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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과 구두닦이

강자와 가해자

by 아는개산책


늦었다고 생각들 땐 이미 너무 늦었다.


순간 눈이 번쩍 떠진다.

침이 8시30에서 31로 겨가고 있다.

시계는 의리가 없다.


며칠 후 소개팅을 위해 사놓은 아이보리색 뾰족구두.


-일단, 이거라도 빨리.


또각 또각 , 아니 또또또똑 또또똑똑

발걸음을 재촉한다.


확실한 운동부족이다.

숨을 한번에 모아서 내뱉어야 할 것 같은 상태로 지하철 계단 마지막을 겨우 밟았다. 그런데 마침 허리도 다 지 못한 채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지하철 입구로 들어오는 할머니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득히 펼쳐친 계단을 앞두고 아효..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다.


"할머니, 제가 도와드릴까요?"

이러라고 난 지금껏 건강한거다.


"아니, 괜찮은데,,,"

하면서도 이미 내 앞에 짐이 놓여진다.


짐을 훅 들어 올려 올라왔던 오십여개의 계단을 한번의 심호흡 후 다시 내려가기 시작한다


-지각이던가.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친다.

이제 내 발걸음은 조금씩 빨라지다 거의 반쯤 뛰시피 하고 있다.


"응?"


분명 조금전까지 허리도 잘 펴지지 않던 할머니가 무서운 속도로 를 지나치고 가더니 오히려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이고 아가씨 됐어 고만 짐 이리 줘도 돼"


뻘쭘한 마음에 아 저,,, 하는데 이미 짐을 들고 지하철 개찰구 쪽으로 빠른 걸음 으로 들어가버린다.


-아.. 훔쳐가는 줄 아셨나?


흐음.. 뭐 ok


하고 다시 뛰자 생각을 하고 계단을 올라서는데,


삐긋- 뿌각-

나 먼저 간다 '굽'



조심해야지 생각들 땐 이미 너무 늦었다


"선배, 나 담주 소개팅인데 내 구두 좀 봐"

"아이고야 구두도 가고 남자도 가고"

"돈도 가고 체면도 가고"


실없는 아침인사 속 구둣방 아저씨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 작게 속삭이며 른 손으로 저요!의 몸짓.

부러진 구두굽의 소개팅용 구두를 내민다.


"이따 찾으러 갈께요, 잘 부탁드려요"


알았다는 듯 휙휙 하는 손짓.

아저씨는 늘 말을 아낀다.


"고대리는 거의 맨날 구두 맡기네?"

"선배도 좀."

"신발은 그냥, 이렇게 휴지로 응? 이렇게 쓱 응? 쓱 닦으면 되지, "


"그래도 저 연세에 저렇게 구두 수거하면서 다니시는게 .."


(안됐잖아,,)

하마터면 어설프고 건방진 동정의 말을 뱉을 뻔 했다.


"아무튼, 난 저렇게 열심히 사시는 분들한텐 절대 돈 깎지도 않고, 최대한 많이 이용하는게 내 맘도 편해"

"그래? 그런데 저 아저씨,.. 고대리 아직 몰라? 이번에-"


하는데, 나의 홍색 햅틱이 진동한다.


"저 여긴 법원인데여, 혹시 고@@씨 맞습니까?"

"어디시라고요?"


때론 자신이 상황을 인식도 하기전에 본능적인 위기감이 들때가 있다. 하지만 늘 편안한 일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몸 주인을 아는 뇌는, '아니 별일 아니야 믿어도 될거야' 라는 속삭임으로 거짓 안심을 시킨다.


그렇게 1년간 부어 만기되었던 적금 600만원을 송금 했고, 뒤늦게 보이스피싱 이라는 걸 알았다. 보이스 피싱이라는 단어조차 생소 할 때의 일이다.


조심해야지 했을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구두닦이 아저씨와 보이스피싱범


"구두 됐어요?"

목소리에 힘이 없다.


말없이 아직 손질하고 있는 구두를 들어보인다.


"하..아직 멀었네..."

"......"


두 손으로 의자를 짚으며 일어난 듯 앉은 듯 허리를 곧추세우고, 열린 문 사이로 바깥 평범해 보이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아저씨의 손 움직임에 시선을 멈춘다.


"아저씨 보이스 피싱이라고 들어봤어요?"

회사에선 누구에게도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나의 굴욕적인 , 아니 그보다 더 정의하기 힘든 감정을 겪었던, 며칠 전 보이스피싱 얘기를 꺼낸다.


"......"

묵묵히 구두만 닦고 있는 거친 손.


"왜 저였을까요.."

바빠보이던 손이 순간 멈춘 채 눈을 마주쳐 주신다.


"똑똑해 보이는 아가씨가 ... 어쩌다 그랬대.."

이내 다시 구두쪽으로 시선을 옮기는 아저씨.


"휴,,,"

속으로만 삼킨채 더 긴말은 하지 않고 다시 문 사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표정을 따라간다.


20여분이 흘러도 구두를 쥐어줄 생각을 안하는 아저씨를 뒤로 퇴근 후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긴다.




마우스를 흔들며 모니터를 깨우는데,

네이트온 채팅으로 졸업후 한번도 연락한 적 없던 친구 아이디로 대화창이 깜빡이고 있다.


- 나 지금 급하게 수술해야 하는데 백만원만 빌려줄 수 있어?


이건 또 무슨 기시감.


대답이 없으니 한번 더 채근한다.


- 나 정말 급해서 그래, 내일 바로 갚을께 계좌 보내도 되지?


- 나 얼마전에 이미 너희쪽에 기부했어.. 그거 보고 연락했니?


이번엔 상대쪽에서 말이 없다.


-있지.. 내가 너희 살림 보태준 김에 한마디만 더 하자.. 아니 왜 나처럼 쭈굴이 가난뱅이를 뜯어먹어? 하루종일 써도 다 못쓸 만큼 돈 많은 사람 천지고, 세금 안내고 깔아뭉개고 있는 사람 천지야.


아직 남은 분노가 있어 채팅창을 꺼버린다.

그때 다시한번,


-이렇게 사는 나도 힘들다.


(뭐라는거야?)

조용한 사무실 안에 나도 모르게 아씨, 하는 탄식이 나온다.


-넌 시스템을 몰라. 난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지금 내 동생도 같이 묶여있어서 내가 돈을 벌어야만 한끼먹고 산다.


-야..나도 혼자 하루 벌어 하루 겨우 먹고 살아. 반지하에 살면서 햇빛도 못보고 산다.


-너 왜 거짓말해? 너 00오피스텔 0동 2층이잖아.


섬뜻.


-나도. 내가 오늘 왜 이런 말까지 하는진 모르지만. 할당량 못채우면 나랑 동생은 오늘도 굶어야 돼.


-다 선택이야. 찢어지게 가난해서 위장이 찢어져도 사람은 선택 이란걸 할 수 있어.


-그래. 너처럼 배부르게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말 할 수 있지. 선택 이란것도 사치 라고 생각하는데, 난.


할 말을 잃었다.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다양한 삶의 방식같은건,

내 위에만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다.


(그래도 범죄는 범죄야.)


-다 핑계야. 너네가 전화한통으로 가져간 그 돈이, 우리도 하루하루 피땀으로 일해서 어렵게 모은거야. 모르겠어?


-모르지. 난 일 해 본적이 없어. 그럴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학교도 한번도 다닌 적 없는데?


그냥. 알고 싶지 않은 세계였을까.


화가 치솟았었는데 분명.

사정을 들으니 공감해버리게 되는 아이러니.

범죄는. 범죄야.


시계를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곧 점심시간..


-나 이제 나가야돼. 그리고 난 돈 없어. 다신 찾지 말아줘.


-고00. 들어줘서 고마워.


-그런식으로 말하지마. 친구도 아닌데.


-ㅋ.그렇지. 너가 쓰는 아이디, 전화번호 다 바꿔라. 이미 한번 노출되서 데이터에 남아있어. 언제 또 연락 갈지도 몰라.


-안바꿔.


-흠. 내가 삭제할 방법이 있나 찾아볼께. 넌. 잘 살아라.


LOGOUT-

아이디를 바꾼다.



누가 누굴 동정해


기분이 묘하다.

나에게 마음먹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진 않다.

하지만, . 역시. 사람인건가..

지금 이 감정을 분석하려 하는 건 위험한 느낌이 든다.


오후 내내, 일을 하는지 되는지도 모르게 컴퓨터 앞에서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리, 대리,, "고대리!"

퍼뜩, 하고 옆을 돌아본다.


"뭐야, 몇번 불렀는데, 나 오다가 구두 사장님 만났어, 고대리꺼 다 됐대"


"아, 고마워요 선배"


"참, 고대리 그거 알아?"

자리에 앉는 그의 손에, 커피가 한잔 밖에 없는 것을 멀끄러미 보게 된다.


"나 얼마전에 그거 들었어, 구두 사장님.. 건물주래"

자리에 앉으며 은밀히 속삭인다.

확실한 정보라는 듯 눈은 더욱 크게 힘을 주면서.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집 나간 정신이 돌아온다.


"몰라, 영업력이 좋은건가? 여튼 이구역 다 그분이 하잖아, 아침부터 계속 사무실 돌면서 구두 받아가시고... 그게 다 현금이고. 그래서 완전 현금부자인데 여기 OO동에 건물까지 있대. 애들은 벌써 다 커서 해외로 유학보내고 소일거리로 그냥 하는거래."


(누가 누굴 동정했어. 바보 멍충아.)


-왜 갑자기 소화도 다 된 배가 아픈것 같지...



강자와 약자


구두를 찾으러 걸어가는 발걸음에 힘이 하나도 없다.

구두방 앞에 도착했지만, 바로 들어갈 생각은 나지 않는다.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을까.


괜히 한번 쓱 컨테이너 벽을 만져보고 팔을 벌려보기도 한다.


"?"

일찌감치 정리하고 있던 구두닦이 아저.. 아니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아, 저 구두 찾으려고요"

괜히 두 손을 모아 잡는다.


까닥까닥. 들어오라는 아저씨의 언어.

다른 말 없이 구두를 쑥 내미신다.


"얼마에요?"


손가락 두개.


바닥 전체를 갈아야 할 수도 있다더니, 생각보다 높은 금액이다.


평상시의 나 였다면 바로 현금을 내고 웃으며 문을 나섰겠지만,

오늘따라 손님용 의자에 다시 털썩 - 앉아버린다.


"?"


(속물같은 질문은 하지말아라 고대리)


달싹 달싹하는 입을 달래고, 아저씨만 물끄러미 쳐다보다 이내 천천히 말이 나온다.


"오늘은, 쫌. 깎아주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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