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컨트롤러
눈을 감으면, 나의 머릿속엔 정의 내려주길 기다리는 '감정'들이 줄을 서있다.
슬픔, 기쁨, 미움, 두려움, ...
현재 너의 감정은 어떤 단어를 취할래?
답을 미뤄본다.
그러다보면, 흘러버린 감정에 더이상 나의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어 이내 평안해진다.
나는 '감정컨트롤러'.
하지만, 내 감정은 내가.
자유자제로 통제할 수 있다는 20대의 나의 자만에 신은 곧 합당한 벌을 내렸다.
그것은,
.. 사랑 이었다
좋은 자리
간신히 세이프인가 했는데 2분이 늦었다.
엘레베이터가 층마다 서는 고층에 자리한 탓이다. 라고 아무도 묻지 않은 변명을 중얼거리면서도, 누가 볼새라 내 목은 어느새 자라목으로, 들어 갈 수 있는데까지 들어간 채 자리로 빠르게 이동한다.
책상 길 사이 정중앙에 위치한 정대리의 자리가 어수선해 보인다.
늘 조용히 자리에 앉아 일만 하는 은희까지 왠일로 머릿수를 더 하고 있다.
급히 끼어든다,
"나도, 나도"
뭔진 모르지만 먹는걸까?
나도 달라고 해본다.
"대리님 이거-"
살짝 들뜬 그녀의 목소리가 가르키는 것은 다름아닌 자리배치도 였다.
"담주에 이사가잖아요, 팀장님이 자리 알아서 배치하래요"
"흐음-"
역시, 보통 직급 순으로 배정되는 다른팀과 달리, 우리팀은 자유롭게 앉고 싶은 곳을 선택 하라 했나보다.
나는 팀장의 그런 유연한 사고 방식이 좋다.
"꼬대리는 어디할꺼야?" 정대리가 묻는다
"어디 남았는데?"
"아직 아무도 안했어, 팀장님 밖에,"
자세히 보니 팀장 자리만 체크 된 채 모두 빈자리.
"왜 아무도 안골라? 막내부터 골라"
히힝, 막내 은희가 머쓱 하니 웃기만 하다, 이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폭탄 자리가 하나 있어요"
"아?"
"대리님 과장님들 다 고르면,, 제가 그 자리 앉을 것 같아요.."
셀쭉한 표정이다.
정확히 앞도 아니고 각진 옆으로 한자리. 그것도 바로 문 앞.
팀장 딴 엔 오히려 배려한답시고 문가쪽을 미리 잡아놓은 듯 한데, 그 옆에 마치 문지기 처럼 뾰족 튀어난 곳에 한 자리가 있다.
모두에게 동 떨어진채, 오직 팀장 만을 옆으로 두는.
(니네, 눈치 겜 중이구만)
"나 앉을래, 그자리"
먼저 먼 곳 잡기도 그렇고, 가까이 앉기는 더 싫은 팀원들은 남의 이름을 썼다 지웠다 장난만 치다가 나를 쳐다본다,
"뭐야아? 진짜야?"
"어! 진짜."
하고, 이미 늦은 출근, 자리에 앉아 서둘러 업무 준비를 시작한다.
곧이어, 대화창이 올라온다.
-꼬대리, 레알? 거기 문앞이야, 그리고 팀장 옆, 욕 장난 아니잖아, 귀 썩어.
그렇다, 팀장은 직원들에게만 욕하는 것이 아니라 혼잣말도 욕을 많이 사용한다.
"괜찮아 ㅋㅋ"
딱히 막내를 대신한다는 느낌도, 내가 희생하겠다 느낌도 아니었다.
난 그저,
문 앞이면 출퇴근 시 아무도 신경안쓸 듯 하다.
그리고 팀장 바로 앞이니까, 딴 짓이 EASY 하다. (등잔밑이 어두울테니)
하고, 속으로 조금 검은 생각만 했을 뿐이다.
이런 개이득-
재회
정신없던 이사가 끝나고, 난 곧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시카고는 처음인데다가, 혼자 도맡아야 하는 전시회라 마음이 마냥 편치 많은 않다.
그래서.. 이내 잠이 든다.
화장실 한 번을 안가고 열두시간여를 자다보니 옆자리 승객이 조심스레 흔들어 깨운다.
아, 벌써 도착했네-
가난한 출장비지만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시냇길로 들어서니,
처음에 사우스?(남한?) 너스?(북한) 만 하고 이내 한동안 조용했던 기사가 마침내 입을 연다.
"너를 환영해, 시카고는 미국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우-"
오- 그렇구나. 이렇게 직접 말할 수 있을 정도라니.
한시간을 달리고 도착한 호텔방은 담배냄새가 아직 덜 빠진 듯 하다.
그래도 내일 부터 작업이니 오늘은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어 그저 좋다.
미드나 보려 연결한 노트북에 바로 대화창이 깜박인다.
-잘 지내?
맙소사.
그 다.
나의 성의없는 이별 메일에 '그래, 헤어져'로 짧은 회신을 주었던.
조막만한 심장이 다시 쿵쾅 되기 시작한다.
-그럼, 넌?
-나도 잘지내. 넌 한국이야? 아직 거기서 일해?
(응, 너가 자주 바래다 주었었지...)
-그렇지 모,, 넌 취업했어?
-아직, 나 지금 미국이야.
-뭐? 미국? 어디? 왜?
-공부핑계로 놀러 미국 와있어. 여기 시카고라고. 아나? 벌써 한 6개월 넘어가.
이별후, 다 잊겠다며 학교도 휴학한 채 술만 마시다가, 이내 친구와 단 둘이 걸어서 해남까지 다녀왔다던 얘기는 친구들을 통해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미국까지는, 몰랐는데...
나.. 때문에...?
이럴게 아니라, 지금 시카고라고?
곧바로 나도 시카고로 출장 온 사실을 전하며, 당장 가겠다고 챗을 남겼다.
그는 짐짓 놀라는 듯 했지만, 한번은 보면 좋겠다며 주소를 남긴다.
차로 두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만나면 ...뭐..내 마음은 뭐지?)
택시 안에서 수천가지 질문과 만가지 대답을 준비하며 나의 심장 박동 소리와 함께 난 이미 달리고 있다.
도착했을땐 내면의 흥분이 최고조가 되어있었다.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하다보니, 그가 알려준 술집의 이름 [세렌디피티]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까지 우리를 운명으로 엮는게 아닐까.
끼익-
그는 맥주 대여섯병이 올려진 자리에서 이미 한 병을 거의 비우고 있다.
"안.녕."
어색함을 숨기며, 하지만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고 말을 건넨다.
-정말 있다. 너.
"어, @ 왔어?"
늘 부르던 애칭으로 날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좋다.
왠지 조금은 더 아저씨가 된 것 같기도 한, 하지만 여전히 여유로움이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 있는 태도, 나의 눈을 쫓으며 다정히 바라봐주는 시선. 그리고 커다란 그의 손.
-놓으면 안되는 손이었어..,
라는 생각이 밀어 올라오는 순간, 꾹꾹 숨겨져 있던 그리움이 차올랐다.
-난 오늘 다시 만나자고 고백할테다.
우리는 정말 사랑했을까.
예전 만화에서나 보던 나무드럼통식 테이블 위엔 이제 열댓병의 맥주병들이 모여있다.
우린 꽤 긴 시간을 대화보다는 맥주를 따고, 비우고는데만 집중 했다.
어느정도 취기가 올라 어떤 말을 해도 용서 받겠지 할때 , 드디어 난 용기내어 말을 꺼낸다.
"고등학교때에, 너를 처음 봤을 때 부터, 좋았어"
"다 날 좋아했지"
"졸업한지 한참 지나서어, 너를 봤을때도 좋았어"
애꿎은 맥주병 라벨만 만지작 거리며 고개를 들지 않는다.
"그땐 내가 한눈에 빠졌지. 그래서 사귀자 했고."
그가 씨익 웃으며 부드럽게 대꾸한다
그제서야 그의 눈을 바라본다.
아직도 그는 시선을 피하는 것 따윈 없이 그렇게 지그시 바라봐준다.
"너랑 사귈때엔! 나 정말 최선을 다했다.. 퇴근하면 먹을 거 이고지고 니네 하숙집까지 날르고, 너 친구들도 다 내가 챙기고, 그래야 너가 더 좋아할 것 같았으니까 ... "
"지금도 고맙게 생각해, 그래서 너가 헤어지자 했을때,, 나도 너무 힘들었고. 미처 몰랐던 너의 흔적들이 많았어서."
"너무 너무 너무 좋아서 그랬고, 너무 너무 사랑했어."
앞 뒤가 없는 말 같지만 마구 내뱉는다.
"알아... 나도 그랬어..우린 그랬지.."
"그러니까아!... 다시 만나자.."
침묵과 그의 미소가. 이 분위기에.. 어울리는 건가..?생각이 핑핑 돈다 .
너무 취한 것 같으니, 나가서 바람을 좀 쐬자 하며 먼저 일어서는 그.
-좋은 신호 일까?
서늘한 저녁인 것 같더니 곧 비가 올 것처럼 금새 까매진 하늘.
하지만 그보단 내 속이 더 까맣게 타들어 가는 중이다.
"@@아.."
그의 팔꿈치 소매깃을 살짝 잡아본다.
"@아..넌 나한테 정말 최고의 여자친구 였고, 다신 그런여자 못만난다는 거 알아."
(그럼, 나랑 다시 만나는거야?)
"그런데, . 우린 이미 끝났어. 난 너랑 다시 시작할 자신이 없어."
까맣던 하늘에 벼락이 치나보다. 아니, 분명 천둥 소리가 난 듯 하다.
더이상 대꾸하진 않는다.
대답하면..., 정말 끝일 것 같다.
"그만 가봐, 너 내일 일도 해야한다며..."
"싫어,."
"흠... 나 이제 들어가야돼,..."
"안가."
-전엔 분명 이 반대로 대화하던 우리. 였잖아.
정말 거짓말처럼... 한방울, 두방울 하더니, 이내 굵은비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한다.
마치, 이미 너의 챕터는 끝났다는 것처럼.
그는 우산을 빌려오겠다며, 막 나온 술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빗줄기가 몸을 때리지만, 아무 느낌도 나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콱 땅에 박혀 버렸으면-
"자, 내가 우버 불렀어, 조금만 기다리면 돼"
"나 안가..."
"잘가고, 나중에 한국에서 또 만나면, .. 그때 더 얘기해"
"싫어"
"@아."
달래듯 나의 이름을 부른다.
"한번만!"
오히려 난 소리지르듯 힘주어 내뱉는다.
"?"
한번만. 더..사랑해주면 안돼...?
이렇게 내가 애원하는데. 난 더 잘 할 수 있는데.
왜 ..왜 안돼..
왜 넌. 이제 날 사랑하지 않아...?
"한번만 뭐?"
"너가 내줘. 택시비..."
"훗, 그래 알았어, 아, 택시 온다. 조심히 가. 알았지? 도착하면 문자해."
"안해.."
얄궂은 사랑, 아니 자존심이다.
빗속에서, 그의 한쪽 어깨와 내 한쪽 어깨를 모두 젖혀 가며, 그렇게..
우린. 진짜 이별을 하고 있었다.
안가겠다 버티다 못내 올라탄 택시 안에서 기어코 대성통곡이 나왔고, 기사는 백미러로 돌아보며, 잇츠오케이, 윌비 파인 ..만.. 반복해 말해주었다.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시카고 에 나의 사랑이 저물어갔다.
슬퍼할 자리
정신을 차리고 싶지 않은 나날이 지속된다.
-왜 이 마음은 통제가 안되는 걸까.
괜찮고 싶은데 왜 이렇게 밖으로 나가 머리 풀고 춤이라도 추어 차라리 부끄러움으로 현실을 잊고 싶은걸까.
자꾸만 눈물이 나 , 삼십분 간격으로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로 , 옥상으로 왔다갔다 하며 하루가 간다.
그나마 일반 직원들과는 그래도 동떨어진, 바로 문 앞 자리라는게 다행이면 다행이다.
내 뒷모습만 보는 그들은, 숨죽인채 모니터만 보는 내 어깨가 들썩이는 지 눈치 챌 여유는 없을테다.
- 아, 일하자 일...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은 계속 된다. 이메일은 분단위로 존재를 알리고, 출장후 보고서며, 마무리 서류를 해야 하는 업무가 잔뜩이라는 생각에 회신을 하고, 차근히 업무순서를 정리한다.
슬픔의 정리를 할 장소가 회사내 뿐이라는건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르겠다.
더 깊어질 시간을 주지 않는다.
똑-
또 눈물이다.
이십년 없는 줄 알았던 수도꼭지가 이제서야 잘도 샌다.
하..미치겠네.
하며 자리에 일어나 사무실을 나와 화장실 쪽으로 걸어간다.
반대편에 걸어오는 작고 어두운 그림자, 팀장이 보인다.
고개를 끄덕하고 지나가려는데, 지나쳤던 팀장이 다시 나를 불러세운다.
"고대리!"
돌아본다.
"무슨 일 있어?"
절레절레
"아니요.."
"왜이렇게 자리를 비워, 아까도 부서장이 찾더만."
"죄송합니다, 제가 속이 안좋아서."
"속 안좋아?"
땅만 본다.
팀장은 이미 가라앉은 내 말투에서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물끄러미 바라본다.
"따라와"
기운 없는 나를 왜에에에....
힘없이 팀장의 뒤를 터덜터덜 따른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오고 한참을 걸어도 멈출 기색이 없다.
그저 발끝만 보고 계속 따라간다.
밖으로 나와 백화점으로 들어간다.
-응?
백화점 안에서도 한참을 걷는다, 걷고 또 걷고, 걷고 또걸어 자리를 잡은 곳이, 다름아닌 식품 코너 다.
"잠깐 앉아있어." 하고는,
두 손에 쟁반 두접시를 들고 다시 자리로 오는 팀장님.
충혈된 토끼눈을 하고 팀장을 바라본다.
-저한테 왜이래요.
"먹어"
하...
"속 아프면 먹지말고"
이미 이쑤시개를 집었다.
이건 본능이다.
평소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대와 떡볶이였다.
정말 먹을 힘도 없었는데,.푹 찍어 입으로 자꾸 자꾸 밀어넣는다.
"잘 먹네, 너 배아프단 거 뻥이지?"
"아파요 진짜."
"음.."
끝도 없이 들어간다. 팀장은 몇 번 먹지도 않더니 이쑤시개를 내려놓는다.
"야, 물좀 마시면서 먹어"
"네...팀장님, 물좀.."
"어휴..웬수.."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컵을 내려놓으며 다시 얘기한다.
"직장인은 눈물나도 자리에서 울어야돼. 잠깐씩 밖에가서 바람도 쐬고 어?"
-보통은 나가서 울라고 그러지 않나?
"네.."
"어차피 소리 안내면, 아무도 몰라"
"네..."
"일은 다 했냐?"
"팀장님..."
"어"
"이 떡볶이 진짜 맛있어요...다 제가 먹을께요.."
그 후로도, 나는 엑셀을 하다가도, 메일을 보내다가도 전화통화를 하다가도 수시로 숨죽이며 고개를 처박았고, 그때마다 팀장은 벌떡 일어나, 다른 직원들 뒤로 가서
"야 , 이씨, 너 일 제대로 하는거야? 이거 했어?"
하고 시비를 걸다 밖으로 나가버리기 일쑤 였다.
그렇게, 짝궁 인듯 짝궁 아닌 짝궁 같은 팀장 옆 어두운 등잔 밑에서,,
6개월을 온전히 아픈 심장을 달래는 시간을 보낸 후, 나는 내 감정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지독한 슬픔 이었다.
사랑이 끝나도, 일은 계속 된다.
마치 무심한 위로를 건네는 친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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