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의 무게
회사는 친목이 목적인 모임이 아니다.
취미로 무언가를 배워보는 동아리 성격의 모임은 더더욱 아니다.
직원들과 사적으로 얽히는 것은 지양한다.
나는 무게감 있는 상사가 될테다.
거.리.두.기.
이제 X가 된, 전남친에게 선물받았던 꽃 일부를 말려놓은 잎이 거의 떨어지고 마지막 남은 한장이 간신이 매달려 있는걸 보았던.., 봄의 문턱.
"이제 고대리도 슬슬 막내 팀원 받아야지?"
"부하직원 필요없어요"
잘 키울 자신 없어 'NO.' 를 외쳐봤지만, 시스템에 개인의 의견은 없다.
그렇게, 수시로 들어온 몇 신입 중 한명이 기어코 내 밑으로 배정되었다.
어리숙해 보이는 외모에, 툭 치면 툭 눈물이 떨궈질것처럼 유난히 눈이 반짝거리던 아이.
-저는 웃는건데 사람들이 자꾸 우냐고 물어봐요
하고 수줍게 말하던 그녀의 이름은 미지였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가르쳐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항상 너 손에 우리 회사 사활이 걸려있다고 생각하고 잘 하면 돼"
무심히 말한다.
"네? 제 손에..왜.?"
신입이나 대리나 도찐개찐일진데, 내가 뭐라고..
시간 지나면 다 익숙해져. 하는 생각에 쌓이는 이메일이나 익히게 하던 날들 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어느날, 무슨말을 보태줘야 저 잔뜩 긴장한 어깨를 풀어 여유있고 유연한 사고를 하게 할 수 있을지 슬슬 고민이 들 즈음, 서울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업체와의 미팅이 잡혔다.
-외근에서도 배울게 있으니 함께 가봐야겠다.
이제 막 출고되어 새 차 냄새가 빠지지도 않은
나의 인생 첫 차와 함께 출근,
십일째 되는 날 이었다.
면허증이 따끈했다.
(앗, 뜨거)
물론 굳이 뉴 카라는 말도, 막 면허를 땄다는 말도
사적인 얘기는 굳이 하지 않는다.
거.리.두.기.
말없이, 하지만 능숙한 베테랑 운전자 인 척, 조수석 문을 열고 미지를 태웠다.
"가보자, 꽉잡아"
(아니, 꽉잡아는 왜,,, )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숨겨왔던 나의 운전실력. 개봉박두.
대리님, 살려주세요
업체에 무사히 도착해, 주차를 하려다보니, 어라? 땅이 약간 앞쪽으로 기울기가 있다.
하지만 연습대로 주차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한시간여의 미팅까지 완벽했다.
일진이 좋다.
오후 5시 즈음을 가르키는 바늘, 복귀가 애매한데,..
하며, 일단 키를 꽂고 사이드를 푼다.
그렇게 후진을 위해 기어를 R에 놓고 엑셀을 스무스 하게 밟는 순간의 일이었다.
(기분 탓 인가?)
어어? 자꾸 차가 앞으로 간다.
브레이크를 급하게 밟았다.
"미지야, 차가 이상해"
나지막히 읊조린다.
"네?"
동그란 눈망울이 더욱 똥그래진다.
기어가 R로 가있는것을 재차 확인 한 후 조심스레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려는데,
악, 다시 차가 앞으로 간다.
이제 바로 앞 가벽까지의 입맞춤이 몇미터 남지 않은것 같은데,..
-이게 무슨 경우야?
본넷 너머로 본 앞 거리는 더욱 짧아보였다.
"미지야, 너 내려"
"제가요?"
"미지야, 차 앞으로 가서 뒤로 좀 밀어봐"
"네네?"
일단 내려서 문을 닫더니, 고개를 숙여 창문 속 내 눈을 마추며 조심스레 묻는 미지.
"저, 대리님,, 이거.. 대리님 차 맞아요?.."
-아놔
"(끄응) 차가 자꾸 앞으로 가니까, 앞에서 더 못가게 막아 보라고, 뒤로 좀 밀어볼래?"
"네에? 제가 힘이 그렇게..."
미지는 겉옷과 가방을 주섬주섬 차안에 내려놓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망설이다 이내 마음 먹은 듯 손을 범퍼에 올려 밀기 위한 포즈를 취했고,
나는 조심스레 다시 브레이크를 슬쩍 떼는 순간
"으아악!!"
"왜,왜그래 미지야? 왜,왜 다쳤어?"
"아니요, 아직요, 대리님, 그런데 더 앞으로 나오면 제 무릎 나갈꺼 같아요 대리님. (살려주세요)"
이건 분명 웃는게 아니라 울것 같은 표정의 그녀이다.
하..그래. 일단 다시 키를 뽑은채 우린 둘다 차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차가 문제인거야.
그때 뒤에서 한참을 우리를 보고 있었던 듯한 수위아저씨가 차 쪽으로 걸어왔다.
"아가씨, 지금 뭐해요?"
"아, 네 차 지금 빼려고 하는데 자꾸 앞으로만 가요. 이거 뽑은지 얼마 안됐는데...차가 불량인가 봐요..."
"응? 아가씨 다시 시동좀 켜봐봐"
"아, 아저씨 차 잘 아세요? 그럼 좀 봐주세요,"
하며, 다시 키를 꽂는 순간 또 차가 앞으로 가려고 한다.
"아저씨 이것좀 보세요, 어떻게요? 아.."
"아가씨... 시동을 좀 켜..."
(부릉, 부르르릉)
엔진소리를 내며 시동이 켜지자, .. 후진이 된다.
"응??"
상사와 거리두기
감사하다고 고개절을 10번은 더하고 겨우겨우 주차장을 나와 이내 연결된 고속도로에 올랐다.
지하철을 타겠다고 역에 세워달라 조심스럽지만 두번 세번 말하는 그녀에게,
이런 초보 같은 이미지로 남을 순 없다는 생각으로 집앞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말을 던졌다.
-고속도로야 엑셀과 브레이크만 잘 밟고 떼고 하면 되니까.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굵은 빗방울 몇 개가 앞유리를 때리는가 싶더니 금새 장대비의 성질로 바뀌어 세차게 두두두둑- 유리가 뿌예지기 시작했다.
초보운전자의 시야도 흐려진다.
"대리님.. 저 그런데요.."
"응 얘기해"
(이제 충분히 진정됐다.)
"사이드미러는 일부러 접고 가시는거에요?"
아아아아아아악-
평소 오토로 해놓고 다녀 크게 신경 안썼었는데, 그날따라 주차하며 수동으로 사이드미러를 접어놓았던 것을 잊고... 달리고 있었다.
(어쩐지 옆 차선이 잘 안보이더라.)
"응? 아... 미치겠네 이거 왜 접힌거야. "
"빨리.. 다시 펴셔야 할 것 같은데"
"어...뒤좀 계속 봐줄래?"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운전자석 유리창 아래의 버튼에 손을 대고 꾹 누르는 순간,
오른 쪽 창문이 쑤욱-
"악! 대리님 비 들어와요!"
"당황하지마!"
"제가요?"
"저기... 그 사이드 미러좀 손으로 밀어서 펴볼래?"
"네? 아니 근데.. 비가 너무 세게와서...그리고..이게 손으로 밀어도 되는거에요?"
거리두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건 내가 아니라 그녀 일 듯 했다.
"미지야 당황하지말고"
(그건 제가 아니라..)
"손 좀 내밀어서 뒷 차가 보이게 싹싹 빌어봐"
"네????"
"아 이제 오른쪽으로 빠져야 하는거 같은데 차선을 못바꾸겠어..이러다 부산가는거 아니겠지?"
"대리님......."
(우리 다신 같이 나오지 마요)
좁혀진 거리
미지는 엄마가 본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거라 말하는 것과 동시에 두 손을 내밀어 싹싹 빌며 오른쪽으로 가겠다는 몸의 언어를 필사적으로 했다.
입사 후 첫 미팅이라고 봄 햇살 같이 입어봤다던 그녀의 원피스가 여름날 비 쫄딱맞은 강아지털처럼 어깨에 찰싹 달라붙어 버린 봄 밤 이었다.
무슨 일이든 반드시 끝은 있다.
악몽이라면 악몽일 수 있던 그날의 운전도 도착이라는 것을 했고,
그날 저녁 , 우린 그녀의 집 앞이 아닌,
나의 집 거실에서 마주 앉아있었다.
차선변경 시도만 몇번의 끝에 빠져야 할 곳에서 빠지지 못하고, 그나마 몇 번 해봤다고 익숙해진, 집으로 오는 길로 차를 돌린 탓이었다.
"내가... 택시비는 줄께. 밥 먹고 가 응?"
식탁에 앉으며 물었다.
"네.. 대리님.."
"괜찮아, 원래 회사생활이란게 이런일 저런일 다 생길 수 있는거야..."
하지만 눈빛에 생기가 없다.
"아니에요, 재밌었어요 하..하.."
겨우 웃어보이는 그녀였다.
-오늘은 맥주좀 마시자!
"술도 줄께!"
"네... 대리님, 저 그런데,,대리님과 일하면 항상 이렇게 사활을 걸어야 하나요...?"
우리는 한 배야.
씨익 웃어보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