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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책임자

TEAM.

by 아는개산책

나는 스스로 빛날 수 없는 하찮은 돌이다.

하지만, 어떤 돌은 수천번의 세공 끝에 보석이 되었다 하고,

보석이 되지 못한 돌도, 때론 귀하게 쓰이는 자재가 되었다 한다.


나는, 보석이 될 수 있을까?

도, 가치가 있을까?


나는, 어떻게 빛날 수 있을까.



그냥 해


우와아-

팀원 몇이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몇 달간을 심혈을 기울였던 독일 프로젝트 입찰이 마침내 우리 회사로 결정되었다 한다.


"YES!"

얼마 전 먼저 과장을 단 동기 정대리, 아니 정 과장이 나지막이 외치며 나를 돌아본다.

히죽-하고.


독일어가 능숙한 그에겐 이 프로젝트가 최적의 업무임을 잘 안다.


"오- 잘됐네"

그를 향해 엄지 척을 들어 보인다.


-역대 최대 규모라고 하던데, 최고 실적을 쌓겠구나, 그럼.. 많이 얻어먹어야겠다!


외국어가 능통한 그를 부러운 눈으로 잠시 바라본다.

동시에 회의실에서 나오는 팀장이 눈에 띈다.

곧 시선을 거둬 모니터로, 자세를 고친다.


-툭!

서류 뭉치가 내 책상에 툭 놓인다.


"네?"

"이거, 네가 해"

하고 그대로 직진, 자리로 가서 앉아버리는 팀장.


독일 프로젝트 이름이 첫 장에 박혀있다.


-어?

정대리를 한번 쳐다보다가, 다시 팀장의 자리를 바라본다.


-잘못 주셨겠지?


서류를 가지고 팀장 자리에 가서 가장 낮은 볼륨으로 말을 꺼낸다,


"팀장님, 이거 잘못 주신 것 같은데요. 정 과장 주면 되나요?"


"아니, 네가 하라고"

"네? 제가요?"

"아 쫌, 그냥 해"

"네.."


서류를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면서 정 과장 쪽을 흘긋 바라본다.

늘 실없는 농담으로 키득거리는 듯 보이는 어깨가 일순 굳어버리는 것이 보였다.


그의 YES를 듣고도 나는 NO를 하지 못했다.


자리로 돌아와 털썩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팀장 1, 과장 3, 주임 2, 인턴 및 현지 아르바이트생 다수.

이 모든 인원이 한 번에 투입, 현장 출장까지 예정된 거대 프로젝트.


그리고 그 책임자는 그중 가장 나이가 어린, 이제 고작 3년 된 대리 나부랭이였다.



나만 잘하면.


주섬주섬 가방에 서류를 쑤셔 넣고, 작업에 필요한 공구통을 집어든다.


삐그덕 삐그덕-

카펫 깔린 나무 계단을 내려오니, 주방엔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정대리의 뒷모습이 보인다.


독일로 출장 온 이후 매일 반복되는 아침 풍경이다.

나는 이른 아침 가장 먼저 집을 나가고, 정대리는 가장 먼저 아침을 준비하면서 서로를 부르지도 굳이 찾지도 않는다.


-휴.. 나만 잘하면 되지.


한숨을 크게 쉬며 대문을 닫고, 어깨에 맨 가방끈을 움켜쥐며 걷기 시작한다.


".. 대리님 팡이 대리님!"


돌아보니, 스무 명의 인턴 중 유일하게, 그리고 살갑게 내게 말을 붙이는 서림이다.

확인 후,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대리님! 아 계속 불렀는데 왜 그냥 가요"


프로젝트 끝나면 바로 헤어질 인턴들과 정 붙이기 싫어, 그렇게 무시했는데도 오늘도 옆에 와서 떠들 작정인가 보다.


"팡이대리님"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다.

"?"


"ㅎㅎ 맨날 저희 곰팡이 닦으라고만 시키잖아요, 그래서 팡이대리. 우리가 지었어요"


(하.. 뭐라는지..)


"대리님 처음에 엄청 싫다고 욕 많이 했는데, 내가 계속 말했어요. 대리님 좋은 분이라고"


"네가 뭔데, 나 알아?"


"네, 저는 사람 조금만 말해보면 알아요. 여기서 고생 제일 많이 하는 것도 대리님이고."


"당연히 책임자니까."


"어린 데다 여자라고 다들 말도 안 듣잖아요. 알바들도 다 정 과장 말만 듣고."


욱신-


현장작업 내내 알바며 인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내가 아닌 정 과장이다.

일도 곧 마음을 따라가는 법.


잠깐의 식사타임 역시 따로 내겐 말도 없이 정과장 쪽에 모여 밥을 먹고 웃고 떠드는 아르바이트생들.

그들이 그게 편하다면, 그래도 돼. 하고 애써 모른 척하고 있는 걸 짚고 넘어가고 있는 건 물색없는 서림이다.


"일만 잘하면 돼."


"그래도 대리님이 책임잔데."


"정 과장은 사람 잘 다뤄. 독일 경험도 많아서 알바들이 뭐가 필요한지도 잘 알고."


난 정 과장을 이해한다.

하지만, 혼자 생각하는 것과, 겉으로도 그렇게 평가되는 것은 다른 얘기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위축되고 있다.


흐음- 그래요?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팡팡"

"?"

"팡팡이라 불러도 돼요?"

"미쳤냐?"

"저 일 잘하는데, 저도 마음대로 부르면 안 돼요?"


아무리 책임자라도 폭력은 안된다.



혼자 하지 마.


"당장 책임자 나오라고 해!!!!"


전시장 부스 안, VIP 고객룸에서 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지?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알고 서둘러 달려간다.


"무슨 일..."


"기념품 박스들 다 어디 갔어?"

날 선 목소리로 윽박지르는 그는 VIP 업체를 담당하는 에이전시 디렉터다.


박스?

분명 어제 버릴 박스와 남을 박스를 분류하는 작업을 하던 정 과장이 떠올랐다.


"조금 있으면 업체 나눠줘야 하는데 어디 갔냐고? 아 XX"

쌍욕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귓속이 뜨겁다.


"제가 지금 바로 찾아오겠습니다."

"아니, 책임자 오라고 해!"

"제가 책임자입니다."


순간, 그의 눈빛이 나를 훑는다.

니깟게?


"참나, 이 회산 아무나 책임자 하나, 어제 그 키 멀뚱한 남자 데려오라고!"


"제가 책임자입니다.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서둘러 일어서 뒤돌아 뛰는 내게 다양한 욕들이 꽂힌다.

그리고 그런 나를 쫓는 수십 명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니야.


찢어지고 젖은 박스들이 마구 박혀 있는 쓰레기장에서 박스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찾을 수 있어.


가벼운 건 던져버리고 조금이라도 무게가 나가는 건 안을 뜯어 확인한다.

그때, 내가 던진 박스를 받아 뒤져보는 인기척이 난다.


"왜 자꾸 혼자 하고 있어?"

"뭘"


더 이상 대꾸 없이 정 과장은 함께 박스를 뒤적거린다.


"여기 있네"


직접 분류했었기에 쉽게 알아본 듯했다.

그 박스엔 이미 X라고 크게 표시되어 있었다.

분명 버리는 박스엔 X라고 말해놓았을 그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그 XX 어제 혼자 정신없어 보이더니, 여기 지가 버린다고 표시해 놨네 뭘"


"빨리 가자"


누구의 잘못을 따지겠나.

우린 갑을병정 중에서도 '정'인 것을.


박스를 받아 든 디렉터의 얼굴엔 머쓱한 표정이 분명히,

(분명히 내 똑똑히 보았다)


분명히,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고맙단 말 한마디 없이,


"그거, 저 안에 갖다 놔요"

"네, 알겠습니다."


X를 O로 고친 후 부스 창고에 넣어두고, 다른 홀 확인을 위해 이동했다.

정 과장이 괜히 말없이 따라붙는다.


"꼬대리, 왜 혼자 다 하려고 해?"

"뭘"


"맨날 새벽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고. 방금도 혼자 쓰레기통 뒤지고 있고."

"..."


"흠,, 고대리 혼자 정신없으니까 나라도 알바 챙기고 있어, 그거라도 해야 일할 때 걔네가 말 잘 듣지"

"..."


"어차피 혼자 다 못해. 같이 하는 거야."


땅만 보며 묵묵부답 걸어올라 가는데 팀장이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보자마자 불러 세운다.


"우리 낼 아침 비행기로 먼저 한국 간다."

"우리 누구요?"

"이제 거의 마무리 됐으니까, 너랑 윤상이만 남고 다 철수야"


윤상씨이? 그 덩치만 크고 영어도 못하는 윤상 씨?


"아니, 팀장님, 저랑 윤상 씨만 남아서 어떻게.."


"아 좀 시키는 대로 해, 나 간다"


이건 양보할 수 없다. 윤상 씨만 남는다면 지금도 힘든데, 배로 더 힘들게 뻔하다.


"팀장님, 제가 책임자예요, 그렇겐 못하겠어요. 윤상 씨 말고 정 과장 남겨주세요"


아이, 꼬, 하면서 내 팔을 붙잡는 정 과장.


"네가 그렇게 잘났냐? 너 혼자 다 알아서 판단하냐? 그럼 어디 니 멋대로 다 해봐!"


사무실 욕쟁이에 늘 버럭대기로 유명하지만 , 내겐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낸 적 없던 팀장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지른다.


화불단행, 욕은 혼자 오지 않는다던가...쉽지 않은 날이다.



같이 빛나.


마지막 작업일은 늘 고되다.

쌍코피를 각오하고 조금 더 이른 새벽 나갈 채비를 마친다.


어제 늦은 밤엔, 팀장에게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팀장은 정 힘들 것 같으면 딱 하루만 더,라고 용인하는 것으로 내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다.


-다행이다, 하루라도 더 기댈 사람이 있어서.

(내가.. 기댄다..?)


삐그덕 삐그덕-

생각에 잠겨 카펫 깔린 나무계단을 내려가는데 오늘은, 정 과장이 딱 맞춰 뒤돌아본다.


"꼬대리님!"

"?"

"오늘은 딴 날보다 더 일찍 가네? 시리얼이라도 먹고 가"


괜찮아.라고 하고 싶지만 오늘은 점심에 저녁까지 먹을 시간이 없을 게 분명하다.

자리에 가서 앉는다.


"뭐야, 내 거도 있어?"


"아, 뭐야 맨날 많이 준비해 놔도 일찍 사라져 버리고 없더구먼."

"..."


"내가 꼬다리 건 특별히 바나나도 얹어줄게."


시리얼에 바나나를 잘라 넣으니 정말 맛있다.


-정말. 맛있네.



분명 아무도 없겠지-

하고 끼익- 문을 연 창고엔 이미 지게차와 인부들이 요란스레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작업을 지시하고 있는 윤상 씨가 보인다.


"어? 윤상 씨 벌써 나왔어요?"

"아, 오늘 할 일 많잖아요, 흐흐, 대리님 힘드니까-"


"..."


"대리님은 저쪽 가서 쉬세요, 어차피 이런 일은 제가 더 잘해요"


분명 짐이 될 거라 판단했던 나는. 사람 하나도 제대로 파악 못하는, 나만 아는 책임자다.


"뭘 쉬어. 내가 해야지. 나는 가서 남은 거 체크하고 분류하고 있을게"

"네, 헤헤"


응, 늘 생각 없이 웃고 다니기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딱딱한 사무실 분위기에 그 웃음이 산소 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나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작업을 시작해 준 윤상 씨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마무리되었고, 생각지 못하게 저녁까지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고독한 출장을 온 지 2주 만의 일이었다.


-꼭 와요!


라는 정 과장의 말을 떠올리며, 퉁퉁 부은 발을 운동화에 구겨 넣은 채 한식당 문을 열었다.


한쪽엔 인턴 십여 명, 한쪽엔 현지 아르바이트생 십여 명, 그리고 그 중앙 테이블엔 윤상씨와 정 과장, 팀장까지 소주잔을 막 부딪히는 중이다.


"어? 왔다 왔어 꼬대리! 얼른 와"


사람들 눈을 보지 않고 자리에 가서 앉는다.


"자,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꼬대리가 왔습니다, 주목하세요.! 보스! 고생 많았어! 한마디 해줘, "


"내가 무슨.. 다 고생했어요, 편하게 마셔요"

평소의 나답지 않게 목소리가 작아진다.


"보스! 크크"

윤상 씨가 덧붙인다.


"여기선 고대리님이 우리 보스죠. 다 맞게 인원배치하고 사고 없게 늦게 까지 확인 다하고. 다른 보스였음 이렇게 못했어. 흐흐"

팀장 쪽을 흘낏 가리키며 웃는다


"그래, 여기선 네가 보스다"

팀장이 헛웃음 지며 보태준다.


나도 오늘은 몸이 너무 고되다 보니 감정도 쉽게 흘러내리는 듯하다.

이제, 다 끝났기도 하고.


"고생했어"

정 과장이 마지막 말을 붙이며 건배사를 이끈다.


술잔을 따라 들며 속으로 되뇐다.


-고생했다..


그렇게 모두의 도움으로 역대 최고의 실적을 찍은 우리팀.


그리고 나는,

과장이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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