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재배열

by 아는개산책

배열을 바꾸면

역할도 달라진다


내가 맺는 관계는

내가 두는 말에 달려있다.


내 인생은

내 판이다.



정석


서로 다른 곳만 쳐다보고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지만,

어디선가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온다.


-네가 먼저, 네가 더 고약하게, 네는 왜, 나는 왜, 왜, 왜... 이딴 말은 죽어도 안 해.


왜냐는 질문 자체가 내 패를 까보이는 기분이다.


유치한 말은 싫다면서 유치한 행동은 서슴없이 꺼내드는 우리는,

정말 어른일까.


순간,

마음이 차분해졌다.


억지로 한판 제대로 붙어보라고 끌려 나온 자리.

하지만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는 건 이미,

휴전을 염두에 둔 하나의 신호.


노란불이다.


-상대가 필요한 걸 먼저 줘.


결국 내가 선공을 두기로 한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이 물었다.


"소개팅하실래요? 제가 아는 분이랑."


"네? 저요?"


당혹감과 반가움이 한 번에 드러난다.


-싸움 끝.


김차장이 제공한 정보가 약이다.

심과장의 배경이라던 제로에 가까운 연애경험도, 사회성의 부재도 나는 그것들을 그의 공백으로 생각하고 보완을 제안했다.


"네, 아는 언니가 계속 소개팅 해달라고 하는데, 나이대가 과장님이랑 맞아요."


-당신 때문이 아니고 상대가 원해서라고 판을 깔아줄게요. 이 정도면 윈윈?


그는 '너나 잘하세요'라고 되받아 칠 수 있을 만큼 날을 갈아두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다.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면 사람들 앞에서 명백하게 흉이 될 언행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고 치밀하게 들어오는 반면 그는 대놓고 그의 기분을 드러내며 숨길 줄을 몰랐다.


-당신이 악인이면 난 더 나쁜 년이어야 하지만.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면 난 조금만 나빠도... 되겠지.


더 나쁜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그렇게 보이게 한다고 느끼는 순간,

사람은 크게 분노한다.

사람 간의 계산에 익숙하지 않을수록 더 그렇다.


이젠. 반대를 적용하면 된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니

착한 행동이 어울려요.


"그리고 당분간 퇴근 카풀 해주세요. 소개팅해드리는 대신."


"헛 참, 그런 거 아니어도 태워줄 수 있거든요?"


웃는다.


의도가 없는 호의로 만든다.

빚은 내가 그에게 넘겼지만, 내가 더 빚지는 것 같은 상황을 그려줌으로써.


다만,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내 생각보다 더

좋은 내면을 가진 사람이었다.

계산 없이 순수했고 한번 의리가 생기면 버릴 줄 몰랐다.


한동안 그와 나는 꽤 자주 카풀을 하며, 길고 깊은 대화를 통해 남녀사이도 나이차이도 넘어선 동료이자 친구가 되어갔다.


정석에서 최고의 수가 나온 셈이었다.



퇴근길


"이번에도 잘 안 됐네요. 죄송해요 고차장님."


"인연을 만나는 게 중요하죠, 횟수는 안 중요해요."


소개팅 주선이 벌써 5번째인가...


"하... 쉽지 않네요."


심과장은 운전대를 한 손으로 잡고 왼손으로는 창문을 열어 바람이 들어오게 했다. 그의 조용한 한숨도 바람과 함께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나는 머리를 오른쪽 창문틀에 기대어 흘러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고차장님은 연애 어떻게 해요?"


"저요? 어..."


회사직원에게 개인 연애사를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현재 나의 감정 교육생인 심과장은 생각보다 입이 더 무거웠고, 그의 숨겨졌던 과거사를 매번 듣기만 했던 입장이었던 터라 이번만큼은 나도 말을 꺼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사내연애도 했었고... 얼마 전엔, 저도 소개팅으로 사겼어요. 흐흐"


"아? 사내연애? 누구요? 저도 아는 사람이에요? 어? 그런데 지금 남자친구 있다고요? 김차장도 알아요?"


피식 웃음이 난다.


"걔가 왜 알아야 돼요, 절대 말하시면 안 돼요. 걔 알면 회사사람 다 알아."


"하하하. 정확히 아시네요."


"그리고, 헤어졌어요. 얼마전에."


"아..."


심과장은 고개만 끄덕이며 더 묻지 않았지만, 오히려 내 쪽에서 이야기를 멈추고 싶지 않아졌다.


친구에게도, 내심 결혼까지 가길 바랐던 엄마아빠에게도 아직은 설명하지 못한 우리의 이별,


김진영과 헤어졌던

그 이유를.


.

.


(2)편에서 이어집니다.




<예고>



이별이란 건


단 한 번의 싸움도 없었다. 심지어 사소한 말다툼도 없었다.


우리 사이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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