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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시여.

준비는 마쳤습니다만

by 아는개산책

회사가 나를 채용하고 돈을 주는 데엔 이유가 있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하지 않은 이유를 나열해 봤자, 모두 비겁한 변명일 뿐,

기계처럼 돌아가는 조직은 여간해선 내 사정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한다. 내가 맡은 일은 어떻게든 해낸다.


그것이 음 내가 먹었던 마음,

그리고 이곳에서의 나의 존재 가치.


물론, 하늘이 허락하는 한..



시험대에 서다


"저,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저 다음 주 독일 출장인데,, 장시간 비행, 괜찮을까요?"


물리치료를 끝내고 잘 펴지도 못한 허리를 붙잡고 물었다.


"흠.. 탈 수는 있는데, 타면 안 좋겠죠"


의사 선생님은 오늘도 쿨하게, 나도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을 하신다.


네, 하고 병원을 나와 절뚝거리며 다시 사무실로 향하는 머릿속이 시끄럽다.


-하.. 아프다고 일에 지장 주는 게 최악이야.

-이건 허리문제야, 못 간다고 빨리 보고해야 해.

-여자니까 핑계 댄다는 말이 돌지도 몰라.

-여자고 남자고 다친 허리를 어떻게 해? 비행기가 허리에 최악인 거 몰라?


머릿속의 GO와 STOP 이 한참 설왕설래 중이다


(그래, 결심했어!)


아픈 다리를 절뚝이며 팀장 자리로 걸어갔다.

무언가 중얼중얼 하며 모니터를 보고 있는 팀장 보인다.


-아 또 혼자 욕하나

말 꺼내면 안 된다는 위기감을 안은 채 팀장 앞에 섰다.


"뭐?"

(왜 벌써 짜증이세요)


"저 팀장님, 혹시.. 다음 주 독일 출장, 제가 꼭 가야 할까요?"


나는 이미 개미 목소리고, 팀장은 그게 말이냐는 듯 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 요즘 허리가 좀.."

"못 걸어?"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에 말을 주워 담고 싶어진다.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냥 가"

"네."


나는 왜 미 알 있으면서도 꼭 확인하려 들까?


-하.. 괜히 물어봐서.. 아픈 이미지만 남겼네..



가지 말라는 계시?


창문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공항버스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오히려 통증이 극에 달하면 통증을 못 느끼게 되기도 한다잖아.

-이러다 못 걸으면.. 산재는 가능할까?


"도착했습니다., 내리세요"

멀리 떨어진 운전석에서 기사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님께 꾸벅 인사하며 내리는 순간까지도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늦겠네, 빨리 수속해야겠다"


그렇게 절뚝거리며 카운터로 걸어가는데, 두 손이 왠지 필요이상으로 자유로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뭐지? 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


-한 손엔 여권.. 한 손엔 이어폰.... 이 아니라 트렁크!, 아, 내 트렁크???"


나도 모르게 악! 외치고 오던 길을 되돌아보았다.


-어디서부터지?

-아, 가방을 못 찾으면, ,,,, 이대로 출장 못 ?


당황한 나는 제자리에 서서 공항 안을 두리번거렸다.


"~씨, 가씨, 아가씨가~~"


분명 웅성 웅성 사람들의 말소리로 꽉 차 있던 공항 안이 한순간 조용해지면서 나를 호칭하는 목소리만 남아 있는 듯하다.


"어어?"

먼발치로, 아까 탔던 차량 기사님이 내 트렁크를 끌고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출장. 가야지... 이 정도면 우주가 미는 거야..


"기사님. 아 ,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죄송해요. 여기까지.."

"하하, 아니에요, 얼마나 또 당황하셨을까 봐 서둘러 왔지,, 그럼 난 전해드렸으니, 이만 갈게요"


이내 되돌아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향해 다시 몇 번씩 허리를 숙였다.


"앗, 이러다 정말 늦겠다"

다시 정신 차리고 카운터로 한 걸음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손은 허리를 짚은 채로-



시험은 계속된다.


길게 늘어선 줄 끝에서, 한창 아이팟을 들으며 둠칫 둠칫 박자를 맞추는데,

이내 항공사 직원이 코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여권도 내밀기 전에 바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 죄송하지만, 현재 아이슬란드에 화산이 터져서 비행기가 바로 못 뜰 수도 있습니다. 조금 기다려 주시겠어요?"

"아이슬..? 그게 어디지? 여기 독일 가는 거 아닌가요?.."

"아.. 저.. 아, 잠시만요, 전화가.."


직원은 말하다 말고 급히 전화를 받았다.


비행기의 지연 연착은 흔한 일이니, 딱히 당황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앞에 선 직원이 오히려 몹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전화를 끊자 곧바로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두 손을 모은채 말을 이었다,


"아... 저 손님, 제가 다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유럽에서 화산이 터져서 화산재가 날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


손으로 입술을 뜯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네, 그래서 현재 유럽상공에서 화산재가 지속적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그게 기체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위험할 수 있어, 즉시 주변국으로 비상 착륙을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주변국이면,, 어디로요?"


"그게.. 지금 상황에선 러시아가 될지.. 네덜란드가 될지..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저 그래도 탑승하시겠습니까?"


하고 다시 그의 전화가 지속적으로 울리는 것이 보였다.


-러시아요?


이건, 못 걷는 정도가 아니라 죽을래 살래 선택 아닐까?


먼저 회사에 보고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럼, 저 조금 이따 말씀드릴게요. 잠시만요"


팀장에게 전화를 걸며 말을 정리해 보는 내내 심장이 쿵쾅 인다.


"어"

주말에 웬 전화냐는 뜻이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팀장님, 저 다름 아니고 오늘 독일 출장이라 공항에 왔는데요"

"어 그런데 "


"지금 아이슬란드에 화산이 터져서, 비행기가 독일로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고 해서요"


잠시 정적이 흐른다-


"여보세요? 팀장님"

"아이,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크게 고민할 것도 없다.

이 정도 했음 되었다.


"그럼, 그냥 탈게요"

"그래, 너 알아서 잘해"

"네,,,"


-가야 할 운명이면 가서 부딪혀 보면 된다.



운명에 순응하여.


-이 경험은 또 날 얼마나 강하게 만들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파스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여 확실히 허리의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직원을 찾아 데스크로 가보니, 겨우 열댓 명 만이 용자(용감한 자)라는 이름으로 줄을 서고 있었다.


-모두 어딘가에 소속된 노예겠지...

동병상련을 느끼며 조금 전 그 직원을 작게 불러본다


"저, 저기요"

"네, 손님"

"전 타겠습니다"

" 아 타신다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여권 한 번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여권을 내미는데 또다시 그의 전화가 울렸다.


"잠시만요 손님"


몇 발짝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통화를 는 모습으로 시선이 쫓아갔다.


-오늘 저분 진짜 바쁘겠네


곧 나도 휴대폰을 들어 유리에게 문자를 남기기 시작했다.


-나 오늘 독일 출장 가는데 만약 이틀 동안 연락이 안 되면 경찰에 신고하고 꼭 나를 찾아


까지 쓰는데 전화를 끊은 직원이 서둘러 다가왔다.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여권을 내밀었다.


"저 손님 죄송하지만, 오늘 유럽행 항공사 전 편이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댁으로 돌아가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네? 아, 저 가야 되는데, 공항에서 좀 기다리면 될까요?"


"아.. 기다리시는 건 상관없는데 오늘 안에 해결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 그럼.. 내일자로 항공권 변경 해주시나요?"


"내일 비행기가 뜨게 되면 변경은 해드릴 수 있는데 아직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손님 그럼 제가 또 다른 분께 전달해야 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집에 가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사라져 갔다.


그리고..

나의 시험도 끝이 났다.


나는 바로 팀장에게 다시 보고를 했고, 다행히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땐, 지금 뉴스 나오고 난리 났다며 일단 돌아오라고 컨펌을 받았다.


트렁크를 끌고 다시 공항 밖을 나와 맑은 서울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지? 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


허리가 씻은 듯이 나은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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