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우에 대한 비판

우영우 씹덕론과 빼앗긴 장애 - 무엇을 위한 창작인가?

by yun

작품을 다루기에 앞선 본인에 각오


이번에 다루려는 드라마 우영우에 대해선

솔직히 비판하기 참 애매한 작품이다. 자칫

잘못하면 선을 넘는다고 생각할만큼 각종

건드려선 안될 것들이 있다.


앞서 말하겠지만 난 이 드라마가 가진

페미성에 대해서 다룰 생각은 없다.

오히려 이 논제가 이 작품의 진짜 문제점을

가려 버렸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이런 나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 tv 비영어권 1위 월드랭킹 3위

당시 드라마 최고의 인지도와 선호도 조사

제13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작품상

18회 서울 드라마 어워즈 작품상 등등

수많은 선호도와 인지도 수상 내역은 하기도 전에

내 가슴을 떨리게 만든다. 본인은 그저 메모장에 글

끄적이는 한량에 불과할지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미래를 가린 장막을 뚫고 망각과 마지막 희망을 본

제라툴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각종 수상과 사회적

문제를 뚫고 이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 장막 안에 위선적인 자본주의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직감이 드는 순간 본인은 그 대상이 누구라도

과감히 비판하겠다.

이 작품에 대해 본인은 리갈하이의 주인공 코미카도

켄스케가 된 기분으로 그 썩은 냄새에 대해 짚어보도록

하겠다.


우영우 씹덕론으로 본 작품에 대한 이중적 태도와 비판


본인은 앞전의 글에서 오타쿠임을 고백했다.

그런 점에서 혹시 소위 우영우 씹덕론이라는 글을 아는가?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8437493

을 보면 이 우영우 씹덕론의 전문을 인용한 글이다.

손발이 오그라들고 읽기 힘든 점은 분명 본인도 인지하는

바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보는 사람의 불편함조차

이 글의 메시지이다. 더 좋은 예시가 있다면 좋겠지만

이 글만큼 우영우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서브 컬처 작품에서 주야장천 나왔던 모에 요소와

4차원적인 요소를 한국 방송국에서 파쿠리 했고, 이를

대단한 작품인양 떠드는 찬사에 대한 돌려 까기에 가깝다.

서브컬처적 4차원 전파계적 요소나 모에 요소는 우리나라

주류들에 있어서는 거의 조롱거리나 비판의 대상이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 자체를 희화화한 네티즌이나 만화가들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한데 갑자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조롱의 대상에서 한 번에 주류 문화로 편입되어 버렸다.


하지만 본인은 이런 얄팍한 서브컬처적 요소의 복제자체를

문제 삼으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리 본다면 우영우의 작품성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지만, 이는 일단 제쳐두겠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서브컬처의 사용법에 대해서다.


모에와 서브컬처적 요소는 장애의 불편함을 가리는 요소로

전락하였다.

- 아이엠샘과 말아톤을 통한 비교


본인이 모든 서브컬처 작품들을 본 것은 아니다. 다만 흔한

모에 요소나 4차원 전파계 천재성 캐릭터들은 많이 봐왔다.

이러한 캐릭터성은 그저 그 특정 캐릭터의 특성이나 변주에

가깝거나, 과거서사나 심리적 요인에 따른 그 캐릭터의 고뇌로

처리한 게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본조차 장애를

엮여서 중요 캐릭터성으로 다룬 적은 없다.


이 드라마의 특성은 그동안 천시받아온 서브컬처적 모에와

4차원 전파계의 활용과 더불어 자폐라는 장애가 주인공뿐만

아니라 작품적으로도 다뤄지는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극의 대부분의 경우 시청자는 주인공의 행동 위주로

시청할 수밖에 없는데 이 주인공에게서 장애의 편린을 보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작품을 즐겁게 본 시청자들조차 의견이

나뉘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문제점을 느끼고 있다.


왜 그런 문제점을 느꼈는가?

여기서 과거의 장애를 다룬 작품인 아이엠셈이나 말아톤 등을

떠올려보자.


작품들에 등장하는 샘 도슨과 초원이의 장애는 극 내내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조차 가장 중요한 순간에조차

말이다. 그들에게 장애는 인생에 있어서 극복해야 할 무게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여실히 보여줬다면 우영우는 어떠한가?


설령 앞의 작품들 정도의 현실성을 바라는 것은 무리더라도 드라마에서는

때나 상황에 따른 장애의 요소가 선택적으로 나온다. 심지어는

이 '자폐에서 나온 습관'들조차 여배우의 뛰어난 비주얼과 연기력 그리고

모에로 치환하면서 보호본능이나 귀여움을 느끼게 하는 도구로서 전락한다.

혹은 '4차원 전파계'를 활용하여 방송국식 연출(고래 cg, 음악 등등)을 통해

'사회적 소통의 어려움'이 아닌'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신비롭고 아름다운

인간'으로서 미화시켜 버렸다.

이 어디에 본인이든 주변인이 느낄 수밖에 없는 장애적 불편함이 있는가?


정리하자면

장애라는 현실에 존재하는 아픔을 방송국식 모에와 4차원 전파계로 보기

편하게 왜곡했다. 그러고는 이 드라마는 '자폐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보는

착한 드라마예요~'라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이게 정녕 옳은 것인가?


천재성 - 이 드라마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위선이자 그 허구성


우영우의 캐릭터성을 이야기할 때 천재성을 빼놓을 수 없다.

본인은 이 천재성이 가장 거대하고 악독한 위선이라고 단언하겠다.

애초에 이 천재성이 없었다면 그녀는 수석이라는 성적을 낼 수

없었을 거고 드라마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고 따질 수 있다.

이를 따져보면, 천재성이라는 주변을 압도하는 거대한 능력과

사회적 쓸모가 없다면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선언인가?

이는 장애에 대한 따뜻한 시선조차 아니라 금요일 밤

클럽의 입구컷 같은 가혹한 선별기준일뿐이다 (절대 내가 입구컷

당해서가 아니다. 난 클럽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독특한 세계관 가진 매력적이고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귀여움까지

갖췄는데 자본주의가 가장 필요로 하는 능력인 천재성까지 갖췄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의 캐치프레이즈나 제목을 떼고

생각한다면 자폐향(0.02%)을 첨가한 페로몬형 먼치킨 캐릭터

혹은 작가 편애적 메리수 캐릭터일 뿐이다. 이렇게까지 해서 자폐에

대해 논의한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드라마를 보고 과거 무례하고도 통찰력 없는 몇몇 사람들이 자폐를

축복인양 오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아이가 우영우와 같은 요소를

갖고 있지 않을까 검사까지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참 우습지 않은가?


심지어는 몇몇 사람들은 이 우영우의 존재 가능성 등을 따지며

일론 머스크나 서번트 증후군을 들먹이는 것을 보면 이제와 느끼는 거지만

정말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나 싶다.


일단 일론 머스크는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여타 정식적인 치료나 진단을

받은 적이 없다. 그렇다 해서 그가 의학적 수련이나 학위를 취득한 전문가도

아니다. 즉 그저 자가 진단일 뿐이며 코스프레일 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는 그의 공식 자서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서번트 증후군을 들먹이는 것은 더 큰 오류인데 그들은 일부 한정되고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 압도적인 능력을 보여줄 뿐이다. 일부 조건만

바꾸어도 일반인 이하로 능력이 내려가는 경우가 절대다수이다.

서번트 증후군이 무슨 필요할 때마다 특정 재능이나 순간 암기를

다양한 상황이나 문제에 맞춰서 답을 낼 수 있는 마법의 물건이 아니다.

이는 의학적으로 이미 인증된 바이다.


그러니 무슨 고기능 고지능 자페 스펙트럼이니 하는 나쁜 부분만 줄이고

좋은 것은 끼워 넣는 선택적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같은 의견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진단기준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단어 나열쇼에 불과하다.


작품 속 가상인물의 실현 가능성을 따지는 건 사실 오덕들의

캐릭터 vs 놀이같이 의미 없는 짓이다. 하지만 덕후도 아니었던 시청자들이

이 우영우라는 캐릭터를 두고 일어나는 이런 시도나 사건들은 이상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자면 이 방송국식 서브컬처 캐릭터가 얼마나 '상업적' , '자본주의적'으로

페로몬형 캐릭터로서 잘 만들었는지에 대한 확인에 가깝다.


나는 왜 화가 났는가?

로젠메이든과 카사네(累) 등과의 비교, 그리고 작품 방향성에

대한 나름에 대안


혹자들은 이리 물어볼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느냐.

우영우는 분명한 장점을 가진 작품이다. 나도 어느 정도는 이에 동의한다.

본인도 이 드라마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길고 상세하고 강하게 말하려는

계획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이 늙은 오타쿠를 슬슬 화가 났다.

이는 동류혐오라고 볼 수 있는 감정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코미카도 켄스케의 코믹함을 갖추고 쓰고 싶었지만 점점 아이젠 소스케의 썩은

표정이 되었다가(이렇게 생겼으면 애초에 오덕질을 하지 않았겠지만) 종국에는

중국의 옛 작가 루쉰의 근엄한 표정으로 바뀌었음을 거울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지경이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보자면 내가 봐온 오덕 작품들의 한계성 때문이다.

서브컬처의 모에성과 4차원전파계 천재성 같은 요소는 캐릭터성을

강화시킨다. 동시에 이야기의 서사자체를 약화시키며 작품 메시지와

독자들의 이해조차 캐릭터성 하나로 거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이는 작품의 질 자체를 하락시키는 주요 요인이 된다.


이 점을 우영우는 그대로 답습함과 동시에 장애라는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자 특유의 예의와 진중함,

고뇌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화가 난 것이다.

이는 명백한 작품성의 후퇴이자 거대한 위선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로젠메이든이라는 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만 봐도 여러 캐릭터들이

모에적 요소로 떡칠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 하나하나의 고뇌와 실존적

문제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연 속에서 서사가 만들어짐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사에서 등장하는 인형들을 통해 인간성에 대한 논의를 한다.


위와 같은 레벨의 작품들은 모에를 서사를 완성하기 위한 윤활유로서 사용했다.

혹은 이러한 단계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어도 '우리 애들 귀엽고 예쁘죠?

그러니 굿즈 많이 사주세요' 정도의 순수한 욕망에 가까운 자본주의였다.

여기까진 어떻게든 참았을 것이다. 나에겐 이미 수십 년간 봐온 흔한 일상이니까.


하지만 우영우는 장애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서브컬처적 매력으로 불편함을

삭제하고 따뜻한 시선으로만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건 현실에 대한 마취와 세뇌에

불과하다. 감히 말하건대 본인은 매우 이성적으로 분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최소한 내가 본 것들은 선각자 코스프레나 도덕적 방패를 세워 독자와 현실을

기만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만화 카사네(累)에 대해 언급하여 설명하겠다.

이 만화에서 주인공은 연기에 있어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엄청나게 추한

얼굴을 가진 캐릭터이다. 주인공이 마법의 립스틱을 얻고 남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바꿀 수 있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녀는 립스틱으로 남의 아름다운

얼굴을 훔쳐 자신의 추한 얼굴을 가리고 천재적인 연기력으로 무대에 올라

관객들의 환호를 받는다. 하지만 그 환호와 찬사는 진짜 주인공만의 것인가? 그녀에게

얼굴을 뺏긴 자들의 박탈감과 도둑맞은 기회는 어디로 간 것인가?


이에 우영우를 대입해 보자면 실제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이 아닌, 박제된 판타지를

향한 기만된 환호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카사네에서 얼굴을 빼앗긴

이들이 있는 것처럼 우영우의 '천재적'이고 '매력적인' 자폐(0.02%)의 얼굴에

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자폐인들은 대중의 시야에서 삭제되거나 왜곡된 채로

박제된 것이다. 빼앗긴 가난, 빼앗긴 씹덕에 이어 이제는 빼앗긴 자폐인가?

도대체 제대로 소화조차 못 시키면서 무엇을 위해 빼앗아 간 거고 또 앞으로 무엇을

더 빼앗아 갈 것인가?


그래서 몇몇은 어쩌라고 씹덕아 라며 이죽댈 수도 있다.

잘못을 저질러 벌로나마 유튜브나 인터넷 등지에서 선플 운동을 해야 하는

어린아이처럼 살기로 한 나로서는 대답을 해야겠지.


본인은 예전에 언급햇 듯 제대로 된 창작을 완성을 하지 못한 채 도망친 실패자이다.

하지만 최소한 작품을 만든다면 결코 이런 식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이 메시지가 흐려질지언정 주인공이 사회적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거나

군중들 앞에서 공황을 겪는 장애 같은 것을 설정할 것이다. 그리고 핵심적 키워드

정도만 되뇌거나 좀 더 나아가야 지만 완전한 해답이 되는 불완전한 해답을

내놓는 결핍된 주인공을 설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받아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제대로 해석하고 제대로 된 답변을

완성할 수 있는 보조 캐릭터나 더블 주인공으로 하는 방식을 취해서 이러한 비판은

받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특성을 더하자면 장애를 겪지만 외유내강형 캐릭터

사회성이 뛰어나고 다재무능하지만 외강내유형적 특성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이 싸울 수도 있고 잠시 헤어질 수도 있고 서로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고

다른 점을 찾아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서로 간의 소통과 더불어 이들과

세계와의 소통까지 다룰 수도 있고 말이다. 여하튼 다양한 사건들로 이들이 만들어가는

과정을 채우고 소통과 진정한 해답을 찾아가는 것을 보여줬어야 했다. 그것이 작품 아닐까?


이와는 다른 방식일지라도 자폐라는 장애를 다룸에 있어서 '소통'이라는 부분을 판타지를

활용해서라도 강조 했을 것이다. 자폐의 가장 큰 문제와 아픔은 자폐를 겪는 본인과

세상과의 소통불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현실적인 소통일지라도 무조건 작품

안에서 다뤘을 것이다.

이런 방식이라면 더 다양한 메시지와 사회적 공존을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최소한 이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든 현재든 잘 나간다는 작가들은 아무리 뛰어난 인물을 설정해도 결핍이라는

요소를 무조건 넣는다. 모든 인간은 다 불완전하며 그렇기에 서로를 필요로 하며

그런 이유로 소통을 하니까.


굿 윌 헌팅, 업사이드 등의 파쿠리라는 소릴 들을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치트키와 눈속임, 도덕이라는 방패 없이도 작품은 나올 수 있다는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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