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받을 자격
사랑엔 조건이 없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이 직장에도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일'을 하는데 자꾸 조건을 따져볼 필요는 없다.
회사가 나를 어여삐 여겨야만이 내가 돈을 벌어다 주겠다는 전제가 애초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몰라주더라도, 난 내 '일'을 하면 된다.
준 만큼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사랑하는 것처럼.
적어도 난, 그렇게 배웠다.
이번엔 너야.
오겹살이 지글지글 타고 있다.
퇴근과 함께 이유 없이 행복해지는 저녁 시간.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CASS!
내일이 없어도 좋을 듯한 기분에 취해본다.
"저거 팀장님이 일 년 동안 키운 돼지 직접 잡아서 지금 굽고 있는 거야, 대박이지?"
늘 비밀스러운 말투의 정대리
"에에? 거짓말"
"진짜 "
"거 짓 마 알-"
(한번 더 진짜라고 하면 믿는다)
"(씨익) 어, 근데 내가 말하니까 진짜 그럴 거 같지 읺아?
-(정색) 전혀 아닌데.
먼발치, 심대리가 어깨에 맨 가방을 손으로 옮겨 쥐며 뛰어오고 있다.
"심대리는 일 때문에 못 올 수 있다더니 어떻게 늦게까지 작업하고 여기까지 또 왔네."
말하며 맥주캔을 하나 더 따서 정대리에게 건넨다.
(자, 쉬지 말고 쭉-)
"그럼,- 사회생활 잘하려면 팀장이 부를 땐 응? 재깍재깍 응? 안 빠지고 와야지"
-그래? 그런 게 사회생활인가.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술은 약해도 노래는 좋아하는 김주임은 이미 노래방 기계 앞에서 한 시간째 폭주 중이다. 분명 멜로디는 슬픈 발라드인데, 정체 모를 춤사위가 왜 함께하는거지.
"슬픈 노래는 좀 슬프게 불러달라고!! ㅋㅋㅋ"
노래하는 김주임 옆에서 잔뜩 흥을 돋우며 장난 거는 이는 옆 부서 유대리다.
여왕벌이라 불리며 부서 내 여직원들의 기강을 책임지고 있다고 들은 적은 있다.
서늘한 밤공기가 느껴지는 초 가을 저녁,
팀장의 전원주택 앞마당, 평화로운 잔디밭 풍경이었다.
-맥주, 오바했으.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발길을 옮겨 툴레툴레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고대리!"
아 깜짝아,
돌아보니 빨갛다 못해 타들어가고 있는, 까만 얼굴의 팀장님. 까만 밤의 보호색 속에 하얀 이 만 씨익 드러내고 나를 보고 있다.
"팀장님, 많이 드셨어요? 전 화장실 좀 가려고요 헤헤"
팀장이 말 걸면 그냥 웃는 거야.
"너 이루아봐" 반쯤 꼬인 혀,
다가가 선다.
"이번네에, 너야" 작은 소리로 말한다.
"네?"
"이번에에 가장,(도리도리) 과아장 스지인 , 내가 너 추처언해써. 심대리이, 정대리이, 너. 이케 세명이야. 워내에 두며인데, 내가 우겨가지고오. 그래서 우리팀 세시야"
쿵 쾅 쿵 쾅-
심장아 나대지 마
-너. 승진 같은 건 관심 없잖아.!
-일만 하고 돈만 받음 되지, 타이틀이 중요한 사람이었어?
-괜찮다고 얘기해, 기대했다 안되면 어쩌려고 해?
-그래도, 이번에 승진하면 사내 최연소 과장.
마음의 소리가 커지다가 일 순 풍선 터지듯 빵 터진다.
"아.. 감사합니다. 팀장님."
저절로 겸손해지는 내 두 손.
"쉿. 비미리야. 아만테도 마라믄 안대"
검지를 본인 입 근처에 대고 휘적휘적한다.
"아 네.."
하늘 위에 있던 별빛이 내게로 내려와 구름 위로 놀러가보잰다.
이번엔 나겠지
오늘따라 여직원들이 많이들 자리를 비웠다.
그 덕에 구내식당엔 유대리와 둘만이 줄을 서 있다.
같은 대리긴 해도 한살이 많아 꼬박꼬박 존대를 붙인다. 절대 그녀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고대리 그거 들었어?"
"?"
"이번에 승진 TO 났대. 얼마 전에 과장급 우르르 한 번에 나가서 ,, 빠르면 이번달 하나 봐"
"으음.."
"이번엔.. 나겠지?"
-뭐.. 그건..
"아.. 정말 어떻게 하지~ 나 안되면 어떻게 쪽팔려 죽을 거야"
"왜요?"
"내가 여자대리 중에 나이가 제일 많잖아"
-한 살?
"너희 팀이 돈은 제일 잘 버니까 두 명은 거기서 나오겠지, 정대리. 심대리."
"으음.."
"설마"
"?"
"설마 나 제끼고 고대리까지 되진 않겠지? 그럼 난 죽여버린다앙"
하며 눈웃음을 짓는다.
-급격히 피곤해.
계속 끄덕끄덕만 하는 내가 답답하다는 듯, 다시 본격적으로 보채기 시작한다.
"고대리? 너 뭐 아는 거 없어?"
"저야 우리 회사에서 항상 마지막이잖아요. 소문 듣는 거"
무심하게 밥을 한수저 뜬다.
점심시간엔 밥이 먹고 싶다.
아니, 밥만.
"그렇지.. 자기들도 양심 있으면 이번엔 나겠지. 나 빼고 니네 팀 세명 나오면 진짜 가만 안 있을 거야"
이대로 가다간 제시간에 밥 다 못 먹는다.
"언니, 만약에 둘 다 과장되면 오케이. 그런데 언니 안되고 나만 되면 나 거부할게요. 다음 연차로 기다린다고 팀장한테 말할게요"
"정말? 아이, 너 꼭 그래야 한다, 너가 될 일은 없겠지만."
그제야 환히 웃으며 빨리 먹어 한다.
거부가 허용이 되나?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를 좌절하게 하며 올라가고 싶진 않다.
과장이 별거냐-
리더의 품격
"별거지 꼬, 그런 말을 왜 했어. 야, 대리에서 과장 갈 때 제일 연봉 폭이 많이 올라. 그리고 이제 '장'이 붙는 거잖아. 그냥 주임 대리랑은 다르다고."
"어차피 때 되면 다 하는 거."
"승진이 장난이냐. 너. 동기들보다 매번 밀릴래? 나중엔 더 티오 적어져서 너희들 중 하나 되고 이럴 텐데 넌 평생 대리 할 거?"
유리에게 혼만 난 채 통화 종료버튼을 누른다.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갈까 하다 머리가 복잡해, 다시 복도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때마침 다시 울리는 휴대폰.
"아빠?"
"요놈 자식, 오늘 아빠 너희 집 간다."
"아 진짜? 오, 몇 시? 같이 저녁 먹어?"
"한 7시쯤 도착하니까 밖에서 먹어, 뭐 할 생각 말고"
이전 날 정성 들여 끓여놓았던 나의 근본 없는 콩나물국을 조용히 밀어내던 아빠의 손짓이 떠오른다.
"응, 오늘은 아빠 좋아하는 고기 먹어. 흐흐"
오늘도 지글 지글이다. 돼지야 미안해-
"회사는 잘 다니냐, 요놈"
따다 딱 소주병 따는 소리는 언제나 좋다.
아빠와의 술자리라 그런가-
"응.. 못하는 게 너무 없어서.. 그게 걱정이지!"
라벨을 가린 채 소주를 따르며 말한다.
"요놈 자식이 언제 이렇게 커가지고.. , 아빠랑 술도 다하고 "
헤헤..
"아빠 많이 마시면 또 엄마한테 혼나"
"요놈자식. 멋지게 자알 컸다"
잔을 부딪힌다.
...
"아빠 때는 돈이 없어서 공부 못하는 사람이 많았어"
끄덕거린다
"아빠도 공부는 잘했는데 동생들 있으니까 졸업을 못했지"
"아빤, 정말 잘했을 것 같아"
지금은 회사 내에서 자체개발한 기술로 특허를 5개나 가지고 있는 내 삶의 멘토.
"그래서 젊을 땐 힘들기도 했어,, 승진은 계속 안되고.."
작은 끄덕끄덕..
"내가 하고 싶다고 아무리 지금 잘한다고.. 해주진 않더라"
멋쩍게 웃으신다.
-부끄러워하지마 아빠.
소주를 가져가 다시 입술에 묻힌다.
"나한테는 아빠가 상무고 사장이고 회장이야"
"하하 요놈 자식. 네가 편하게 스트레스 안 받고 일하면 돼. 아빤 그거만 바래,,"
"난 아빠처럼 꾸준히 오래 일하고 싶어"
학력 이슈로 본인보다 한참은 어린, 마침 고등학교 시절 후배였던 사람을 꽤 오래 상사로 모셔야 했던 아빠 이야기를 직접 듣는 건 처음이었다.
"아빠는 그분이 밉지 않았어?"
"왜 미워. 사람이 참. 좋아. 그래도 나한테 꼬박꼬박 선배님이라고 부르고. 우리 가족끼리도 너 어릴 때 같이 놀러 다니고 했어."
끄덕끄덕.
"승진.. 보다 인성이 돼야 돼.. 내가 아무리 혼자 잘 난 것 같아도 고개 숙일 줄 알고.. 네가 좋은 사람이 되면 따르는 사람도 당연히 늘어나. 그게 진짜 리더야..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
크게 끄덕끄덕..
"응.."
"하하, 우리 꼬는 잘하지. 어릴 때부터 혼자 알아서 척척 다하고."
"아빠처럼만 되고 싶어. "
"흐흐 요놈 자식, 잔이나 따라"
(엄마테 혼나..)
사랑한다고도. 말할걸..
아무것도 하지 마
조용한 가운데 키보드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리더니, 어느 순간 웅성웅성하다.
"어? 떴다"
오늘도 신나 보이는 정대리가 말하고는 이내 침묵한다.
딸칵, 클릭.
-오늘이었나..
인사이동 공문 파일이 열린다.
죽죽 마우스 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가.
정xx
심xx
유xx
.
.
그 외 몇 명 더, 이름과 변동사항이 나란히 기재되어 있지만, 내 이름은 없다.
와아아- 축하해요 대리님, 유대리 축하해, 아, 이제 유 과장이라고 불러야겠네?
오- 유과장, 유과장.. 과장,,, 과장,,,
옆 부서가 시끌시끌해지는 반면, 우리 팀은 텅 빈 절간 마냥 오히려 내려앉는 듯하다.
모든, 들떠 있던 것들이-
모니터 오른쪽 아래 채팅창이 동시에 여러 개가 쑥 쑥 올라온다.
괜찮은 거지? 진짜 유대리네 팀은 눈치도 없네. 또 뭔 정치질을 했길래...
여러 명으로부터 동시다발 적인 소감이 올라온다.
-다.. 시끄럽네..
"아, 고대리, 잠시만"
팀장이 등을 툭 치고 지나간다.
지하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아메리카노도 나온 지 한참이 지난 듯하다.
이내, 팀장이 먼저 침묵을 깬다.
"아씨.. 걔.. 진짜.. 하.. 걔가 며칠 전에 상무한테 술 먹고 전화해서 울고 불고.. 자기 과장 안 시켜주면 쪽팔려서 회사 못 다닌다고 밤새 전화 붙잡고 끊지를 않았다더라"
"..."
"난 정말 최선을 다했어, 그래도 너 올리자고 내가 계속 얘기했는데, 하... 티오가 없대.."
조금 숨을 참다가, 한마디 던진다.
"술 먹고 울고, 그럼 승진되는 거예요? 우리 회사는?"
"아니이, 그 말이 아니고... 아니 걔가 미 x거지.. 유명하잖아. 그리고 네가 조금 더 늦게 들어오기도 했고.. 나이도 너무 어려서.. 걔는 진짜, 그만두겠다고 했다가 왜 다시 깔고 앉아가지고는.."
내가 합격했다가, 출근직전 취소 메일을 받게 했던 사람이,.. 유대리였구나.
내 안의 무언가 툭- 끊어진다.
"아, 이 얘긴 ,, 흠. 못 들은 걸로 하고, 여하튼 한 달 내내 임원들이랑 돌아가며 술 먹고 다녔더라"
팀정이 나의 승진을 책임 질 이유도 변명할 이유도 없다. 괜히 고문하지 말자.
"네, 팀장님, 아니에요, 그래도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게.. 상사들한테 아부도 좀 하고 그러지 , 유대리처럼...."
흩날리는 대화를 뒤로 하고 일어서는 내 뒤에서 팀장의 혼잣말이 들렸다.
-아니요, 정치로 사야 할 타이틀이라면 애초 참전도 안 했을 거예요.
...
엘리베이터 안의 버튼에 들어와 있던 빨간 불 하나가 사라진다.
띵-동,
문이 열리고 막 내리려는데 과장이 된 언니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고대리, 나랑 얘기 좀 하자, 비상계단으로 갈까?"
'할 말 없는데요'
라는 말조차 섞기 싫어 말없이 뒤를 따른다.
"고대리, 기분.. 많이 안 좋아?"
두꺼운 철문이 닫히자마자 내 손을 잡으려 하며 묻는다.
손을 쓰윽 빼지만, 다른 할 말은 없어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고대리. 아.. 위에서 그렇게 결정한 걸 내가 어떻게 해. 내가 다음에 하겠다고 했는데도, 위에서 정한 거라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고대리, 너무 맘 상하지 마. 고대리도 금방 승진할 거야."
"..."
"고대리이.."
-대리대리대리... 고만 좀 불러 대리..
계속되는 침묵에 성격 급한 유대리, 아니 유과장은 그 뽀얀 얼굴이 금세 벌겋게 달아오르며 확 지른다.
"아니 그럼 어떡해! 고대리, 어떻게, 내가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 돼?"
-마음까지 편하고 싶어?
"아니요, 과장님. 아무것도 하지 마요."
난 아직 내 태도의 방향을 못 정했어. 내 감정이 승진 누락에서 오는 건지, 내 딴엔 지키려 했던 언니와의 의리가 내팽개쳐졌다는 거에 화가 나는 건지. 그러니, 내가 준비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마요-
"괜찮지, 우리?."
괜찮다는 말은 거짓일 거다.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내 잘못이 아니야.. 이해해. 고대리 착하잖아.."
다시 한번 그 주름하나 없는 얼굴에 눈웃음을 지으며 애써 분위기를 바꿔보려 하는 유 과장을 뒤로하고, 착하지 않은 나는 철문을 열어 복도로 나왔다.
부끄럽지 않게
-하... 공기가 답답하네.
사무실에 앉아 꺼진 모니터를 흔들어 깨우고 있으니 정대리, 아니 정 과장이 상체를 기울이며 작게 얘기한다.
"난, 고대리 편이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됐어요 과장님."
"어? 어어? 어어어?"
"?"
"그렇게 부르지 마. 고대리가 과장되기 전까진 나도 과장 아니니까. 심대리도 마찬가지고. 우린 다 얘기 끝났어."
-참나...
여전한 엉뚱한 말에 미소가 난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위로받는다.
"기분도 그런데, 일찍 들어가. 팀장이 아까 그러라고 말하라던데"
"안 가도 돼"
"뭐 하려고?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는데"
나?
일-
처음부터 회사를 사랑한 건 아니야. 내 일을 하려고 다니는 거지.
그러니 의리 없어도, 인정 안 해줘도 상관없어.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일만 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