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의 묘를 통한 의미의 왜곡

원작의 처절한 절규는 어떻게 변질되었는가?

by yun

왜 반딧불이의 묘인가?


이미 이 애니메이션 작품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될 만큼 됐다는 점에서 굳이 왜 이 작품을

다루는 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본인으로서는 최종적으로 언젠가 쓸

본인의 의견을 제시하기 위한 첫 글로서 가장

알맞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거 작품이긴

하나 가장 극심한 논란이 있었던 작품이기도 한 만큼

대표성이 있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제목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지만, 본인은 이

작품 자체를 디테일하게 분석하기보다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하겠다.


소설 원작자의 메시지


우선 이 작품의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공교롭게도 이 작품의 원작은 우리나라에서 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식 번역은 02, 03년 나온 판본이

전부이고 이미 절판되었으며 이북은 아예 없다.

전적으로 도서관이나 중고매물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일본어를 잘한다면 원서를 사는 게 횔씬 편하다.


즉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에 대한 논란에 있어서

이 각색된 작품만을 보느라 원작에 대한 관심을 가질

기회조차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일단 원작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겠다.


원작 작가 노사카 아키유키는 애당초 평생에 걸쳐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일본의 우익화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역사적인 과거만행울 옹호하고나 일본을

전쟁에 휘말린 피해자로 그려내는 작품을 쓸 동기는 없다.


또한 원작의 반딧불이의 묘는 전후 엉망인 일본에서

자신이 여동생을 잃은 것에 대한 일종의 참회록이다.

여동생 몫의 음식을 가로채고 때리는 등

극한의 상황에 몰린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 주는 동시에 작가 자신의 과오에

대한 처절한 참회가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원작의 메시지는 어디로 사라지고

동아시아권에서 논란의 작품으로 남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한 번쯤 고찰해 봐야 한다.


소설에서 애니메이션으로의 각색 과정에서의 변질,

객관적 보여주기의 함정에서 대중에게 나타나는 왜곡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애니메이션은 나름대로 원작의 사건들을

순수하게 영상으로 보여주는데 치중했다는 점이다.

즉. 작가의 회한이나 참회라는 감정과 메시지는 삭제하고 이야기의

흐름 자체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영상으로 담았다는 이야기다.

이 애니메이션의 각색하는데 책임자라 할 수 있는 다카하타

이사오의 인터뷰를 보자면 '반전'이라는 메시지는 전혀 담지 않았고

청년과 아이들에게 고립되지 말고 사회로 나와 소통하기를

바란다는 뉘앙스를 밝혔다.

주인공의 상황과 선택으로 인해 의미 없는 죽음으로 이어지는 결론에서

주인공이 선택한 고립을 택하지 말라는 메시지에 가깝다는 점이다.

일단 여기서 이미 원작과 각색자의 메시지 변질이 나타난다.


그럼 변질된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와 이를 본 독자의 메시지의 변질은

왜 나타나는 것일까?

일본의 관객들은 일본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생각을 한국이나 일제에게

피해를 받은 나라들의 경우 불쌍한 소년 소녀를 내세운 가해자들의 비열한

변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여기서 '불쌍한 소년 소녀'를 내세웠다는 표현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내용적으로 주인공 남매의 죽음까지도 메세지롤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관객들은 좀 더 쉽게 메시지로 나아가는

발판으로서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으니.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원작자의 메시지를 제외 한 채 사건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어린아이들의 죽음이라는 현대 시대의 금기와 더불어 그때의 처연한 영상미가

모두의 이성을 마비시킨 채, 슬픔과 동정에 사로잡혀 버렸다는 점이다.

즉 그들의 죽음이 각색자의 메시지로 가기 위한 단초가 아니라 관객들에게 있어

작품의 마침표가 되어 버리면서 우리 모두는 그 장면만을 놓고 모든 해석을

쏟아내고 있었던 것 아닌가?


이런 나의 가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가해자의 비겁한 변명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조차도

주인공의 친척 아주머니는 악인보다는 선인에 횔씬 가까우며 여타 상황들은 놓고 보면

상대적으로 주인공남매는 엄청나게 좋은 환경이잖아? 등으로 주인공의 불만의 감정과

가출이라는 선택, 사회적인 도움을 거절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철저히 비판한다는 점이다.

즉 작품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 이 작품을 보고

최종적으로 중요하게 느끼는 것은 굉장히 감정적인 판단이다. 그들의 작품에 대해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부분과 철저하게 감성적 판단을 하는 부분은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단절되어 있다.


왜 서로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음에도 우리들은 그 위화감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애니메이션 반딧불이를 묘를 어떻게 보든 주인공들의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의 죽음의 장면을 이루는 영상미와 음악등으로 동정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동정심은 그 대상에 대한 공감과 본인의 선량함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패로서 작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이 위화감을 못 본 척하고 더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을 것 아닐까?


반딧불이의 묘에 대한 본인의 해석과 왜곡에 대한 재통찰


본인이 이제 와서 이 작품을 다시 보며 느끼는 점은

주인공의 어리석음과 당대의 일본 사회상 그리고 세계적인 정세까지

고려해 본다면 그 당시 일본의 고난은 일본 스스로가 불러일으킨 재난이라는

점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숙모의 집에서 충분히 타협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자신의 자존심과 동생의 칭얼거림에 집을 나와 동굴로 숨어버리고

(국제 정세를 무시한 채 명예로운 죽음(옥쇄)으로 뛰어드는 당대의 일본)

동생이 죽어가는 순간조차도 끝까지 고개 숙이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주인공( 모든 반격 수단을 잃고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이 코 앞임에도

전 국민 옥쇄를 국민에게 지시하고 미국에 이를 선언하는 국가적 광기)

를 주인공 남매에게 투영한 것이 아닐까. 더하여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일본의 군부와 정부에 대해 맹렬히 동조하고 지지해 온 일본 사회에게

너희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역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해석처럼 할 수도 있겠지만, 작품의 왜곡성이라는 측면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 보자. 앞에서 길게 설명했지만, 애니메이션의 각색은

결과적으로 원작자의 처절한 목소리를 아름다운 비극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작품만이 아닌 제작자들의 속내도 한 번 들여봐야 하지

않을까?



3. 자본주의의 눈치와 함정 : 독자가 원하는 것만 보여 줄 수 있는

편집의 힘과 마케팅


여기서 고백을 하나 하겠다. 나는 상당한 수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오타쿠이다. 왜 이를 고백하냐면 내가 덕후로서 알게 된

지식으로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막대한 자본은 필요하지만

굉장한 레드오션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애니메이션 왜 만드는가? 즉 돈을 벌기 위함인데 tv판이든

극장판이든 일본 국내 수익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특히나

이 반딧불이의 묘가 나올 시기면 더욱이나 그러했을 거고 현대의

창작 시장을 바꿔놓은 ott의 범람(제작사의 리크스를 한 없이 낮춰주지만

성공을 했을 시 대부분의 수익은 ott로 돌아간다)이나

해외시장에서의 특출 난 성공인 체인소맨 : 레제편(이건 리스크 분산 없는 애니메이션

제작사 단독의 자원투자(올인)로 야수의 심장이 없으면 못하는 성공이었다)

그리고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수치적으론 압도적이나 제작 측면에서

체인소맨 레제편은 마파 제작사 단 하나임에 비해 귀멸은 슈에이샤,

애니플렉스, 유포터블인 점에서 더 뜯어봐야 하는 편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 등과 같은 사례도 없을 때였다.

더욱이 당시의 지브리는 현대의 우리가 아는 수준의 명성도 없었고 아직

영세할 때였다.


즉, 작품이 나올 때의 상황으로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한 자원을 위해서

제작 위원회(일본 특유의 리스크 분산을 위해 다수의 참여자가 돈을 모으는 형태)

에 의존해야 했던 시기라는 점이다. 왜 이를 거론하냐고 하면 이 시스템의

단점으로 모든 참여자들이 만족해야 영상물이 완성돼야 한다는 점이다.

즉, 경영적 성공이나 여러 참여자 중 하나라도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은 바로 삭제된다. 초반에 언급한 원작 작가의 감정과 메시지가 바로

이 삭제된 부분이다.


이에 입각해서 좀 더 나아간다면 일본 국내 수익에 의존해야

하는 마당에 일본 가해의 역사나 반성에 대해 다루는 것은 일본 관객의 심기를

건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을 모조리 삭제하거나 알아보기

힘들게 처리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극대화하거나 잘 보이도록 편집

(주인공 남매의 죽음 장면의 영상미) 할 수 있다는 점은 산업 전반에서 드러난다.


더하여 이러한 자본의 눈치는 아예

해외에서는 '전쟁의 참사를 보여주는 반전영화'로 마케팅 시도를 하고

일본에서는 '어려운 시대를 겪은 우리의 과거'로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마케팅 광고 시도가 잘 되든 잘 되지 않든 바이럴이든 의도적인 안티팬

집결이든 돈만 벌면 그들의 목표는 성공한 것이니까.

이 과정에서 본인이 하루키의 문학에서 언급한 냄새나는 것에 뚜껑을 덮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행해진다.


어찌 본다면 앞에서 말한 객관적 보여주기를 위한 영상화보다 자본주의의 작품 각색이

원작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삭제했는지 더 명료하고 이해하기 쉽다.


작품의 왜곡과 수많은 욕망의 사이에서


처음의 주제인 원작자의 절규는 어떻게 변질되었는가? 에 대해서는

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변질과 오해가 겹겹이 쌓여있다.

이미 그 메시지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이러한 왜곡과 오해는 왜 생기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욕망 때문이다.

각색자의 욕망과 대중문화사업 참여자들의 욕망 그리고 이를 보는

관객 혹은 독자들의 자본주의 및 기타 요소들의 알만한 수작질을 눈 감고

자신들이 보고 싶어 하는 곳만 보는 욕망까지 말이다.


본인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이다.

본인의 글은 줄이자면 원작자의 처절하고도 진실된 절규를 적당히 요리하여

대중에게 먹기 좋게 나온 상품이 되었을 때 나타난 일들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

그것이 진정으로 옳고 그름 이전에 긍정적인 방향일까?


이런 왜곡은 결국 전체적인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고 나아가서는 문화산업

자체의 저평가로 이어지리라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다음 글을 읽으면 나의 생각에 동의하게 되리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왜곡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많다고 생각하는 바 다음은 국내작품들로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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