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4

자각

by 아는개산책


도움


-오늘 고장나라


회사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차단기 앞에서 가끔씩 발생하던 에러를 떠올렸다. 물론 그런 생각이 무색할만치 부드럽게 그리고 빠르게 차단기가 올라간다.


코너를 돌며 내려가는 길이 지하 주차장인가 지하 세계인가 따위의 생각을 한다.


기어를 P로 바꾸고 사이드를 채운다.


"하......"


지이잉-


사진 파일이 도착해있다.

보낸 이는 O협회 김실장의 이름이다.


"응?"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저, 잘 들어가셨어요?”


“응 사무실이에요. 괜찮아요 얘기해, 내가 보낸 거 봤어요?"


“네, 잘못 보내신 거 같아서."


“아니, 혹시 많이 답답하면 상담이라도 받아보라고. 나한테는 말하기 좀 그런 거 같아서.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혹시 필요할지도 몰라서 보냈어. 그렇게 우는데... 보통일은 아닐 거 아니야.”


“네? 아... 그런데 왜... 이거 변호사 명함인데요?”


“아, 응 내 동생이야. 괜찮아 그냥 상담도 하니까. 내가 고차장님 이름은 말해놨어.”


“네?”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심장이 있는 자리를 꾹 눌렀다.


거래처인 협회에 회사의 내부이야기를 꺼낼 순 없었다. 그녀도 더는 묻지 않았고 본인의 이야기만 하다가 미팅이 끝이 났다.


한 카페에서 세 시간.

나는 그녀가 한 집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침 눈을 떠서부터 잠들기까지 무엇을 하는지 협회 내에서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받는지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나만이.

듣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동안 사진을 보았다.


-오빠가 의사고 동생은 변호사인데도... 힘든 일이 있구나....


저장을 누른다.



대화


띵-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에 휴대폰에서 고개를 들어 층을 확인하자 또다시 한숨이 나온다. 시계를 들어보니 퇴근 시간은 아직도 한 시간 반 가량 남아있다.


급하게 열림버튼을 눌러 닫히려는 문을 다시 한번 연다.


“어디 갔다 와?"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던 김차장이.

나를 보고 있다.


두 손으로 휴대폰을 쥔 채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김부장이 지속적으로 언급하던 ‘저희’라는 단어가 스쳐간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히려 한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자 김차장이 먼저 손을 뻗어 문을 잡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온다.


“얘기 좀 하자.”


말을 하고는 뒤돌아 옥상으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른다. 나는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몸을 기댔다.

탑층에 닿기까지 몇 분도 되지 않은 시간이 한 시간도 훌쩍 넘는 것만 같다.



넌 왜 그래


하루가 저물어간다.

푸르지도 붉지도 않은 하늘에 양떼구름이 길게 줄지어 있다. 그 사이를 비행기가 지나간 것도 같은 구름 길도 보인다.


하늘 끝은 이미 붉은 데 내 머리 위는 아직도 파랗기만 하다.


-하늘은 진짜 넓구나.


“우리야.”


옥상에 올라오자마자 꺼내 문 담배 하나가 반이나 타들어가도록 말이 없다가 뜬금없이 이름으로 나를 부른다.


"그만두려고?"


두 팔로 의자를 짚고 앉아 다리만 까닥였다. 고개를 숙이니 부스러기 하나 짊어진 개미를 둘러싸고 개미들이 줄을 지어가고 있다.


"넌 꼭 그래야 해?"

"하......"


단체로 목적어 빼고 말하는 학교라도 다니는 건지.


"내가 안 부르면 나랑 끝까지 말도 안 할 거였어?"


"하... 뭔데.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온몸이 소금에 저린 파김치 같다.


"난 처음부터 너 의심 안 했어. 그럴 필요도 없고. 너같이 귀차니즘 끝판왕인 애가 무슨 투잡이야. 그리고 너를 믿겠냐. 태수말을 믿겠냐. 아니, 정확히는 태수도 아니고 태수 친구 놈."


다리를 꼬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런데 너는, 너는 나 의심했어 안 했어"

"뭘."


"너는. 나 믿었냐고."

어깨가 올라갈 만큼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너는 항상. 다른 사람한테 칼을 쥐어 주고. 판단하게 하고. 너는 아무 잘못 없고. 너는 당한 사람이고. 그런 걸 원해?"


빤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독기 없는 표정.


"뭔 소리야."


"너도 적극적으로 해명할 수 있잖아.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아예 안 믿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아무도."


"믿어야 돼? 이딴 식으로 나오는 거 뻔히 아는데 내가 믿어?"


"적어도 난 믿을 수 있지. 아니야? 우리가 그 정도밖에 안돼?"


"허, 네가 뭔데. 우리가 뭔데."


나의 비아냥 거리는 말투가 내 귀에도 들린다.


"김부장도 처음엔 안 믿었어, 태수가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지. 둘이 술 먹다가 니 얘기가 흘러나왔고. 그냥 웃으면서 넘어갈 수도 있는거야. 그런데 왜 갑자기 방향이 이상하게 간 줄 알아?"


"내 탓이라는 거야 지금?"


틈도 없이 대꾸했다.

그러자 그도 쉬지 않고 말을 한다.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꼭 뭔가 있는 사람처럼 구니까. 부장님이 정말 뭐가 있다고 생각한 거라고. 그래서 그 태수친구도 불러서 자세히 써보라고 하고 그 쇼를 한 거야."


"그래서 컴퓨터 본거야? 그게 할 짓이야?"


"하... 나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잘못한거 맞아. 부장님도 그건 후회하고 계셔."


"태수가 본 게 아니고?"


"그거야말로 네 편견이지."


"헐. 참나. 누가 됐든. 하... 정상이냐."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되는 거 아냐? 너도? 야. 우리가 다 10년 넘게 알았다. 태수만 이제 5년 된 거고. 태수를 떠나서도. 하... 그 정도는 서로 얘기할 수 있잖아, 어?"


나는 입을 꾹 다문채 앞만 노려보았다.


화가 아니라 안타깝다는 듯한 그의 표정도 보기 싫다.


대학 시절 호감을 가지고 있던 한 선배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썸을 끝내던 마지막 말.


'우리 너는. 꼭 상황을 만들고 어떻게 하나 보는 사람 같아. 네는 다가올 생각도 안 하고.'


밤 11시가 넘은 시각에 기숙사 앞에 잠깐 가네 마네, 그 정도의 얘기를 하는 통화였다.


'보러 갈까?'

'오고 싶으면 오세요.'

'가지 말까? 너 피곤하지 않아?'

'안 오고 싶으면 안 오셔도 돼요. 전 괜찮아요.'


담배를 꺼내 새로 불을 붙인 후에 김차장이 다시 말을 꺼냈다.


"이번엔 양쪽 다 실수 한 거야. 그러니까. 그만두지 마."


"나 같으면 절대 늬들처럼 안해."


"고차장. 아니 고우리."


"하......"


정말.

아무말도 하지 않아서.

더 괴로운 걸까.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하기 싫다.


어차피 다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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