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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이 던진 S. I. B. A. L.

그래, 헤어져

by 아는개산책

아침부터 '탁, 탁, 탁, 탁'

조용한 사무실 공기 위로 타자소리가 퍼진다


다시 '스읍-'


머리를 쥐뜯고 있는 나.


내가 쓰고 있는 건 이별을 고하는 이메일이다.

2년 동안의 만남. 그리고 최근 들어 지속되는 싸움.

차마 눈을 보고 말할 용기도 없어,

시간을 가져보자는 이메일을 막 마무리 했다.


-전송-

슬프다.

이 감정은.



실수의 대가


곧 출근 시간이 다되어가는지 한둘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 대리님, 큰일 났어요"


가장 듣기 싫은 그 단어

'큰일 났어요'


"아니야"

맞장구치면 길어진다.


"저 죽었어요 대리니임~~"

"았네?"


"아 그게 아니고~~"


그의 말인 즉, 어제 한 시간 정도 추가 업무를 하고, 막 오프하려던 찰나에 컴퓨터 위로 띠링-

최대한 빨리 견적서를 보내달라는 업체의 메일을 보고, 서둘러 견적을 작성. 전송까지 누른 후 집으로 갔다고 한다


"잘했네"

책상가까이 의자를 끌며 영혼없이 대꾸한다.


"대리님 그런데, 하...."


그때 붉으락푸르락의 팀장이 성큼 성큼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어? 팀장님 안녕하세요"

하면서도, 알수 있다.


앗-

여기다.

살인버튼 눌린 분.


"너 이 색히 너 일을 뭘로 배운 색히야?! 견적을 보내면서 다른 업체들까지 다씨씨 달아서 보내버려? 아주 견적을 네이버에 전체공개해서 공유를 해버리지 왜"

귀멸의 칼날에서 보던 악귀의 표정.


"잘못..했습니다..."

그 순간 김주임은 잔뜩 구겨놓은 종잇조각이 된 것 같다.


"잘못했단 말이 어떻게 해결하는데? 너 같은 놈은 아휴 - 내가 확 니 대장을 다 빼서 줄넘기를 하고 눈알을 다 뽑아서 믹서기로 갈고, 내가, 엉? 못할것 같아?"


시작됐다. 참신한 욕타임.

한번 한 욕은 또 안 쓴다.


김주임이 안타깝긴 하지만,

잘못한 일이 맞기도 하고.


-욕쯤이야 그냥 넘겨버리면 되지 않을까?

내 하던 일에나 집중하려는 순간,


파바박!!!!!!


-어? 설마 때린 건 아니지?

저절로 소리나는 곳에 고개가 돌아간다.


"이 따위로 할 거면 책상! 빼!!!"


고성과 함께 책상 위를 쓸어버리는 팀장.

순식간에 키보드가 날더니 벽에 파바박 부딪히며 긁고는 땅에 떨어진다.


-오늘은 쎈데.



알파벳은 정체성


나와 그리고 욕먹은 김주임.

거기에 이대리까지 더해 머리를 맞대고 앉아 바닥을 보고 있다.


바닥엔 키보드가 벽에 부딪히며 후드득 이대리 머리 위로 떨어진,

분해된 자판알 들이 자멸한 듯 누워있다.


이대리가 김주임 어깨를 툭툭 치며 '이거 키보드에 꽂자 , 고장 안 났으려나-' 하는데,


물끄러미 보고 있던 김주임은 주섬주섬 떨어진 자판알 줄을 세운다.


"대리님 이것 좀 봐요"


S.I. B. A. L


"이게 팀장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단어라고요! 어떻게 떨어져도 이 알파벳만 떨어져요!"


"다른 것들도 떨어졌잖아.. 그래도 너도 어떻게 이렇게 맞출 생각을.."


빵-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그는 진지하다.

"전 그만두겠습니다. 이렇게 욕먹으면서는 회사 못 다녀요. 제가 잘못한 건 알지만. 저도 집에선 귀한 자식인데 벌써 한 달째 쌍욕 먹고. 아씨.. 못합니다"


"욕이 뭐라고.. 감정적으로 받지 말고 그냥 기계가 말한다고 생각해. 기계한텐 상처 안 받잖아"

그저 나른한 목소리로 달래본다.


"기계는 욕을 안 하잖아요"


"니가 일을 드럽게 못하면 욕하게 설계된 기계"


"아아 대리님. 대리님은 팀장님이 이뻐하니 이런 기분 모르는 거예요."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젓는다.


"이뻐하는 건 아니고,.. 그냥 이쁜 거지.. 거기다 일까지 잘해..."


이런 일로 나가게 둘 순 없 하다.

팀장도 욕을 워낙 많이 해서 이미 다들 피하기도 하고. 벌써 욕먹고 나간 직원만 3명.

모두에게 좋을게 없으니. 말씀이나 한번 드려볼까.


-그런데 어떻게. 뭐라고.. 내가 뭐라고.. 하..


내게 직접 벌어진 일이라면야 내 안에 떠오르는 말들을 쉽사리 꺼내겠다마는.


퇴근 무렵이 되어서야 혼자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팀장 앞에 쭈삣 서본다.


"저 잠시 회의실에서 드릴 말씀이.."


"뭔데?"

항상 짜증이 나 있다.


"저 먼저 들어가 있겠습니다"


(도망갈까)


-최대한 객관적으로 잘 얘기를 해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팀장이 들어와 의자를 당겨 앉는다.


"너 나가냐"

앉자마자.


"아니요, 팀장님, 다른 게 아니고.. 사무실에서 과하게 욕이 나오면 팀장님께도 직원들에게도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요.."


감정을 최대한 빼고 건조한 어투로 말하려 애썼다

잘잘못을 논할 위치는 아니다 내가.


그때 띵동- 문자가 울리면서 화면에 미리보기가 뜬다.


"야, 그건 그 색히가 일을 그딴 식으로.."

팀장의 뒷말이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래, 헤어지자+


읽었구나, 메일.

예상했던 일인데.

이 정도 답에는 대응방안도 준비해 놨었는데.

왜.

눈물이 나지.

안돼. 지금은 아니야 눈물아 멈춰.

제발!


주르륵-

팀장의 눈을 똑바로 보는 내 눈에서 물이 줄줄 새 있다.


김주임 욕을 마저 하고 있던 팀장이 몹시 당황한다.


"아니 내가 뭔 소릴 했다고 울고 그래? 어? 고대리 어? 왜 그래? "


그가 갑자기 인간이 된다.

그리고 나도 고대리에서 고00가 된다.


대화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엉엉 거리며 '저 첫사랑이랑 헤어졌나 봐요' 목놓아 울기만 한.

기억은 맞는 기억일까.


그 후, 한동안의 욕 휴식기간과 어색한 평화가 찾아왔다.

첫사랑과 헤어진 고대리라는 소문과 함께..


물론, 화는 그리 래가진 않는다.

사람 쉽게 안 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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