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
지키지 못하면 떠나고,
남은 자들은 똑같이 일하고,
새로운 일은 늘 두렵지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일.
남아야 하나
떠나야 하나
일인가
꿈인가
돈인가
... 지금인가.
옥상회의
오랜만에 옥상에 올라왔더니, 역시나.
아침마다 사라지는 모닝담배 멤버들이 진을 치고 있다.
김부장, 김차장 그리고 얼마 전 경력직으로 입사한 회계팀 심과장.
누구의 소개라고 하던데.
"어얼, 고차장"
걸쳐 입은 회사점퍼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동기 녀석 김차장의 반가운 인사에 눈을 맞춘다.
"9시 지난 지 한참인데 다들 여기서 뭐해요."
저들 남자 셋이 한동안 사라졌다가 사무실로 들어올 때는 꼭 폭탄 같은 일이 하나씩 터졌었다.
팀 내 몰랐던 소식이라던지 새로운 규율이라던지.
실세라는 김부장과 하늘에서 내려온 회계팀 과장까지 어울리니, 뭐.
"고차장님도 오세요. 안 그래도 상의할 게 있는데."
-아니, 상의를 회의실에서 하지, 뭐래.
재떨이 바로 옆의 벤치에 털썩 앉자 김차장이 옆에 따라 앉더니 김부장과 심과장이 다가와 에워싼다.
"무슨 요?"
"아, 차 등록 때문에. 이번에 임대리가 자기차 등록해 달라고 했대."
김차장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말한다.
"그런데요?"
"아니, 아직 대리잖아요. 지금 전시부서엔 남는 티오도 없고."
갑자기 끼어드는 심과장은 나와는 열 살 차이가 난다. 경력직인 데다 나이도 많으니,
바로 말을 놓고 지내는 이들이 많았다.
"응? 없어요? 주차 몇 대 할 수 있는데요? 지금 우리 팀은 김부장님이랑 김차장만 끌고 다니지 않아요?"
나는 허리문제로 지하철을 이용하고 있었다.
"티오가 없어요?"
"임대리 해주면 김대리도 해달라고 할 거고 유수도 해달라고 할 거고."
”응? 걔네 둘은 차가 없는데? “
“아니, 티오가 힘들어요.”
김부장이 급하게 수습하듯 말할 때는 그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많이 알면 많이 속상해지는 게 이 회사 생리.
안 궁금했을 거야.
내 일이었다면.
외근
옥상에 올라오기 한 달 전인가, 그 임대리와 외근 방향이 같아 차를 얻어 탄 일이 있었다.
회사 차량은 이미 다른 영업사원들이 모두 가지고 나간 뒤였다.
"에고, 고마워."
"아니에요."
그는 씩 웃으며 능숙하게 운전을 했다.
그와는 벌써 만 3년을 함께 일하고 있지만 팀도 다른 데다 어딘가 말 걸기 어색한 분위기가 있어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다.
그는 대리직분이지만 팀장이라고 해도 어울릴 정도의 묵직함이 풍겼고,
나는 그저 장난기 많은 차장 나부랭이.
진지함이 가득한 사슴 같은 눈망울이 조금씩 감기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야, 졸지 마."
"아, 네. 아 죄송합니다 차장님."
"야근했어? 요새 바쁘지"
"네, 저 매일 10시 넘어서 가요. 어젠 집에 가니까 1시 다 됐더라고요. 택시비만 이만 원 넘어요."
"아... 결재 올렸어? 그런데 너 차 있잖아, 지금 이거 너 차 아냐?"
"네, 맞아요. 주차를 안 해주니까 그냥 택시 타는데. 그게 돈은 더 나가는데."
"너 맨날 야근하고 외근도 많은데. 왜, 주차해달라 해"
"아, 전에 얘기했는데 자리가 없대요. 심과장님이 들어와서 회사차 거기로 갔잖아요. “
"심과장님? 회사차 쓴다고? 영업도 아닌데?“
무디고 무디지.
회사소식 아무도 나만 안 알려주지.
"네, 박상무님 친척이잖아요, 그래서 바로 과장으로 들어온 거. 모르셨어요?"
"나 모르는데..."
"말씀하지 마세요. 어차피. 저 나갈 거예요."
"뭐어?"
나는 깊게 파묻었던 허리를 세우고는 협박하듯 눈에 힘을 주고 임대리를 쳐다봤다.
신입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도 잘한다고 칭찬이 자자했던 임대리.
-어쩌다 이렇게 됐지?
"너 그만두게?"
"같이 가실래요?"
그는 잠이 싹 달아난 표정으로 싱글싱글 웃는다.
나는 눈에 힘을 풀고 다시 보조석에 몸을 깊이 묻었다.
"뭐 하려고. 어디 갈려고."
"어디 가는 건 아니고요."
임대리의 아버지는 지병이 있으신 데다 몇 년 전 허리를 심하게 다친 후론 집에만 계시다 했다. 살림만 하던 어머니가 급한 대로 있는 돈 없는 돈 모아 작은 김밥집 하나를 차렸지만 그 돈으로 네 식구의 살림을 꾸리기엔 늘 빠듯했다 한다.
회사일 아니면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 임대리는 신입 때부터 급여를 받으면 절반이상을 집에 갖다 드리고 일부는 십일조를 내고 일부는 대학 때 빌린 대출을 갚고. 그러고 나면 손 안에는 한 푼도 남지 않을 때가 많다고.
“주차 때문만은 아니고. 그냥 전에도 얘기하면서 좀 마음 상한 일이 몇 번 있었어요,”
“돈 때문에?”
돈이 뭐?
회사원은 돈이 다야.
"아니, 원래 회사가 작으면 복지가... 그래도 하나씩 좋아지고 있는데. “
"복지 때문이 아니고... 기준이 없잖아요. 여기서는... 어차피 오래 못 갈 거 같아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
차장 나부랭이가 뭘 할 수 있을까.
“차량지원해주면, 그럼 다닐 거야?”
“음... 생각해 봐야죠."
타인의 어려운 사생활을 알게 되는 것은
나의 우유부단과 무능력함을 선명히 마주하게 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전부를 바꾸게 되는 일이 되기도 하고.
정해진 답
"전에 저한테 회사차 한대 배정 해주신댔잖아요. 저 대신 임대리 주세요"
시스템도 사람관계에도 관심이 없는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그것이 유일했다.
-심과장이 타고 다닌다는 회사차가... 설마 그 차인가?
"임대리 실적 좋잖아요. 대우해주면 더 열심히 할텐데."
"아, 나중에 더 상의해보시죠. 내려갈까요 이제? 어휴 벌써 9시 반이네. 전화 오겠다,"
김부장이 급하게 자리를 정리한다.
나야 그의 말투에서 읽어낸 것이 많이 없지만 김차장과 심과장은 뭔가를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짜증 나. 답은 이미 있구만.
김차장이 옆으로 가까이 붙으며 주제를 바꾼다.
비밀이야기 하듯이,
"요즘 연애 안 해? 그 협회, 또 연락 없어?"
"미쳤냐. 조용해"
"아 왜에. 이제 너도 연애해라. 그래야 덜 까칠해."
-흠.
"만약에, 옛날에 헤어졌는데 갑자기 그 문자로 ‘자니’ 하는 거 있잖아. 넌 어떻게 생각해? “
목소리를 한껏 낮춘다.
"왜? 누가 너한테 자냐고 문자 했어?”
고개만 끄덕이며 계단을 내려가자 그가 대뜸 말한다.
"야, 그거 한번 자자는 거야. 남자는 단순해."
나는 잠바에 두 손을 집어넣고 계단을 다 내려갈 때까지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무실 문이 지잉 열리는 순간 생각이 정리됐다.
"연애고자한테 뭘 묻겠냐."
"그렇지, 고... 뭐? 고자? 나 고자 아니야!"
엉겁결에 큰소리를 낸 김차장의 앞을 지나던 태수가 놀란 눈으로 돌아본다.
"네? 차장님 고자라고요?"
단순한 것들.
육 개월 후
나는 임대리가 남은 짐을 챙기는 모습을 보며 서있다.
오늘따라 사무실은 외근자들이 많아 임대리와 친하다고 어울리던 직원들이나 함께한 팀원들도 오전 일찍 인사를 전하고 자리를 비웠다.
"진짜 가냐."
"네, 준비 다 끝났거든요."
그는 10평도 안 되는 사무실 한 칸을 구했고, 이미 업체 등록도 모두 마쳤다 한다.
직원은 한 명.
그의 여자친구.
그는 한 박스 밖에 안 되는 3년간의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 나갔다.
직접 가르친 것도 아니고,
함께 업무를 진행한 적도 없지만.
네가 성실한 건 알았는데.
믿을 수 있는 인재인 것도 아는데.
납득을... 못시켰네.
"넌. 더 잘 될 거야."
"그럼요. 새벽기도 매일 해요. 하하. 그리고, 차장님. 생각 바뀌면 연락 주세요. 차장님 오시면 언제든 환영..."
"야, 됐어. 회사 나간다고 차단이나 하지 마."
"아이, 절대 그럴 일 없죠."
그는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넥타이를 매만지더니 꾸벅하고 정중한 인사를 한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내가. 미안하네."
"아니요. 제꺼 해보고 싶어서 가는건데요. 뭘... 차장님. 끝까지 비밀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띵-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그는 미동도 없이 한숨을 쉬다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본다.
눈물 한방울이 까무잡잡한 그의 뺨을 타고 흐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첫 직장을 미움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만은.
안다.
그럴 아이다.
“잘가. 화이팅.”
“네, 차장님도요.”
그리고 그 뒤 10년이 채 흐르기도 전,
그는 결혼을 하고 지속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더니
작은 건물하나를 계약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아직도 신입처럼 현장에서 가장 열심히 뛰어다니며 일한다는 소문.
'같이 가실래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