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3

붕괴

by 아는개산책
기억


구구단이었나.

아니, 조금 많이 어렸을 때였으니 단순 더하기였을 것이다.


2+2 같은.


받아쓰기나 국어 같은 경우는 만점 시험지를 잘도 들고 오면서도 산수는 유독 느렸다.


그날도 엄마가 낸 문제를 답하지 못하고 신나게 혼만 나다가 학원시간에 맞추어 피아노 학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혼이 난 이유보다도 엄마의 무서운 표정과 소리에 잔뜩 얼어붙었다. 하지만 '엄마 다녀올게!' 하고 씩씩한 목소리로 말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가슴속에는 진흙 더미가 한 덩이 한 덩이 뭉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


집을 개조해 놓은 학원 문이 열리고 긴 파마머리의 학원 선생이 따뜻한 목소리로 '아유 우리 우리 왔어?'하고 웃음 짓는 것을 본 순간,

나는.


커다란 목소리로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리며 선생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꽉 막힌 올림픽 대로 위에서 나는 어린 날의 내 울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


한숨만 는다.


양쪽 창문을 열고 음악을 크게 틀었다.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은 지금, 그래도 미팅으로 잡힌 사람이 김실장이라 다행이었다.


+고차장님, 잘 지내시죠? 저는 요새 계속 야근하느라 정신이 없었네요.+


출근 직후 O 협회 김실장의 톡이 올라왔었다.


+실장님, 목디스크도 있는데.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럼요 ㅎㅎ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차장님, 우리 지난번 전시회 한 거, 정산 오늘 할까요?+

+실장님, 오늘 시간 되세요? 제가 갈게요.+


어떻게든 답답하고 무거운 사무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더라도 찾아가고 싶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따뜻하고 고운 사람이었다.


프린터에서 정산 서류가 출력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 그냥 그만둘까.


지잉-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무심코 돌아보자 김부장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쳐다봤다.

입술을 뜯으며 파일을 검색한다.


숨겨놓았던 파일 목록 중에 -1 이라고 써놓은 파일명을 클릭했다.


인쇄.


나는 출력된 종이를 결재판에 끼우고 막 김부장이 들어간 방문을 노크했다.


누군가 입력해 놓은 데이터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뇌가 따져볼 생각도 못한 채 나의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이미 책상에 앉아 높이 쌓인 결재서류를 펼쳐보고 있었다.


"차장님, 일찍 왔네요?"


"저 미팅 좀 다녀오겠습니다. O 협회요."


"네, 그러세요."


잠깐 입술을 깨물다가 말을 꺼냈다.


"그리고 이거."


"뭔데요?"


김부장은 내가 내민 결재판을 그 자리에서 열어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진심이에요?"


나는 대답 없이 시선을 오른쪽으로 고정시켰다. 그러자 바로 소리가 들렸다.


좍좍 찢는 소리.


사직서였다.


나는 김부장의 눈을 쳐다보았다.


"오후에 들어오시죠? 그때 다시 얘기 좀 하시죠."


"다녀오겠습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방문을 나왔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무것도 나를 흔들 수 없다는 듯이.



미팅


"실장님, 저 한 삼십 분이면 도착할 것 같아요. 사무실로 갈까요?"


길이 조금 뚫리기 시작하자 나는 김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그럼 그때 만났던 카페에서 볼래요?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네? 네 카페로 갈게요. 실장님, 이따 봬요."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진동이 울린다.

유나였다.


“어.”

“차장님, 어디 나가셨어요?”

“어, 외근.”

“아... 저 그럼. 지금 통화 잠깐 가능하세요?”

“어, 차야. 말해.”

“저 지금 부장님 실에 갔다 왔어요.”


낮고 은밀하게 말한다.

한숨이 먼저 나오고 음악소리를 최소로 줄였다.


“어.”

“저한테 차장님 하고 뭐 얘기한 거 없냐고 물으시더라고요.”

“헐......”


덥지도 않은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무슨... 사업 같은 거 얘기 들은 거 없냐고 묻는데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모른다고 했어요. 차장님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사업? 몰라. 왜 그러냐 진짜......"


“차장님, 그런데 저는 갑자기 그 생각이 나는 거예요, 저번에 차장님께서 친구분이 무슨 사업 시작했는데 저한테 그 회계처리 같은 거 물어보셨잖아요. 직원 도망가가지고 저한테 물어보셨던 거. 기억하시죠?”


“어? 어. 기억해. 그런데 몰라. 내가 지금 걔꺼 신경 쓸 때가 아냐. 그냥 돈 주고 맡기라고 해야지. 하..., 그래도 그때 고마웠어.”


“아니 그게 아니라요 차장님. 제가 슬쩍 봤는데, 부장님 책상 위에 무슨 종이 하나 올려진 게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그 누구냐. 그 태수씨 친구 있잖아요, 얼마 전부터 알바하는... 그 친구 이름이 적혀있던데요? 오치현이던가. 이름 특이한 애. 왜 걔이름이 거기 있죠?"


“응?”


갑자기 한번 완성했던 퍼즐처럼 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비상계단에서 친구와 통화를 했었다.

꽤 오래.

그리고 전화를 끊는 순간 위층에서 내려오는 아르바이트생을 마주쳤었다.

태수의 친구라는 애.


'아, 한번 맡겨보세요. 얘 회사에서 일해본 적은 없는데, 간단한 서류 분류는 할 수 있죠. 그래도 대학은 나왔어요. 돈은 조금 줘도 돼요. 아니, 아예 안 줘도 돼요!'


한 달짜리 단기 알바였다.


아, 마주친 날이 자동로그인이 켜진 그날... 하루 전이었나.


-그래도. 설마.


카페 앞 주차장에서 막 기어를 P로 옮기자마자 골목 앞으로 김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실장님."


나는 서둘러 차에서 나와 그녀를 부르며 환하게 웃었다. 김실장도 마주 보며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다가와 팔짱을 꼈다.


“들어가요, 뭐 먹을래요? 내가 사줄게.”

“에이, 아니에요. 제가 살게요.”

“아니야, 내가 살게,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래”

“아니, 맨날 사시면서.”


아메리카노와 라테, 그리고 치즈케이크 두 조각을 주문하고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김실장은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내 눈을 한참을 응시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엷게 미소 지었다.


“차장님, 무슨 일 있어요?”

“네? 아뇨, 왜요?”

“아니... 오늘 좀... 슬퍼 보이네. 아까 바로 온다고 한 것도 그렇고.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데. 나는 요즘 엄청 힘들거든요. 호호 사실 오늘은 일 얘기 아니라 그냥 떠들고 싶었어”


“아... 네, 아! 아...."


나는 왼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프린트해 놓은 정산서류를 그대로 프린터 위에 올려놓고 온 것이 생각났다.


“아, 대체 정신을..., 아 죄송해요.”

“아니야, 정말 괜찮아. 오늘 일 얘기 안 할 거라니깐?”


입술을 깨물었다.

좋은 건 좋은 거고, 못한 건 못한 거니까.


진동벨이 울린다.


“아, 제가 가져올게요.”


실장이 엉덩이를 띄기 전에 바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주문대로 향했다.


-으, 무거워. 아, 조심조심.


쟁반을 들고 천천히 테이블로 걸어와 커피 한 잔을 김실장 앞으로 놓는 순간 물기에 손이 미끄러진다.


"아, "


외마디 소리와 함께 커피가 쏟아지며 테이블 밑으로 반 이상이 순식간에 흘러내린다.


“아, 괜찮아 괜찮아. 차장님 괜찮아?"


김실장은 반사적으로 유리컵을 바로 세우고 일어나서 휴지를 챙겨 왔다.

커피를 쏟은 당사자인 나는 오히려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정지해 있다.


“죄송해요. 실장님, 죄송해요. 옷에 묻었죠?”

“아니, 괜찮아. 안 묻었어. 이거 그냥 화장실 가서 좀 문지르면 돼.”


그녀의 아이보리색 재킷 끝자락에 검은 물이 튀어있었다.


“죄송해요.”

“괜찮다니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아......”


김실장이 웃으며 내 손을 잡는다.

따뜻하다.


순간,

둑이 무너진다.


그녀는 내게 손수건을 건넸고,

나는 손수건으로 두 눈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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