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 (1)

관계의 재구성

by 아는개산책

하루 종일

가족보다도 더 오래 보아야 하는 사이

모든 걸 터놓으면

그만큼 더 위험해지는 사이

적당한 거리의 적당함을 찾는 게

사람마다 달라 더 어려운 사이


얽히고 싶지 않으면 관심을 끈다.

관심을 끄려면 얽히면 안 된다.


한번 꼬이면

푸는 건 두 배 세 배의 노력

모른 척하면

두 배 세 배의 감정 소모


가족도 아닌

친구도 아닌

제 삼의 관계


원수.


아 아니,

동료.



싸웠나.


“자, 오빠한테 말해봐.”


김차장이 말하며 얼음잔의 맥주를 시원하게 반이나 비운다.

‘오빠’라는 소리에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그를 쏘아보았다


“너 심과장님이랑 뭐 있지?”


말없이 한숨을 쉬다가 벌컥 맥주 한 모금을 목구멍에 넘기고 맥주잔이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깨게?"


“짜증나.”


심과장이 윗선의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는 것도, 영업사원이 아님에도 회사차로 출퇴근을 하는 것도 내 알바는 아니다.


그리고 나는 원체가 좋아하는 이도 싫어하는 이도 구분해놓지 않는다.


그 자체도 피곤해.


“싸웠냐?”


김차장은 조용한 사무실이 조용하게 넘어가는 게 더 불안한 사람.

싱글싱글 벙글벙글 웃으며 묻는 김차장의 얼굴이 더욱 못생겨 보인다.


“뭘 싸워... 나랑 싸웠대?”


-싸웠나.


누군가 나를 좋아했다고 해도 직접 말하기 전까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물며 싫어하는 감정은 더더욱.


관심 없다.



공격과 수비


심과장의 정체를 알기 전, 심과장은 집 방향이 같으니 태워준다며 몇 번인가 차를 제공했고 나는 기름값을 제공했다.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는 간격이 조금씩 짧아지는 것 같다고 느낄 즈음,


"고차장님, 땡 할 거죠? 먼저 내려가실래요? 저 오분이면 되는데."


-어? 이제 너무 자연스러운데. 이러다 버릇되면 나만 힘들지.


"아뇨, 오늘은 지하철 탈게요."


"아, 왜에. 같이 가요. 어차피 가는 길이잖아요."


"아니요, 따로 갈게요."


그는 잠시,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응? 나 때문에 안 돌아가니까 더 좋은 거 아닌가?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심과장을 올려봤다.


"그래요, 그럼."


훽 돌아서는 그의 등 뒤로 찬바람이 훑고 간다.


-뭐야, 갑자기 춥지?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직접 심과장 자리로 찾아가야 하는 일이 늘어만 갔다.


"과장님, 저번달 영업비 올린 거, 아직 처리 안 됐어요?"

"네, 해줄게요."

"아... 벌써 한 달 됐는데. 다른 사람들도 다 안 됐어요?"


원래 칼이잖아. 당신.


그는 서류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잠시 멈추고 앞에 서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해드린다고 말씀 드렸죠."

"아, 네..."


그리고 또 며칠 뒤엔,


"저 과장님. 혹시 파트너비용 올린 거.. 언제쯤 나가요?"

"장부에 적었어요?"

"네, 적었죠."

"그럼 기다려요."

"... 넵."


지면으로 올려야 하는 지출결의서는 다시 내 자리로 올려져 있는 경우가 늘었다.


"날짜 제대로 적으세요."

"... 죄송..."

"띄어쓰기도 못해요?"

"... 아..."

"숫자 콤마가 틀렸잖아요. 그게 콤마예요 점이에요?"

"..."


이유는 다양했고

내가 꼼꼼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 전도 지금도 나는 같은 사람인데 그전에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빠꾸는 겪어보지 못했다.


조금씩.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폭발


부서의 2/3 이상이 해외로 출장을 나갔다.

실제 업무 가능한 책임자급도 해외영업 나 혼자. 그리고 아직 뭘 할지 모르는 신입 한 명.


사무실 전화가 여러대씩 울리면 전화기를 귀와 목 사이로 껴서 응대하다가 휴대폰으로 온 다른 실무자의 연락에 조용히 업데이트를 전하고 깜빡이는 카톡과 왓츠앱에 동시에 대답하는,

실로 진기명기 같은 시간이다.


"차장님, 이거 하나만 봐주세요. 저... 많이 바쁘시죠?"


울상인 신입이 내미는 견적서 하나도 제대로 봐줄 여유가 없지만, 죽겠다는 단어도 사치이다.


"어, 거기다 놔, 내가 금방 보고 줄게."


띠리리-


시간차도 제대로 두지 않고 울리는 전화들.


"네, 고우리입니다."


"고차장, 어떡해? 기계 하나 지금 들어온 게 있는데 이거 문짝이 다 찌그러져 있어. "


"네에?"


바쁘다는 인지조차 저 산너머로 보내놓은 머릿속이 급박하게 돌아간다.


"일단, 사진 보내주세요."


출장 중인 김차장 업체 건이다.

홈페이지에 접속해 물건의 원래 모양을 확인하는데 옆으로 심과장이 와서 선다.


"고차장님, 이거 다시 해주세요."


돌아보니 장부를 흔들흔들 들고 서 있다.


"아 제가 또 틀렸어요? 죄송해요, 두시면 제가 이따 고쳐서... "


"지금 해주세요. 저도 바빠요."


"지금요? 저 지금 이거 먼저..."


"아니. 먼저 해주시라고요."


나는 마우스를 흔들던 손을 멈추고 옆에 서 있는 심과장을 올려다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동공이 흔들리는 데로 따라가면서도 아무도 먼저 눈을 피하지 않는다.


"저. 지금 사고 나서, "


"이것도 사고예요. 회계일이 우스워요?"


진심이냐고 물어야 되나.


"저... 지금 안 웃고 있는데 뭐가 우습다는 거예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고차장님. 저랑 말장난해요, 지금?"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인원이 얼마 남아있지도 않은 사무실엔 키보드 소리가 멈추고 지속적으로 울려대던 전화벨 소리마저 종적을 감춘다.


크게 한숨을 몰아쉰다. 내 쪽에서 먼저.


이 행동 역시 또 다른 언어인 줄 알고 있다.

곱지 않은 언어.


"알겠어요, 두세요. 십분 안에 갖다 드릴게요."


의자를 휙 돌려 모니터 쪽으로 향한다.


"지금 하시라고요."

"두시라고요."

"아 진짜 이 사람이."


그는 들고 있던 장부를 잠시 위로 들어 올리더니 나의 책상 위로 탕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는다.


슬로 모션처럼.


모서리에 반쯤 걸쳐진 장부가 시야에 걸린다.


스르륵-

아주 천천히

장부가

책상 아래로

떨어지려한다.


지금이라도 손을 뻗으면 누구라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다.


하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


탁!


둔탁한 소리를 내며 장부가 떨어지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신입이 벌떡 일어나고 국내영업팀의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의자가 밀리는 바퀴소리가 우르르 동시에 난다.


나는 끝까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있지 않지만 뒤통수가 따갑다.


파티션으로 가려져 있는 데도 불구하고 사무실 천장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직원들의 표정이 그려진다.


심과장은 참 나. 소리만 남기고 드디어 뒤돌아 자리로 돌아간다.


모니터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장님, 주.. 워 드릴까요?"


신입이 조심스레 다가와 모기만 한 소리로 묻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평소 잘 따르던 국내팀의 김대리가 벌떡 일어나 옆으로 다가온다.


"그냥 주우면 되지, 뭘 묻냐."


그는 떨어진 장부를 들어 탁탁 털더니 자리에 곱게 올려놓고 말없이 돌아갔다.


모니터를 보는 동공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끝에서 끝으로 바삐 움직인다.

심장 박동과도 일치하는 듯하다.


턱을 괴려고 손을 올리는 데 손끝이 떨리고 있다.


이제.

가만히 넘길 수는 없다.




(2)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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