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기억
구구단이었나.
아니, 조금 많이 어렸을 때였으니 단순 더하기였을 것이다.
2+2 같은.
받아쓰기나 국어 같은 경우는 만점 시험지를 잘도 들고 오면서도 산수는 유독 느렸다.
그날도 엄마가 낸 문제를 답하지 못하고 신나게 혼만 나다가 학원시간에 맞추어 피아노 학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혼이 난 이유보다도 엄마의 무서운 표정과 소리에 잔뜩 얼어붙었다. 하지만 '엄마 다녀올게!' 하고 씩씩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현관문을 나섰다.
가슴속에는 진흙 더미가 한 덩이 한 덩이 뭉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
집을 개조해 놓은 학원 문이 열리고 긴 파마머리의 학원 선생이 따뜻한 목소리로 '아유 우리 우리 왔어?'하고 웃음 짓는 것을 본 순간,
나는.
커다란 목소리로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리며 선생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꽉 막힌 올림픽 대로 위에서 나는 어린 날의 내 울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
한숨만 는다.
양쪽 창문을 열고 음악을 크게 틀었다.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은 지금, 그래도 미팅으로 잡힌 사람이 김실장이라 다행이었다.
+고차장님, 잘 지내시죠? 저는 요새 계속 야근하느라 정신이 없었네요.+
출근 직후 O 협회 김실장의 톡이 올라왔었다.
+실장님, 목디스크도 있는데.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럼요 ㅎㅎ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차장님, 우리 지난번 전시회 한 거, 정산 오늘 할까요?+
+실장님, 오늘 시간 되세요? 제가 갈게요.+
어떻게든 답답하고 무거운 사무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더라도 찾아가고 싶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따뜻하고 고운 사람이었다.
프린터에서 정산 서류가 출력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 그냥 그만둘까.
지잉-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무심코 돌아보자 김부장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쳐다봤다.
입술을 뜯으며 파일을 검색한다.
숨겨놓았던 파일 목록 중에 -1 이라고 써놓은 파일명을 클릭했다.
인쇄.
나는 출력된 종이를 결재판에 끼우고 막 김부장이 들어간 방문을 노크했다.
누군가 입력해 놓은 데이터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뇌가 따져볼 생각도 못한 채 나의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이미 책상에 앉아 높이 쌓인 결재서류를 펼쳐보고 있었다.
"차장님, 일찍 왔네요?"
"저 미팅 좀 다녀오겠습니다. O 협회요."
"네, 그러세요."
잠깐 입술을 깨물다가 말을 꺼냈다.
"그리고 이거."
"뭔데요?"
김부장은 내가 내민 결재판을 그 자리에서 열어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진심이에요?"
나는 대답 없이 시선을 오른쪽으로 고정시켰다. 그러자 바로 소리가 들렸다.
좍좍 찢는 소리.
내 사직서였다.
나는 김부장의 눈을 쳐다보았다.
"오후에 들어오시죠? 그때 다시 얘기 좀 하시죠."
"다녀오겠습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방문을 나왔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무것도 나를 흔들 수 없다는 듯이.
미팅
"실장님, 저 한 삼십 분이면 도착할 것 같아요. 사무실로 갈까요?"
길이 조금 뚫리기 시작하자 나는 김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그럼 그때 만났던 카페에서 볼래요?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네? 네 카페로 갈게요. 실장님, 이따 봬요."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진동이 울린다.
유나였다.
“어.”
“차장님, 어디 나가셨어요?”
“어, 외근.”
“아... 저 그럼. 지금 통화 잠깐 가능하세요?”
“어, 차야. 말해.”
“저 지금 부장님 실에 갔다 왔어요.”
낮고 은밀하게 말한다.
한숨이 먼저 나오고 음악소리를 최소로 줄였다.
“어.”
“저한테 차장님 하고 뭐 얘기한 거 없냐고 물으시더라고요.”
“헐......”
덥지도 않은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무슨... 사업 같은 거 얘기 들은 거 없냐고 묻는데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모른다고 했어요. 차장님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사업? 몰라. 왜 그러냐 진짜......"
“차장님, 그런데 저는 갑자기 그 생각이 나는 거예요, 저번에 차장님께서 친구분이 무슨 사업 시작했는데 저한테 그 회계처리 같은 거 물어보셨잖아요. 직원 도망가가지고 저한테 물어보셨던 거. 기억하시죠?”
“어? 어. 기억해. 그런데 몰라. 내가 지금 걔꺼 신경 쓸 때가 아냐. 그냥 돈 주고 맡기라고 해야지. 하..., 그래도 그때 고마웠어.”
“아니 그게 아니라요 차장님. 제가 슬쩍 봤는데, 부장님 책상 위에 무슨 종이 하나 올려진 게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그 누구냐. 그 태수씨 친구 있잖아요, 얼마 전부터 알바하는... 그 친구 이름이 적혀있던데요? 오치현이던가. 이름 특이한 애. 왜 걔이름이 거기 있죠?"
“응?”
갑자기 한번 완성했던 퍼즐처럼 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비상계단에서 친구와 통화를 했었다.
꽤 오래.
그리고 전화를 끊는 순간 위층에서 내려오는 아르바이트생을 마주쳤었다.
태수의 친구라는 애.
'아, 한번 맡겨보세요. 얘 회사에서 일해본 적은 없는데, 간단한 서류 분류는 할 수 있죠. 그래도 대학은 나왔어요. 돈은 조금 줘도 돼요. 아니, 아예 안 줘도 돼요!'
한 달짜리 단기 알바였다.
아, 마주친 날이 자동로그인이 켜진 그날... 하루 전이었나.
-그래도. 설마.
카페 앞 주차장에서 막 기어를 P로 옮기자마자 골목 앞으로 김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실장님."
나는 서둘러 차에서 나와 그녀를 부르며 환하게 웃었다. 김실장도 마주 보며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다가와 팔짱을 꼈다.
“들어가요, 뭐 먹을래요? 내가 사줄게.”
“에이, 아니에요. 제가 살게요.”
“아니야, 내가 살게,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래”
“아니, 맨날 사시면서.”
아메리카노와 라테, 그리고 치즈케이크 두 조각을 주문하고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김실장은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내 눈을 한참을 응시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엷게 미소 지었다.
“차장님, 무슨 일 있어요?”
“네? 아뇨, 왜요?”
“아니... 오늘 좀... 슬퍼 보이네. 아까 바로 온다고 한 것도 그렇고.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데. 나는 요즘 엄청 힘들거든요. 호호 사실 오늘은 일 얘기 아니라 그냥 떠들고 싶었어”
“아... 네, 아! 아...."
나는 왼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프린트해 놓은 정산서류를 그대로 프린터 위에 올려놓고 온 것이 생각났다.
“아, 대체 정신을..., 아 죄송해요.”
“아니야, 정말 괜찮아. 오늘 일 얘기 안 할 거라니깐?”
입술을 깨물었다.
좋은 건 좋은 거고, 못한 건 못한 거니까.
진동벨이 울린다.
“아, 제가 가져올게요.”
실장이 엉덩이를 띄기 전에 바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주문대로 향했다.
-으, 무거워. 아, 조심조심.
쟁반을 들고 천천히 테이블로 걸어와 커피 한 잔을 김실장 앞으로 놓는 순간 물기에 손이 미끄러진다.
"아, "
외마디 소리와 함께 커피가 쏟아지며 테이블 밑으로 반 이상이 순식간에 흘러내린다.
“아, 괜찮아 괜찮아. 차장님 괜찮아?"
김실장은 반사적으로 유리컵을 바로 세우고 일어나서 휴지를 챙겨 왔다.
커피를 쏟은 당사자인 나는 오히려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정지해 있다.
“죄송해요. 실장님, 죄송해요. 옷에 묻었죠?”
“아니, 괜찮아. 안 묻었어. 이거 그냥 화장실 가서 좀 문지르면 돼.”
그녀의 아이보리색 재킷 끝자락에 검은 물이 튀어있었다.
“죄송해요.”
“괜찮다니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아......”
김실장이 웃으며 내 손을 잡는다.
따뜻하다.
순간,
둑이 무너진다.
그녀는 내게 손수건을 건넸고,
나는 손수건으로 두 눈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