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2

균열

by 아는개산책

말하는 자와

말하지 않는 자의 싸움은

어떻게 끝이 날까.


말로 증명하는 것은

말로 증명 될 수 있는 것인가.


이길 생각이 없다면

굳이

필요 없는 것이

맞는가.


말은

무엇인가.



침묵


자리에 앉아 밤 사이 쌓인 메일에 기계적으로 회신을 한다. 메일을 쓰고 있지만 무슨 내용을 쓰고 있는지 정확히 머리에 들어오진 않는다. 그래도 큰 이상은 없을 것이다. 늘 하는 일이고 늘 하는 말이니까.


-대체 왜.


김부장과 태수의 뒤로 김차장까지 출근을 하고서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다. 언제 출근을 하는지 출근을 해서 무엇부터 하는지 관심 있게 지켜본 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은 신경이 쓰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거슬린다. 상당히.


부장실 문이 열리며 김부장이 나온다.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김부장은 곧장 김차장에게로 가서 손짓을 한다. 김차장은 김대리에게 눈짓을 한다.

셋은 나란히 줄을 선 모양으로 사무실 문을 나간다.

내 머리는 모니터를 향해있지만 그 모든 눈짓과 시선이 그대로 그려진다.


사람의 눈은 보이는 것만 보는 게 맞을까?


-아, 짜증 나네.


왜 이토록 신경이 곤두서는 건지.


-이직?


이직제안은 이 업계에선 흔한 일이다.

며칠 전엔 구체적인 연봉제안도 있었다는 게 다르다면 다르지만.


컴퓨터 안의 파일을 뒤져본다.

만화책뷰어가 나온다.


삭제.


유나의 문자가 올라온다.


+차장님, 컵라면 먹은 거 태수씨래요.+


-태수가?


태수라면 아무 때고 남의 자리에 앉아 자기 거처럼 컴퓨터를 만지곤 한다.

가십도 좋아하지만 사건을 만들어 내는 데도 일가견이 있다.


-그래도 밤 12시? 다시 와서? 짱나네.


검색을 시작한다.


-뭐라고 치지.


‘회사 컴퓨터를 누가 본 것 같아요. 사생활 침해. 불법'


경험이 많지 않은 자의 검색명이다.


-아, 회사컴퓨터는 회사자산이고... 아... 잠가놓지 않으면 불법이 아니라고? 아 씨.


'컴퓨터 비밀번호 하는 법'


검색한다.



호출


오후가 다 되어가자 나는 이미 오전의 기분이 흐릿해지고 텐션이 올라온다.


-오늘은 뭘 먹지...


점심을 마친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오며 사무실 안도 조금씩 소란해진다. 두서없이 오가는 농담 속에도 김차장은 하루 종일 말이 없다. 장난 한번 걸지 않으면 입에 가시라도 돋을 듯이 굴던 놈이. 태수마저 오전 내내 굳은 표정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차장님, 잠깐 얘기 좀 하시죠. 아래층 엑스카페에 있을게요.+


김부장의 문자가 도착했다.


따로 준비할 것이 없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아래층으로 향한다.


평소에도 사람 보기 힘든 카페이다.

창가 쪽 구석진 자리에 김부장이 앉아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차장님. 식사 잘했어요?"

"네."


"혹시, 저한테 하실 말씀 없어요?"


테이블에 다이어리를 펼치고 볼펜을 든 채 나를 응시한다. 곧이어 미리 주문해 두었는지 카페 점원이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온다.


"부장님은요?"


서로가 뭘 알고 있는지 먼저 말할 생각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 인 듯하다.


"월급이... 적어요?"


-월급? 갑자기?


두 눈길이 부딪혔지만 아무도 먼저 피하지 않는다.


"지금 저한테 그냥 솔직하게 말하셔도 돼요. 우리가 다른 사람한테 무슨, 뭘 들을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한 템포를 쉬었다가 대답한다.


"뭐를요?"


"하..."


음악이 흐르는 조용한 카페에 두 사람의 눈동자만이 서로의 눈동자를 쫓아 움직인다.


"잘못한 게... 없다고요?"


"잘못?"


회사원이 질책을 받을 만한 일은 뭐가 있더라.


목덜미가 무겁게 눌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차장님, 저희 오래됐잖아요."


"네."


"그런데도 저는 차장님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어요."


나는 가만히 그의 표정을 훑어보다가 천천히 아메리카노를 들었다.


오늘도 역시 탄 맛이 난다.

신선하지 않다.


"그래도 저희는 같은 편이라고 늘 생각했거든요."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몸은 때로 이성보다 빠르게 반응한다.


"차장님이...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사실대로 말해주면 저희도 그냥 덮고 가려고요."


김부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단정 지어 말은 하지만 아무것도 확신이 없는 어투다.


"저희랑 계속 같이 할 생각 있어요? 서로 숨김없이?"


-저희...? 니네 웃긴다.


회사가 전쟁터라는 말은 그냥 나온 게 아닌가 보다.

가만히만 있어도 편은 갈라지고 총알은 날아온다.


말없이 상대편 테이블 끝을 바라본다.

팔짱을 끼고.

얼굴의 근육을 모두 풀어 표정을 지웠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에서 벗어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것이 무엇이던.

이젠


예전 같아질 순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 컴퓨터는 왜 만졌는데.


"시간, 필요해요?"


말하지 않은 것이야 많다.

대부분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니까.

다만 이렇게 갑자기 사람을 들볶는 이유가 궁금하긴 하다.


그럼에도 '왜'를 묻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은 뭘까.


내가 태도의 방향을 정하기 전에,

무슨 일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다.


"그럼, 좀 이따 다시 얘기하시죠. 준비되시면 말씀해 주세요."


도통... 1부터 10 도 아닌 0에서 0 까지도 모르겠는 말만을 남기고 우리는 사무실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정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다만 이번엔

더욱 간절히.


말을 한다는 건,

연을 이어가겠다는 뜻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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