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증명을 피해봐
직장인이 되면 한 번쯤.
예상치 못한 예쁜 꽃 한 다발이 사무실로 배달되어,
-꺄~
이게 모야 모야
호들갑 떨며 부러움의 시선을 받는 상상을 해본다.
나 역시 그런 혼자만의 상상도 즐기는, 연차라는 게 쌓인 직원이 되었는데,
어느 날 예상치 못한 꽃다발이 아닌 우편을 받아 들게 되었다.
내. 용. 증. 명
네 글자의 제목이 굵은 글씨였던 우편 한통.
분실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국내 중견기업의 로드쇼를 맡았다.
유럽을 옮겨 다니며 진행한, 약 이십여 일 간 진행되었던 로드쇼가 마무리되는 영국의 한 전시장.
그 마지막 날이다.
평소 인사도 잘 못할 정도로 수줍음 많던 업체담당자가 웬일로 먼저 나를 부르는 손짓을 한다.
"네, 연구원님"
서둘러 달려간다.
"저희 전시품 하나가 없어졌는데요"
평소의 차분함과 달리 안절부절 해보이는 그다.
"네? 전시품? 어떤 물건이요?"
바로 어제, 나는 이 부스를 두 시간 정도 지키며 서 있었다.
업체의 다른 담당자가 전시 마감시간을 두 시간 남기고 급하게 나가야 한다며 내게 맡겼던 이유였다.
"없어진 게 어떤 건가요?"
이런 경험이 많지 않은 나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아. 소형 배터리 같이 생긴 건데.. 하..."
입술을 잘근거리며 대답한다.
"얼마나 작은 건지.. 어떻게 생긴 건지 카탈로그라도 있나요?"
다 붙어있는 부속품만 다르지 내 눈에 모두 같은 물품처럼 보였다. 중요한 건 모두 손가락만 한 크기였다는 거지만...
숙소로 돌아와 업무정리를 하는 동안 문자가 도착한다.
없어졌다는 물품의 사진과 품명이 적힌 리스트.
연구원이 보내왔다.
-어디 보자.. 얼마 짜린가..
서류를 뒤적여 신고 목록을 본다.
전시품은 항상 한국에서 미리 보험을 들어 분실에 대비하고 있다.
응?
전시품 신고목록상 물품의 가치가 너무 낮다.
USD1.00
그렇게 비싼 건 아니구나..
그래도 일단, 함께 출장 간 팀장에게 분실을 보고 하며 전후사정을 더한다.
"아 거 뭐 보험 처리해 줘 그런데 1불짜리 보험 처리하면 처리비가 더 나오겠네"
그게 무슨 별일이냐는 듯, 귀찮은 말투로 대꾸하는 팀장.
(그런가. 별일이 아닌가.)
"네.."
그런데 뭘까.
이 불길한 예감은.
경고
그리고 귀국 후 내 손에 수줍게 놓인,
내용증명 봉투.
태어나 처음 받아 본 공문서다.
그 순간까지도 내용증명이 정확히 뭔지도 잘 몰랐다.
옆에서 흘깃 본 선배가 소송 전 경고장 같은 거라고 말해주기 전까진.
-고맙다 선배.
한 장을 꽉 채운 법적 문구가 많았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 물품은 개발 후 아직 시장에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그 가치는 2억에 준한다+
"물건 못 찾으면 2억 소송 건다는 경고야"
- 참으로 고맙다 선배
나는 이제 막 회사에 취업한 것과 마찬가지다.
연차라 해봐야 이제 2 라고 겨우 숫자를 붙일 수 있다.
하루살이 인생, 하루 벌어 하루 살고.
모아놓은 돈이라야 통장에 20여만 원..? 입니다만.
항상 모든 건 알아서 결정하고 알아서 책임진다는 팀의 분위기는 잘 알지만,
2억 만큼은 상부 보고에 들어가야 할 듯하다.
그렇게 종이 한 장을 들고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오후 시간을 보냈다.
"어쩌라고?"
팀장.
"음 고대리가 실수한 거니까 고대리가 책임지는 방향으로 답변서 만들어봐야겠네"
본부장
"팀장한테 물어봐야지 뭘 나한테까지 가져와"
이사.
회사생활도 오늘이 마지막인 듯하다.
문제가 발생하면 답도 있어.
나의 실수?
2억이 '실수'라는 단어가 붙을 만한 금액인가?
나는 회사에 소속되어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인데,
보호받지 못하는 개인일 뿐인가.라는 생각이 스친다.
다른 데서는 어떻게 하는지. 비교할 만한 경험도. 인맥도 없다.
자리로 털썩 쓰러지듯 앉자,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 기름을 흘린다.
"와... 팀장이 그렇게 나올 줄은 알았지만, 직접 들으니 소름 돋네"
"..."
"이거 해결 못하면 회사랑도 한 판 붙어야 하는 거 아니야? 고주임 자신 있어?"
-야.라고 불러도 되냐
"이렇게 큰 회사랑은 소송으로 붙어도 확실히 질 걸. 우리가 책임 없다 해도."
-선배, 제발 좀 닥치시라고요...
'소송'이라는 단어는 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없어야 할 단어인 줄 알았다.
더더구나 숫자 '2억'이라는 단어는 나도 잘 살아내 볼 거야. 하던 사회 초년생의 실낱같은 희망마저 앗아갈 수 있는 숫자다.
-상황에 속고 있을 순 없어. 뭔가 방법이 있어.
(아냐, 없을 거야.)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만 굴리고 있을 순 없다.
할 수 있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그건.
몸이 뛰는 것.
다시 기본으로 가본다.
나는 급하게 회사를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일단, 창고부터.
전시회 종료 후 반송된 물품들이 오늘 오전에 창고에 도착했다 들었다.
창고로 가는 40여분이 한 계절 지나듯 땀이 차올랐다 식어간다.
"아니, 고대리? 연락도 없이 여기까지 왔어?"
언제나 고대리가 제일 잘해. 말해주는 창고 명 과장님이 놀라며 묻는다.
난 창고까진 잘 나타나지 않는 직원이다.
-과장님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에요.
왠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지만, 그럴 때가 아니다.
"과장님, 정말 죄송한데, 저랑 물건 하나만 찾을 수 있을까요? 아니, 꼭 찾아야 돼요."
"뭐? 지금? 설마 이 많은 걸 다??"
물건들은 웬만한 아파트 현관방 하나는 꽉 채울만한 공간에 가득 쌓여 있었다.
그것도 모두 나무상자로.
즉, 나무상자를 먼저 드릴로 모두 해체한 뒤, 그 안에 있는 종이박스들을 다시 다 열어 뒤져봐야 하는 막노동.
그 손바닥도 아닌 손가락만 한 제품 하나 찾기 위해.
-그 물건이 과연 여기 있을까? 나에게도 그런 행운 같은 일이 올까.
자신 없다.
나는 그다지 운수 좋은 인간형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럴 때 생각이 많은 것은 어차피 도움이 안 된다.
그저 계속 몸을 움직여 찾을 뿐이다.
찾아내야 한다.
그다음 같은 건 몰라.
배도 고프지 않다.
하지만, 이미 밖은 까만 잉크가 뿌려진 사이로 별빛만 비추고,
지친 명과장은 창고 직원 두세 명을 더 불러 도움을 청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이 일도. 끝이라는 게 날까.
어떤 식으로...?
이제 끝인가 봐, 하고 포기의 마음이 고개를 내밀려한다.
그때,
이런 것까지 열어봐야 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던,
박스 안의 작은 박스, 그 안의 더 작은 박스, 그 안에 비슷해 보이는 두 물품이 서로 내 자리라 주장하며 부둥켜안고 있는 그 모델. 밤새 외우고 있던 시리얼넘버와 매칭된다.
"아.. 아.. 아!"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과장님! 이제 그만해도 돼요!"
손목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다.
아침인가 보네.
"과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부족하다.
그리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더없이 행복하다.
"아휴, 고대리. 나 이제 집에 가도 되지?"
"얼른 가서 주무세요. 내일 다시 얘기해요 과장님"
죄송함이 넘실댄다. 기쁨만큼이나.
"아이고 고대리... 그거나 닦아"
-이런 일로 안 울 건데.
하고 눈을 쓱쓱 닦는데,
과장님이 안쓰럽다는 듯 휴지를 내민다,
"눈물 말고 코피..."
생에 첫 코피.
사무실 안의 누구도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
왜 함께 해주지 않았냐고 원망하지 않아도 된다.
기뻐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에
나는 그저 감사하다.
그렇게 서운함을 잊는다.
나는 계속 일해야 하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