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두겠습니다.
마음이 닿는 곳엔 늘 진심을 쏟았다.
할 수 있는 일 이 생기면 최선을 다했고,
만난 인연에는 믿음을 주려 애썼다.
그러나 모든 신념의 바탕에는 '진심'이 있었다, 진심이 움직이지 않으면 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아직 진짜 어른이 되지 못한 철부지 였는지 모른다.
소송과 개인사기, 정치싸움에 믿었던 사람 사이의 배신.
그리고 첫사랑과의 이별까지도 나를 깊게 할퀴고 지나갔었다.
그 모든 일 들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게 될꺼야. 라고 머릿 속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내 몸은 과부하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허리는 채 한 시간도 꾸준히 앉아서 버티기 힘들었다.
나는, 진심을 다해 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직서
탁-
문이 닫히고 곧 택시가 출발했다.
무심하게 평화로운 창밖을 보며 나는 또 생각에 잠긴다.
-이건..정확한 원인을 저희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스트레스에서 왔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요즘, 힘든 일이 많으셨나요?"
조금 전 진료를 끝내고 약을 처방해주던 의사의 소견이었다.
얼마전 부터인가 손등의 피부가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하더니, 곧 팔꿈치며 무릎으로까지 옮겨갔다. 그리고 증상이 가장 심했던 손바닥 안은 허물이 거의 벗겨져, 붕대를 칭칭 감고서야 운전대를 잡을 수 있었다.
"하... 그동안 겪은 일이 많긴 했지.."
혼잣 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피부가 이렇게 될 정도면, 일을 좀 멈추고 쉬시면서 몸을 돌보시는게 좋을 것 같아요."
마지막 의사의 당부를 떠올리며, 나는 중간 중간 몇번이나 꺼내 보고 싶었던 품안의 사직서를 제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무실 안,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만을 기다리다가, 이내 화장실로 향하는 팀장의 뒤를 밟았다.
"저, 팀장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구부정하게 걷던 팀장이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저 드릴말씀이..시간 좀.."
무표정으로 엘레베이터를 향하는 발걸음을 쫓는다.
잠시후,
스타벅스 매장 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앞에 둔채 팀장과 마주앉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커피가 차가운 건지, 손 끝이 덜덜 떨리는 느낌이다.
"뭔데, 말해"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아 죄없는 입술만 밀어넣다가, 막 팀장이 짜증나는 표정으로 바뀌는 걸 보고서야 입술을 뗏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조심스레 '개인사정' 이라고만 적힌, 네 귀퉁이를 잘 맞게 접어놓은 종이를 내민다.
"니가? 왜?"
이건 몰랐다는 표정이다.
"마음이 힘들어서요."
"넌 또 뭔 배부른 소리냐"
다시 입술을 깨문다.
그동안 남들에게는 욕을 던져도, 나에게는 늘 믿음과 지지를 보내 주던 팀장이었다.
"연봉이 부족해?"
"아니요, 이것 좀 보세요."
나는 손의 붕대를 풀어 손바닥을 내밀며, 가려놓았던 목덜미와 팔꿈치도 드러냈다.
군데 군데 허물이 벗겨지고 피가 맺혀있는,. 누가 봐도 환자였다.
입사와 함께 넌 잘할거라며 언제나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던 한 분이었다.
그래서 더욱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나의 팀장에게,
나는 기어코 사직서를 제출 했다.
..그리고 곧 반려 당했다.
쥐 죽은 듯 고요히-
탁-
"이, 주소로 가주세요"
외치며 택시 문을 소리나게 닫는다.
드디어 라스베가스에 도착, 이미 그곳에서 사업을 시작한 지 2년차에 접어든 아린이를 오랜만에 볼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이미 회사 일은 안드로메다로 보낸 지 오래다.
-퇴사는 없어, 장기 휴가 받아 줄테니까 가서 푹 쉬고 다시 돌아와
팀장은 퉁명스레 말하며 사직서를 내 책상에 던지듯이 놓고 지나가버렸고,
나는 그것이 그 만이 할 수 있는 '정' 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돌아갈지 안돌아갈 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여기서만큼은 제발 조용히 아무일 없이 , 쥐 죽은듯이 쉬었다 가야겠다.
다시 한 번 다짐했다.
하지만, 택시를 내려 아린의 집앞에 서서,
나는 또 한번, 거대한 일들이 나를 삼킬 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꺄아- 어서와!!!!"
아린은 고막을 찢을 듯 한 소리를 지르며 나를 반겼다.
잠들지 않는 도시의 네온 불빛이 밤하늘을 찢을 듯 흩날리고 있었다.
-(2)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