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
참 희한해.
혼자일 땐 아무렇지 않게 견디는 것도
둘이 되는 순간엔
단단함을 나눠가지게 되나 봐
마치
채워져야 완성되는 마음처럼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둘이 되면 한 사람의 강도가 약해져
어느 날의 빈자리가
뻥 뚫린 구멍처럼
크게
보이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그런 날.
분실
전시장으로 향하는 버스 도착 일분 전, 마지막까지 문자판을 두드린다.
+이제 버스 곧 도착해, 뭐 해?+
남자친구에게 보낼 문자를 입력하는 동안 버스가 들어왔고, 인도에서 내려와 막 열리는 문에 발을 들이려는 순간, 쓰으윽 휴대폰이 미끄러진다.
"아, 안돼."
달리기를 못하면 반사신경도 느린 건가.
하필이면 빗물이 고여있는 살짝 패인 바닥이다. 떨어진 휴대폰을 집으려 다시 내리려는데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로 잠시 시야가 가려진다.
그리고 사라진 휴대폰.
"어?"
웅덩이 사이엔 아이폰의 '아'자도 보이지 않게 쉽사리 나를 떠나간 한 달도 안 된 나의 새 휴대폰.
오늘도
경찰서에 간다.
회벽의 높은 건물 앞, 문이 어딘지도 정확히 보이지 않는 경찰서 앞에서 잠시 망설인다.
-한국에서도 안 가본 경찰서를... 벌써 두 번째. 끄응...
독일 경찰서는 전시장 안에도 위치해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그곳을 들어가고 나가는데 친절함은 없어 보인다.
띠이-
벨을 누르면 어디선가 방송처럼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영어로 신고하려고 왔다고 말을 하니 철컥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조심조심 마치 내가 범죄자인 마냥 잔뜩 위축된 심경으로 그 문을 들어간다.
-다시... 나올 수 있겠지?
아무래도 스릴러를 너무 많이 봤다.
새로운 파트너
"하이"
"하이."
오늘 뒤셀로 출장온 파트너는 처음 본 담당자다.
'걔 완전 한국사람이야. 일 잘하니까 고차장님도 한번 같이 해봐.'
세상 귀 얇은 나는 또 덜컥 새로운 파트너에게 일을 주고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처음 만나는 그.
전형적인 독일인처럼 보였는데 '놉, 더치' 라며 싱긋 웃는다.
"나 아침에 휴대폰 누가 훔쳐갔어."
"호, 안 됐네. 업체들 오기 전에 차 한잔 마실까?"
그는 시계를 한번 보더니, 옆에 보이는 카페를 가리킨다.
-부스에서 업체 안 기다리고? 흠. 그럴까?
그런데 차를 한잔만 시킨다.
"어? 안 마셔?"
"난 아까 마셨어. 너 기다리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신다.
-그런데 카페는 왜 오자 한 거야. 자긴 마셔놓고.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은 없다.
둥근 입구의 커피잔 속에 카푸치노가 바닥을 보이도록 우린 말없는 시간을 보낸다.
카푸치노 한 모금. 창 밖 한번.
그도 내가 마시는 커피잔을 한번 보다가 유리창 밖을 한번 보다가.
휴대폰이 없어도, 말이 없어도 시간은 흐른다.
"혼자 왔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 커피를 아껴 마시는 차에 그가 한마디 건넨다.
"응. 너도?"
"아니, 와이프."
"어어."
-결혼했나?
턱밑으로 복실 한 털을 가진 얼굴에 더한 결혼 정보에 나이를 유추해 본다.
그러다 대뜸 그가 눈앞으로 내밀어 보이는 휴대폰 화면,
귀여운 남자아이가 브이자를 하고 있다.
"오, 아들?"
"예스, "
-어? 와이프랑 같이 왔다더니.
"어? 그럼 애도 같이 왔어?"
"놉"
"그럼 애는 누가 봐?"
"애 엄마"
"와이프랑 왔다며?"
"예스"
아아.
예전 독일 담당자들은 모두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만 하는 친구들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너도 비슷한 건가. 이제 나도 결혼했냐고 물어보려나?
하지만 다시 정적이 흐르며 대화가 끝이 난다.
사적인 질문도 서슴없이 묻는 문화와는 다르다.
조용해서...
좋다.
-나는 언제... 결혼하지?
전시장
업체가 오기로 약속한 시간이 30분은 더 남았다.
둘은 천천히 부스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데 소란한 한국말이 들린다.
파트너를 뒤로하고 먼저 부스로 달려간다.
"어?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이번 담당자? 아니 계속 전화했는데 왜 전화를 안 받아?"
"안녕하세요! 아... 휴대폰을 아침에 잃어버려서."
"무슨 담당자가 휴대폰도 안 들고 다녀? 신발, 지금 우리 난리난 거 안 보여요?"
"네? 왜..."
전시품을 진열하다가 물건이 아직 남아있는 박스가 없어졌다고 한다.
"어? 그거, 완료 스티커 없으면 아무도 안 가져가는데... 스티커 없었죠?"
순간 그 남자의 표정이 굳는다. 쓰고 있던 캡모자를 벗어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에 던져놓더니 눈썹을 치켜뜨고 묻는다.
"그럼, 스티커 붙인 내 잘못이라는 거요? 당장 가서 찾아올 생각을 해야지 아가씨가 정신이 없네. 아가씨, 이름이 뭐야?"
-일단, 이름이 아가씨는 아닌데...
"아... 고우리라고 합니다."
"스티커, 책상에 있길래 내가 박스에 붙였지. 붙이면 안 된다고 말을 하든가. 내가 전시장 몇 년을 오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 아 신발(ci bal)!"
높아진 언성에 부스를 정리하고 있던 주변사람들도 대놓고 이곳을 집중한다.
-자꾸 신발 신발... 그렇다고 내가 너 신발(ci bal)은 아니지.
"네, 일단 파트너랑 가서 찾아볼게요. 그런데 이미 가져간 거는 창고로 들어가서 다시 빼기 힘들 수도 있어요. 시스템으로, "
"아.. 아가씨, 그거 없으면 우리 전시 못해. 책임질 거야?"
말하는 남자는 뒤로 앞머리를 넘기며 흘긋 보는 나이 지긋한 사람이 윗사람인지 한 번씩 돌아보며 눈치를 본다.
나도 나이가 지긋이 들어 보이는 점잖은 분위기였다면,
나를 좀 더 어렵게 대했을까.
"... 네, 일단 찾아보겠습니다."
대답을 하고 돌아서는데 분명 슬프지도 않은 일에 한쪽 눈에서 눈물이 주욱 흐른다.
-아, 뭐야.
면장갑을 낀 손으로 눈을 쓰윽 닦는데 앞에 서 있던 파트너 마이클과 눈이 마주친다.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시선을 피하고 그를 지나치려는데 냅다 옷 뒤에 달려있는 모자를 잡아당긴다.
돌아보니 마치 오랜 친구처럼,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보인다.
"우리, 여기로 가면 더 빨라."
그의 오른손 엄지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내 머리가 세 개는 더 달린 것 같은 큰 키에 가까이 붙으니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창고로 가기 위해 전시장 문을 나서자마자 그가 갑자기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 하늘 봐. 눈 와."
사뿐사뿐
하늘에서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은 눈이 내린다.
"나 빨리 가서 찾아야 돼."
"창고에 전화해서 찾아보라고 해놨어. 잠깐만 눈 좀 봐. 쏘 뷰티풀."
그는 자꾸 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생각도 멈추고 쉬게 하더니.
이제 걸음도 멈추고 화를 쉬게 한다.
한국에서 아주 머언 나라.
독일에서 보는 눈은
똑같이 예쁘다.
호텔방
방으로 돌아와 배게 위에 올려놓은 노트북을 연다.
한국 시간은 이제 오전 시간.
퉁퉁 부은 발을 꾹꾹 누른다.
하루 종일 확인하지 못한 카톡들이 쌓여있지만
기다리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바쁘구나."
요새 들어 이직 준비를 하는 그는 더욱 바쁘다.
늘 녹초가 되어 잠드는 것을 알기에 서운하게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바로 들어온 새로운 문자가 깜박 거린다.
두근-
+울, 잘 지내? 오늘 아침 무지 춥다. 이제 곧 생일이네. 오늘도 일하나? 너 일할 때 진짜 멋있는 거 모르지. 보고 싶다 고우리.+
보낸 이는,
X였다.
나에겐 이별한 첫사랑이라는 고유명사가 된.
이기우.
"아, 왜에..."
왜에.
왜에.
왜
다 늦는 거야.
왜...
멋지다는 말을 왜 네가.
하필 오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