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찾아온 자리.
직장 내에서, 또는 거래처 간에 수많은 사람들과 옷깃을 스치게 된다.
하지만,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재미있거나 낙담하는 일도, 나는,
그 어떤 감정도 그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는 내 개인의 인생에 필요한 '돈'이란 것을 만들어 주는 장소이고,
그 안에 만들어지는 업무, 관계, 사람 이란 그 돈벌이의 '수단' 일 뿐이다.
감정의 공유란 결국,
단단히 일하고 싶은 나를 약하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했다.
두바이는 50도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두바이의 날씨는 50도를 찍고도 계속 최고 온도를 경신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일하고 있는 이곳, 전시장 뒤편 에어컨도 없는 좁은 창고는 이미 체감은 50도를 훌쩍 넘은 듯하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옷이고 머리카락이고 흠뻑 젖은, 마치 추노의 몰골이 된 직장인 둘이 한참을 말없이 일만 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몇 시예요?"
묵묵히 작업만 하던 심대리가 마침내 침묵을 깬다.
시계를 확인하기 위해 들어보는 팔에도 힘이 빠져 부들부들 한 지 오래다.
"아.. 지금이 한시.."
목소리에도 힘이 없다.
"대리님 먼저 들어가요."
"아니에요. 저도 마무리 같이 하고 같이 가야죠"
"정말 괜찮아요. 여잔데 지금까지 버틴 것도 대단한 거예요"
진정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데도 무릎이 떨리고 있는 건 처음이다.
"남자인 대리님도 하는데, 여자인 제가 더 해야죠."
"하하 그럼 더 해요"
심대리는 안 말리는 사람이다.
한 시간여 만의 대화도 금세 까무룩 지는가 싶더니,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부스 쪽에서 다시 우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저 여기요, 이번엔 모델 BDG-1!"
내일 오픈할 전시회에 보일 물품을 계속해서 바꿔가며 테스트 중이다.
조금 킹 받는 건, 분명 테스트했던 제품인데도 가져가라 다시 가져와라 다시 한번 가져와라를 수십 번 반복하고 있다는 거였는데 거기다 자꾸만 반말과 존대를 섞어 부르는 업체 담당자이다.
"제가 죽일까요?"
죽을 것 같이 힘들다 보니, 죽이자 농이 나온다.
"크크 참아요 대리님."
"대리님은 남자라 유력한 용의자가 될 테니 여자인 제가.."
새벽 세시가 넘어서야 테스트가 마무리된 듯, 대부분의 업체 담당자들은 숙소로 돌아가고, 여기요 저기요를 외치던 담당자와 그의 부하직원 인 듯한 안경 낀 모범생 스타일의 남직원만 남아있었다.
"아이씨, 미친 신발, 이거 왜 종이박스 아직도 여기서 뒹굴거려?"
(그래 쉽게 보내주진 않는구나.)
"아 죄송합니다, 금방 치울게요"
작은 종이 조각을 주워 빠르게 주머니에 구겨 넣는다.
타인의 말투에 늘 무던한 나 지만서도 우리 회사식구도 아닌 타인에게 욕설까지 듣는 것은 금세 마음이 긁히는 듯 한 기분이다.
단단한 아이
이튿날이 되어서야 겨우 자유 시간이다.
오늘은 핸드폰의 SIM을 두 바이용으로 바꾸기 위해 통신매장에 들렀다.
두바이 출장은 처음인지라 기웃기웃 헤매고 있는 중에 누군가 나를 빤히 보는 게 느껴진다.
"아, 저.. 저희 전시회 도와주시는 분 아니세요?"
두바이에서 한국말?
뜨끔해 돌아보니,
전시오픈에 3시까지 막노동시킨 참가업체. 그때 한편에 서있던 그 안경이다. 직접 힘들게 한 건 없었지만 욕설도 내뱉던 담당자의 부하직원이니 왠지 피하고 싶다.
"네, 과장님 지금 전시 중 아니세요? 여긴 무슨 일로."
"아 저희 내일부터 임원분들 오시는데 두바이 현지폰을 여러 개 사둬야 해서 혼자 나왔어요, 대리님은 무슨 일이세요?"
"전.. 전 그냥, 그냥 왔어요. 이제 가려고요"
"저도 휴대폰만 사면 되는데, 그럼 점심이라도 같이 하실래요? 어제 고생도 하.."
"아, 아니요! 저 지금 빨리 전시장으로 오라고 연락이 와서, 그럼 나중에 뵐게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한 건 미안했지만, 괜히 밥까지 먹을 사이는 아니다.
(으. 생각만 해도 불편하다고.)
여전히 뒤쪽 어딘가에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내 발걸음을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간다.
자라는 맛있어?
오전에 심대리로부터 받은 번호로 콜택시를 불렀는데, 땅이 넓어서 그런지 십분, 이십 분이 지나도 택시는 나타날 생각을 안 한다.
애꿎게 발로 땅이나 콩콩 차며 기다리고 있는데, 저 앞에 보이는 실루엣..,,
-혹시 안경?
(놉, 안돼)
확 뒤돌아보지만, 택시를 기다리는 장소는 내가 서 있는 곳 하나뿐, 이내 가까워진 안경이 다시 말을 걸어온다.
"아직 계셨네요 대리님? 대리님, 맞으시죠?"
내 앞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묻는다.
"네,, 대리 맞아요.. 택시가 안 오네요.."
"아.. 저는 저희 회사에서 빌린 차가 있어서.. 곧 올 텐데, 그럼 전시장까지 같이 가시죠"
(전시장 말고 숙소 가려고 했다고... 너 때문에 SIM 도 못 샀다.)
"전 괜찮은.."
리무진이라도 해도 손색없을 까만 벤 한대가 소리도 없이 우리 둘 앞에 서고 있다.
서둘러 휴대폰을 열어 택시취소 버튼을 눌렀다.
"그럼, 감사합니다."
열어주는 문 사이로, 그분 마음 바뀔세라 냉큼 올라탄다.
"두바이는 자주 오세요?"
"아뇨. 처음이에요."
"와아- 저희 전시 때문에 처음 오셨구나. 두바이 저는 벌써 10년째 오는데 정말 좋아하는 나라 중 하나거든요."
"네.."
-분명 어제만 해도 말수가 없다 없다 해도 그렇게 없을 수도 없는,, 존재감 없던 분이셨는데...
"지금 점심은 바쁘시면 저녁 같이 하실래요? 저도 오늘은 좀 시간이 나서 자라 좀 사고 일찍 들어올 거라서요. 숙소, 저희랑 같은 호텔 맞으시죠?"
"아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
"그러시구나. 그럼 자라 사러 같이 가실래요? 전 두바이 올 때마다 자라 꼭 사거든요"
(두바이가 자라가 유명했던가? 부자들의 나라라더니 보양식도 급이 다르네.)
"아뇨,, 전 별로.. 그런데 몸 생각 많이 하시네요. 하하.."
(아직 젊어 보이는 데.)
"네? 아뇨 특별히 그렇진 않은데,???"
그러고도 이제야 말할 수 있는 상대를 찾은 건지 쉴 새 없이 얘기하는 업체 과장을 보며,
그래도 갑이라고 다 갑질하는 건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갑질할 거였으면, 나한테 쉬지 않고 말을 하라 했겠지...?)
괜히 전시장에 간다고 해서, 돌고 돌아 숙소에 들어오니 이미 해가 중천이다.
잠시 눈을 붙여볼까.
-왁.
내 소리에 내가 놀라 벌떡 일어난다.
6시...
어쩐지 배가 고팠어...
도저히 저녁까지 택시 탈 의지는 나지 않는다.
호텔 근처에 돌아다니며 조금 저렴해 보이는 식당을 찾아 나서보기로 한다.
루프탑은 예뻤다
터덜터덜.
아는 업체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나름 검정 옷으로 전신을 가리고 후드까지 올려 썼다.
-이 정도면 아무도 못알아보겠...!
"아, 고대리님?"
(이러지 마, 제발., 하루에 이 정도 우연이면 영화라도 찍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대리님, 식사하셨어요?"
"네? 와.. 과장님. 여기에도 계셨네요..? 전시는 끝나셨어요?"
"네, 그런데 저는 오늘 마지막까지 안 있어도 돼서, 일찍 나왔죠, 식사하셨어요?"
(이제 막 나왔다)
"네. 먹었죠... 이제 들어가는 길이었어요.."
"오 , 잘 됐네요? 여기 바로 옆에 진짜 괜찮은 루프탑 바 있는데, 한번 가보실래요? 저 두 바이 올 때마다 가는 덴데 분위기 정말 좋아요."
(이 정도 성의면.. 가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네...."
도살장 가쟀냐구..
몇 분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바로 여기라고 가리킨다.
여기.. 진짜 비싼 호텔 같은데??
고개를 올려도 끝이 없어 보이는 높은 건물에 외관도 꽤나 세련됐다.
두바이의 블링블링이라는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거기다 듣기만 했지, 실물로 한 번도 본 적도 없던 샛노란 마세라티도 앞에 주차되어 있다.
"우와! "
속으로만 생각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감탄이 입 밖으로 나온다.
"아 두바이는 부자들이 많아서, 생각보다 슈퍼카 흔하게 볼 거예요. 들어오세요. 여기 꼭대기예요."
"네네, "
이쯤 되니 같이 여행 온 동반자 느낌이다.
늘 이런 낯선 건물에 들어설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드는,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내밀 때쯤, 한참을 올라간 옥상에서 띵동 하고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내 앞에 펼쳐진 풍경에 다시 한번 탄성을 내뱉었다.
-와아.....
호텔 옥상을 야외카페로 변신시킨 그곳은 문을 열자마자 JAZZ JAZZ ALL THAT JAZZ!
부드러운 재즈의 선율이 공기를 휘감고, 중간중간 붉은 조명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거기에 언뜻 보아도 포옥 감기고 싶어지는 푹신한 소파 그 위 이미 자리한 몇몇 손님은 눕거나 앉아서 둥그런 와인잔 또는 맥주병을 들고, 말 그대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저 많은 사람들 얼굴 위에 번져있는 여유. 그 미소.
누구라도 들어줘
유독 까만 밤하늘,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별, 서울에서 난 저런 별을 본 적이 있던가.
아니, 하늘을 이렇게 오래도록 올려다본 적이 었었던가.
난생처음 올라온 루프탑 JAZZ BAR의 조명들이 마치 음표처럼 이 공간에 그려진 듯한 착각이 들었고, 분위기의 힘은 무서웠다.
오늘은 무슨 말이라도 떠들고 싶다.
쉬고 싶다
고되다 느꼈던 하루를 보상받고 싶다.
누구라도 들어줘-
"여기.. 정말 좋죠? 대리님도 한번 보시면 좋을 것 같았어요, 여기 아는 사람 잘 없거든요"
"과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데려와줘서 정말 감사해요!!!"
그날 우리는 많은 대화는 하지 않았다.
아니, ,, 했던가,,?
그는 대치동 보이로 어떻게 공부해 대기업에 들어가게 되었는지까지 과거를 읊어주었고, 그러다 한동안 락에 빠져 방황했던 시간이 있었다는 것과 그 시간에 만났던 사랑하는 여자가 얼마 전 해외로 유학을 가서 본인도 일을 그만두고 따라갈 고민을 한다던가,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도, 누구라도 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대리님은 어떻게.. 남자도 힘든 일을 하게 됐어요?
-그런 거 묻지 마요...
-네..
-남자도 체격이 다 다르고 체력도 다 다르잖아요.. 그럼 남자도 본인이 가진 체력적 한계보다 더 힘든 일은 항상 있다는 건데, 마른 남자, 작은 남자 구분 안 하는 것처럼 일의 기준이 여자 남자일 필요는 없는 거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남자판인 이런 시장에선 살아남기 힘들었을 텐데..
-그거 알아요?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자는 더 잘한다는 거.
-잘 모르겠지만, 잘 알아듣는 걸로 해볼게요
-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면 돼요. 그냥 피시방 다닌다~하고.
자꾸 생각하면서 어렵게 정의할게 뭐 있어요. 다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네.. 그래도.. 대단하네요.
-그러게요. 대단하지 않은,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저는 떠나려고요. 일이 잘 맞는 것 같지 않아요.
-정말 속 편한 소리 하시네요, 사람은
머리와 가슴. 이 사이, 이 사이에 목이 있잖아요
이 목이라는 거 때문에 머리로 아무리 생각한들, 가슴이 아무리 얘기한들, 어쩔 수 없이.. 그냥 일 하는 사람도 많아요. 내 힘으로 끝까지.. 먹고살아야 하니까.
-아.. 머리와 가슴 사이..
-여하튼 과장님은 그래서 피부가 좋은가 봐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자라도 많이 드시고
-아, 그런데 아까부터 무슨 몸 얘기랑 , 자라 먹는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아까 낮에 두바이 올 때마다 자라 사신다고 했잖아요
-아? 그 자라는.. 옷 브랜드인데...
네에에???
그리고 얼마 후, ZARA 1호점이 한국에도 론칭했다. 정말 거짓말 같은 실화.
뜻밖의 공간에서 낯선 사람이 주는 위로.
한숨을 돌리게 해주는 공기, 밤하늘, 재즈.
나를 내려놓는데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