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글

by 일기장






외할머니의 작고로 내 사고회로가 어떤 일련의 생각들에 잠식되어 있다.

참 우울하고 불편한 것들이다.


삶의 끝은 죽음인데,


그러니 삶이 곧 죽음 같은데,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사는 걸까.


죽으려 사는 참 역설적인 상황이다.


그럼 사는 동안에라도 잘 사는 게 존재의 이유일까.


그렇다 치면 잘 사는 건 뭔데?





그동안은 다소 낭만적인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생일날 등 이따금씩 소원을 빌 일이 생기면 거침없이 읊었던 소원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해 주세요’였다.

미루지 않고 당장 그들과 하루하루 기쁘면, 그걸로 되었었다.


하지만 소소한 행복조차 결코 소소히 이룰 수 없다는 걸,

안위와 행복은 일상이 아니라, 아등바등 지켜내야 하는 꿈과 같은 것이란 걸 조금은 실감한다.


무엇보다 돈이라는 녀석이 참 필요해 보이는데, 문제는 수단인 주제에 영향력이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현실이란 이름의 힘을 입고 주객전도를 손 놓고 보고 있게 만든다.





반항하자니 이제는 철부지 낭만파 같고

순응하여 열심히 살아보자니, 열심히 산다고 잘 사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어중이떠중이가 된 나는 평생 불안하고 부질없는 것, 그것이 삶이라 느낀다.

근래 이런 허무주의적 결론만 내려지는 것이 안타깝지만 애써 어찌할 생각은 없다.

실은 너무나 잘 살고 싶은 마음의 방증이니 말이다.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오.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 주오.
삶은 가시 장미인가 장미 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김승희, 『장미와 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