연한.. 기본적인 정보 교환만 가능했다. 그나마도 경찰이 와서 가능했구나 싶었다. 경찰이 안 왔다면.. 상상하기도 무서웠다.


면허증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는 내 면허증이 햇빛에 반사되어 잘 안 보인다며 정말 여러 번 찍어대더니 막상 내가 찍을 땐 두어 번 만에 얼른 집어넣어 버렸다. 내 정보를 이런 사람에게 남긴다는 게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렇게 돌아서서 차에 와 앉고 보니 온몸에 힘이 빠지고 손발이 덜덜 떨렸다. 나를 째려보며 차를 밀고 나오던 그 눈이.. 잊혀지지 않았다.

좋은 마음으로 갔던 건데 지인분과 아이에게 오히려 피해만 주고 말았다.

남편은 내 대처에 기겁을 했다. 무서운 세상에 그가 어떤 사람일 줄 알고 위협적인 차 앞에 서 있었냐며.. 다쳤으면 어쩌려고 그랬냐고 절대 외국에선 안전부터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게 말이다. 경찰이 와도 상황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나쁜 놈을 만났구나 하고 돌아서 올걸 그랬다.

놀란 마음에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겨우겨우 돌아와 렌터카 회사에 사고를 알렸고 보험 관련 담당자가 사고 경위를 들으러 찾아왔다. 있었던 이야기를 다 듣고 차 안의 녹화된 블랙박스까지 확인한 그는 보통 그런 운전자는 잘 없는데 내가 너무 운이 없었다며 위로해 줬다. 그러면서 소송은 큰돈이 드니 불가능할 테고 정말 많이 억울하면 경찰서에 가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다시 강조해서 신고해 보라고 했다.


일단 보험사의 판단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너무 놀라고 속상해서 며칠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씩씩거렸다. 그렇게 기다린 며칠 후 보험사 측에서 연락이 왔다.

정황상 주차선을 밟고 있던 내게도 과실이 있으니 상방과실로 50 : 50의 비율이라고..

서로 상대의 손실을 수리해 준다고 봤을 때 상대방 차가 훨씬 비싼 고급 차종이라 우리가 부담해야 하는 수리비가 더 많이 나올 거 같아 상대측에 의의 제기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에게도 억울할 테니 수리비를 따로 요구하지 않겠다며..


이럴 수가!!!

돈도 중요하지만 하마터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던 위험한 상황이 있었는데 그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않을 거다 싶으니 너무 억울했다. 이런 비매너 운전자에게 아무 의의 제기도 못하고 그냥 넘어가야 한다니..

아마도 그는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나 싶었다. 처음부터 뻔뻔하게 네 잘못이다부터 주장한 게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닌 건지..


억울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처음 차를 주차하던 그 순간부터 공간이 좁아 위험한 상황인 것도, 내 차가 주차선을 밟고 있단 것도 다 알고 있던 그 운전자는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이 상황을 넘기게 됐다. 자기가 찍은 동영상을 들고 나만 미친 여자 만들고 있을지 모른다 싶으니 너무 속상했다.


경찰도 보험사 측도 사고 이후 그가 보인 위협적인 태도에 대한 언급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억울하면 소송하라니..

이 나라 법을 다 알지 못하지만 이렇게 끝나야 한다니 너무 슬펐다. 만약 다쳤다면 나만 억울했을 상황이었나 보다.

참 고단한 경험..

서러웠다. 쉽지 않은 해외살이다..







(사진 출처: Photo by John 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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