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 (2)

그 후

by 아는개산책

폭발(1) 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갈등


다시 책상에 올려진 장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텀블러 가득 채워놓은 물만 벌컥벌컥 들이켠다. 냉수가 몸속을 빠르게 훑으며 내려가지만 전혀 차갑게 느껴지질 않는다. 이미 더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식어버린 마음이었다.


-한판 붙을 거야?


모니터 위로 마음속의 대사들이 정렬되기 시작했다.


-붙으면 무조건 한 번에 이겨야 되는데.


지는 싸움은 시작해선 안되고 오래 끄는 싸움도 무리다.


회사란 지든 이기든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 공간.

생계가 걸린 전쟁터에서 패배자로 살아간다는 건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질 확률을 높인다.

그리고 곧 감정싸움에서 먹고사는 문제로 확장된다.


-무시하고 지낼 순 없어. 돈 관리하는 담당자랑 어떻게 모른 척하고 일해?


불편함은 이미 충분히 느끼고 있다.

감정적 불편함이기만 하면 참으련만 업무 속도까지 늦어지고 있다.

결국 발버둥 칠 수록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건 나... 자신.


-대응해야 해. 할 수 있어. 방식의 차이일 뿐이야. 찾아내.


찾아야 한다.

모든 일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최선을 찾아야 해.


띠리리-

사무실에 울리는 전화소리가 다시 귓속으로 울려 들어온다.


"네."


"어이, 고차장. 잘하고 있어? 많이 바쁘지? 내 거 뭐 사고 났다며"


동기 녀석 김차장의 해맑은 말투에 나의 금이 간 분노가 그를 향하려 한다.


"하..."


"왜? 심각해?... 뭔데. 너무 바빠서?"


"너 빨리 들어와."


"어 지금 독일 도착했는데. 어떻게, 그냥 내일가? 크크 왜에, 누가 괴롭혀? 아님 괴롭힐 사람이 없어?"


"너 오면. 사표 낼라니까."


방법이고 뭐고.

아직은. 흥분상태다.



얼굴 보고


부서가 비어있던 일주일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른다. 그동안 날로 먹으면서 일하던 것도 아닌데도 일 년 치 일을 일주일 만에 끝낸 마냥 나는 일의 속도 위에서 제대로 리듬을 탔다.


담당자들이 자리를 비운건 어떻게 알았는지 쉴 새 없이 쏟아지던 전화와 문의는 신기하게도 출장자들이 복귀하는 데로 그 양이 줄어있었다.


"짜증 나"


그리고 불려 온 퇴근 후 맥줏집.

둥근 탁자에 높이가 높은 의자 위에 불편하게 걸터앉으니 생각은 더욱 냉정해지고 있었다.


"심과장님이 고백했어?"


"미쳤냐."


그건 호감을 가진 이에게 하는 태도는 아니다.

더더구나 내쪽에서는 절대 그런 방향으로 몰고갈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다.


김차장은 여전히 싱글벙글이다.


"그럼 뭔데."

"몰라. 그만둘 거야."

"그만두더라도 말하고 그만둬야지. 그리고 너 나가면 난 어떡하라고"

"너도 그만둬 그러면"

"야, 난 딸이 있어"

"그럼 다녀"

"어, 알겠어. 그런데 왜 그러는데"


맥주를 다시 벌컥벌컥 들이켜서 바닥을 비운다. '이런 애랑 뭔 얘기를 하고 있지' 하는 생각과 함께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웬만하면 네가 그냥 넘어가. 심과장님. 불쌍한 사람이야."


또 시작이다. 되도 않은 불쌍 전법.


"그런데 내가 심과장이란 일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야, 뉴스에 났던데, 너랑 심과장이랑 머리채 잡고 싸웠다고."


"어 그래서 내가 엎어치기로 이긴 것도 들었어?"


"맨손으로 싸워서 다행이지, 너 사식 넣어주러 다닐뻔했네"


김차장은 싱글거리며 손으로 목을 까닥까닥 날리는 시늉을 한다. 이런 말에도 대꾸해 주는 내가 천사처럼 느껴지면서 조금은 기분이 느슨해진다.


"맥주나 시켜"


"아, 응."


김차장은 맥주 두 잔을 추가로 시키며 말을 이어간다.


"이런 일 안 해본 사람이잖아. 그 산골 조그만 데서만 하시다가. 갑자기 서울까지 와가지고 적응하는데 많이 힘든가 보더라. 나이도 적은 것도 아니고 다 젊은 사람들 일하는 틈에 와가지고."


하...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 아니다

이런류의 지피지기면 전투력이 제로가 된다.


"아 그럼 오지 말았어야지."


"야. 넌 또 무슨 말을 그렇게."


"그럼 뭐라 해"


"그리고... 연애도 한 번도 못해봤대."


"하.............................................."


김차장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아닌가, 얘가 진짜 고수인가. 물타기 고수.


"암튼 잘 풀어. 나는 너 없으면 안 되고 심과장님도 없으면 안 돼."


"난 돼. 둘 다 없어도"


"알아. 말 안 해도. 네 맘 내가 알지! 그래서 내가 심과장님도 불렀어."


나는 맥주잔 위를 빙글빙글 돌리던 손짓을 멈추고 김차장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레이저를 쏘았다.

때마침 김차장의 뒤쪽에 있는 문가에서 일주일 동안 애써 피해 다녔던 실루엣이 보인다. 나와 잠시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도 모르는 척 시선을 오른쪽 왼쪽으로 두리번거리며 다가온다.


"아씨..."


내 표정을 읽은 김차장이 뒤를 돌더니 손을 번쩍 든다.


"과장님! 여기요!"


그리고는 팝콘을 한 움큼 집어 입에 털어놓고는 의자에서 내려 심과장과 남자의 포옹 비슷한 걸 하고 있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고개를 끄덕했다.

심과장도 고개를 끄덕한다.


김차장은 여기 앉으시라며 내 맞은편 자리를 권하고는 내 옆으로 와 조용히 속삭인다.


'얼굴 보고 싸워. 알았지? 파이팅.'


'하... ㅅ.... ㅂ....'


맞은편에 올라앉은 심과장은 두 손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오른쪽을 보고, 나는 내쪽에서 오른쪽을 본다. 김차장은 술과 안주를 추가한다며 자리를 비운다.


덩치만 자란 초등학생 두 명이 서로 반대편만 보고 앉아 미동이 없다.


이제...

먼저 말하면 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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