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것은
나 자신이다.
짧은 시간 안에 내리는 결론,
그 생각이 불러오는 말. 그리고 행동.
그 모든 것에 자신이 없어 멈춤이 먼저 필요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세상은.
내가 망설이는 동안에도
나에게 확신을 주기를 기다리고만 있다면
내가 흔들리는 동안에도
나를 붙잡고 단언해 줄 이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사람은
무얼 보고
믿을까.
불완전한
나를.
함께
-누가 그딴 소리나 듣고 싶대.
‘너는 나 믿어?’ 따위의 말을 들으려고 따라온 게 아니다.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가고 싶어 다리가 달달거린다.
-어차피 비즈니스. 회사만 나가면 다신 볼 일도 없어.
생각의 끝에 흠칫 놀라는 건 나 자신이다.
내 생각이 들킨 건가?
그래서.
나를 믿지 않나?
언제라도 관계를 끊을 준비를 하고 대하는 회사 사람들과.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고운 사람이라고 붙잡으려 한 협회 실장님.
그들은 모두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나 먼저 내려가 있을게. 천천히 있다 내려와. 아마, 김부장님도. 생각이 많을 거야.”
그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린다
“......”
나는 말없이 그가 서있는 반대편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고우리”
이름을 부르면 얼굴을 볼 수밖에.
“귀걸이 바뀌었네.”
김차장은 씩 웃으며 윙크를 하고는 등을 돌린다.
정색을 하는 내 표정은 보지도 않고.
-아, 저걸 확.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사직서. 휴직. 실업급여. 이직. 면접. 한 달 생활비. 카드값. 소송 등의 단어들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다.
뇌가 과부하되어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그런데 지금은.
여행이 하고 싶다.
따뜻한 나라로.
진짜 사고
사무실 층을 누를지, 차가 있는 지하 2층을 누를지 고민하는 사이 문자가 온다.
+김 부장님이 찾으세요. 저는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 유나+
-언제 6시가 넘었네.
사무실 안은 이미 모두 퇴근을 했는지, 나가라고 한 건지 아무도 자리에 남아있지 않다.
나는 말없이 불 켜진 회의실로 직행한다.
그곳에 기다리고 있는 것들은
피의자인가.
피해자인가.
"차장님, 앉으세요."
김부장이 웃으며 인사한다.
김차장도 옆에 앉아 뭣이 좋다고 히죽거린다.
태수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죠."
-안 궁금한데. 네가 궁금하겠지. 이 끝이.
팔짱을 끼고 앉아 김부장의 눈, 그 안의 흔들림을 본다.
얼마 전부터 회사의 거래처 리스트 일부 그리고 가격까지 노출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 와중에 태수의 친구라는 놈이 전한 말이 시발점이었다 한다.
시.
발.
... 점.
그 뒤는 안 들어도 비디오였다.
나는 전화통화로 친구의 사업얘기를 했을 뿐 그게 어떻게 들렸을지 어떤 말로 전해졌을지는 내 일이 아니다.
뜬소문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파일 전송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일정 용량 이상의 파일을 외부로 전송할 때엔 관리자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컴퓨터 백날 봐라. 뭐가 나오나. 슬램덩크나 나왔겠지.
몇 년 전 출장길에 보기 위해 다운로드하였던 슬램덩크 전권.
"... 그래서. 미안해요. 오해했어요 저희가."
-또 저희.
"사과할게요. 차장님. 우리 이제 괜찮은 거죠?"
김부장이 떠드는 동안 김차장은 쉬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따라서 끄덕여야 하나 싶을 만큼 열정적이다.
-물색없는 놈. 하... 귀찮아.
"사직서... 없던 일 하는 거죠?"
침묵이 흐른다.
"맞죠? 맞죠? 대답 안 하니까, 맞는 거죠? 우리, 다시 잘해봐요."
책상에 올려놓은 내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는다.
그리고 흔들어대는 이것이
악수인가.
크게 한숨을 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오래 김차장이 끄덕이는 장면을 보다가 따라 한 건지도 모른다.
"어휴, 한숨 이제 놓네. 고마워요."
나는,
이 자리에서도 말 한마디 내뱉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모르나.
나는 여전히 같은 사람임을.
-어차피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거.
뭐, 더 들을 말도 할 말도 없다.
어차피 남는 거. 빨리 잊는 게 낫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회의실 문을 열자마자 뒤에서 쿠쿵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
분명 들려서는 안 되는, 낯설지만 아는 소리.
일 터진 소리.
곧바로 뒤돌아 아래를 보니 김차장이 쓰러져 있다.
"두영! 뭐야?"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가 두 손으로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김부장을 쳐다봤다.
"부장님?"
김부장은 이미 119에 신고 중이다.
끝 또는 시작
늦은 시각, 회사에서 사람이 쓰러졌다고 119를 부르는 경우, 119 대원 뿐만 아니라 경찰관도 함께 온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잠시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도.
나는 처음 알았다.
-스트레스는 내가 받았는데 왜 네가.
입 밖에 낼 순 없다.
김부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하... 벌써 세 번째네요. 예전에 출장 갔을 때도 쓰러져서 연락왔었거든요. 두 번인가...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아무한테도 말은 안 했는데..."
"아니 왜, 그렇게 중요한 걸..."
나는.
말하지 않았다고 뭐라고 할 자격이 되나.
삼십 분 정도 부장실 소파에서 휴식을 취하던 김차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차장... 정말... 안 가는 거지?"
"드라마 찍냐."
김차장이 잠든 사이, 그의 다리를 주무르는 김부장과 꽤 많은 얘기를 이미 나누었다.
사람이 쓰러지는 것을 눈앞에서 처음 목격한 나는.
대체 살면서 진짜 중요한 게 뭐지.
라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틈으로 김부장과 대화를 나눌 만큼의 묵은 속내가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좀. 긁혔네요. 부장님."
그리고 김차장은 끝까지.
나를 잡는다.
그런 사람이 있다.
내게도.
-믿었다가. 다시 상처받아도. 일단... 믿는 건가.
아니,
애초에
사람 마음으로
믿고 안 믿고를
정할 수는 있는 건가.
그래.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다시.
시작이다.
감정을 잠궈도
바람은 분다.
(끝)
******
와,
[네. 정말 좋아합니다. S.2] 30회 연재가 끝이 났습니다.
이 글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온 마음 다해
귀한 시간 내어주심에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