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입니다.
나에게는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다.
그 영화는, 수많은 정자들이 헤엄치고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정자들은 끊임없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빨리 달리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힘이 달리거나 이제 그만할래 하는 정자들은 결국 낙오되고 끝까지 살아남은 정자 하나만이 난자에 수정,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나이니까 약 5살이나 6살 즈음될까, 그 영화를 뚫어져라 보던 꼬꼬마는 두 가지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다.
나, 일등이었다!
그리고, 내 선택으로 끝까지 달렸다!
그렇게 그 영화는 지금까지도 내 인생의 전반에 걸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한 장면이 되었다.
엄마가 짜증 나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가을, 그 청명한 하늘 아래, 나는 옥상에 올라와 손에 가지런히 뜸을 올리고 햇살을 쬐고 있었다.
-평화롭네...
하는 찰나, 누군가 옥상 문을 쾅하고 열어젖힌다.
깜짝!
뜸 떨어질 뻔했네.
죄지은 것도 없는데 놀라 쳐다보니, 아직 일 년도 채우지 않은 새내기 신입 리원이다.
"아이, 과장님! 찾았잖아요."
"찾지 마, 제발"
아이잉, 특유의 애교를 부리며 벤치 옆에 털썩 앉아 다리를 쭉 뻗는다.
"또 뜸뜨고 계셨던 거예요?"
"응. 살려고"
"어디 아파요?"
"혈관이 아프대"
"아, 뭐야앙"
웃음도 많은 요즘 아가씨다.
"나 진짜 엄마 때문에 짜증 나 죽겠어요."
"왜 또"
"이번에 차수랑 놀러 가려고 하는데 1박 2일 한댔더니 절대 못 간다 하잖아요."
남자친구 이름이 차수인가 보다. 요즘 애들은 이름도 특이하다 싶다.
"그럼 가지 마"
"아아아앙, 가고 싶다고요."
"그럼 가"
"아잇. 정말. 엄마는 내가 자기 소유물 인 줄로 아나 봐요. 어릴 때부터 나를 꽁꽁 싸매고 집 밖에 절대 못 나가게 했잖아요. 나 고등학교 때도 애들 파자마 파티도 한 번도 못 갔다니까요?"
"그 정도 얼굴은 아닌데,, 아마 아무나 따라갈 성격 같았나 부다."
그게 다 사랑받고 있단 얘기다 하고 혼자 생각하다 문득, 나의 어린 시절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혼자서도 잘할 거야
형제들 중 사이로 끼여 태어난 내가 처음 들은 칭찬은,
혼자서도 잘하네-
난 공부도, 기상도, 밥도, 잠도 무엇이든 혼자 척척 하려 하는 , '나'도 있다는 걸 알아봐 주기만 해도 기쁜 어린이였다.
특히 하굣길 갑작스레 비가 올 땐, 다른 형제들은 마침 우산을 챙겨 엄마가 내게 올 수 있는 차례가 오기라도 하면 마구 달려가 안겼는데,
그럼 엄만, 언제는 비 맞는 게 좋다며?라고 말하며 웃곤 했다.
내가 자란 곳은 거의가 직업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모여사는 조금은 특수한 환경이었다.
그 때문인지 내 안에 빈부의 개념도 적립되지 않았고, 잘나고 못나고 하는 기준도 몰랐다. 비교할 줄을 모르니 그저 평온한 유년을 보낸 것 같다.
유흥할 거리도 없는 작은 마을에 나의 유일한 취미이자 행복은 서점에 죽치고 앉아 책을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틈만 나면 책만 보고 있는 나를 엄마 아빠는 '정말 손이 안 가는 아이야' 라며 자주 칭찬하곤 했다. 덕분에 나는 더욱더 마음 놓고 책 속의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이야기에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곤 했다.
그러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왔을 땐, 여전히 우리를 위해 밥을 짓는 엄마가 있고, 이놈 새끼들 하며 퇴근하자마자 달려오는 아빠가 있었다.
그 존재 자체로도 난 좋았다.
딱히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비교 대상이 없기도 했지만, 나 또한 그냥 그런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내가 자라온 모든 것에 엄마 아빠 때문이 아닌, 오직 덕분만 있었다.
태어난 것은 나의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등으로 달려 엄마의 쌩 살을 찢고.
마음을 졸이게 하며 그렇게 자라온 것이다.
그저 다른 인생
"아이, 과장님! 지금 제 말 듣고 있어요?"
화들짝, 다시 정신이 돌아온다.
손가락 위에 올려놓은 뜸 들은 이미 연기도 다 빠지고 식어가고 있다.
"저희 엄만 저랑 막 소리 지르고 싸우다가 저보고 그래요, 넌 못된 년이라고"
"엄마가 보는 눈이 정확한 거 아닐까?"
"하.. 날 이렇게 키운 건 엄마잖아요. 난 진짜 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엄마 때문에 아무것도 못해보고."
끄덕이며 속으로 대꾸한다.
(엄마도 아무것도 못하고 널 키웠겠지.)
"아 진짜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동조해 주길 기다리듯 한마디 더하는 아가.
(손 발 다룰 줄도 모를 때부터 먹이고 재웠겠지.)
역시 속으로만 얘기한다.
"뭔 자꾸 때문이래.."
떨어진 뜸을 주워 박스에 담으며 말한다.
"과장님, 저희 엄마 진짜 못됐지 않아요? 어떻게 딸한테 그렇게 말해요?"
"만약 너 딸이 너한테 지금처럼 얘기하면 뭐라 할래?"
"음... 귀싸대기를 날려야 하나? 크크크크"
본인이 말해놓고 본인이 배꼽 잡고 웃는다.
"리원아"
"네?"
"가서 일 쫌 해..."
남의 가족사를 한번 듣고 다 알 수도 없을뿐더러, 그녀 역시 나이가 들수록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계속 바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개인사에 이러네 저러네 평가할 자격은 없다.
그저, 지금 말하고 싶은 것 들을 들어주기나 할 뿐.
"아이! 과장님도 지금 일 안 하고 땡땡이치고 있잖아요!"
"응.. 꼬우면 네가 상사해..."
"정말 킹 받는다고여-!"
요즘 애들은 킹 받을 일도 많다.
-엄마 마음이 알고 싶으면, 그만큼의 시간부터 겪어봐.
속으로 한번 더 중얼 거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