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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아저씨(1)

잘 지내나요.

by 아는개산책

오래 알고 지낸 사람. 믿을 수 있어?

자기 이익이 우선인 사람. 믿을 수 있어?

힘들 때 도와주는 사람, 믿을 수 있어?


그럼 정의부터 다시 내려봐.

오래는 얼만큼이야?

자기 이익 우선은 이기적인 거야, 아니면 영리한 거야?

얼만큼 까지 도와주면 내어주는 거야?


그리고 난, 믿으면 언제까지 믿어 줄 수 있는데?


모두 웃긴 말장난.



첫 출장 티켓


제발제발제발.

저요저요저요.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조금 전, 심주임의 출장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고, 팀장은 팀원들을 둘러보며 대타를 찾는다.


(이제 겨우 입사 세 달이다. 너겠냐.)


고개를 푹 숙인다. 그래도.


"고주임? 가볼래?"


고개를 번쩍 들어 팀장을 본다, 그리고 심주임을 본다.


"아, 고주임이 가면 되겠네. 지금 특별히 하는 일 없죠"

웬일로 심주임이 거들어준다.


"네 네네,"


팀장은 집게손가락만으로 나와 심주임을 번갈아 가리키며 인계하라는 수화를 한다.


(너무 좋은 티 내지 마, 놀러 가는 거 아니고 일이야, 아무 말도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해? 놀러 가냐?"


(하지 말라니깐.)

죄 없는 입술을 깨물며 모니터로 시선을 옮긴다.


"제가 서류는 파일로 보내놓을게요, 이번에 업체가 많지 않아서 할 건 많이 없어요. 그냥 놀러 가는 거야."


심주임이 나를 향해 몸을 기울여 얘기하자 조용히 있던 정주임도 돌아본다.


(정)"거긴 일이 문제가 아니지, 살아 돌아오는 게 문제지"

은밀히 얘기한다.


"?"


(심)"아 맞다, 거기서 얼마 전에 누가 실종 됐다고 들었는데?"


(실종?)


(정)"아니, 시체로 발견 됐다고 안 했나? 나 기사봤어"


(시체??)


(심)"주임님, 조심해야 할 거예요. 꼭 보험 들고 가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 뭐야. 보험은 들거지만.."


"장난 아냐, 진짜야. 거기 조선족도 많고, 택시 아무거나 탔다가 없어지는 사람 많대요."

부러 속삭댄다.


"하하 그만해 심주임, 고주임 진짜 안 간다고 하면 어떡해."


듣다보니 참 실없다. 일이나 하려 의자를 당기는데,


"아, 중요한 거 있어요. 이번꺼 협회 같이 가잖아. 거기 담당자가 여자라서. 잘, 응? 잘 저기하고 와야 돼"


"잘?"


"응, 그 여자가 업체선정은 다 한대요, 그러니 그분이랑 친하게 지내봐요."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3개월 매일 본 사람들과도 데면하다 난.)


"아뇨, 전,"

"그게 다 영업이야. 할 수 있죠? 파이팅! 참, 그분 엄청 까다로워, 고주임이랑 잘 맞을 거예요."


남자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할애한 시간이 아깝다.


-까다롭다라... 남자들이 까다롭게 보는 여자는, 어떤 여자지?"


잠깐 곱씹어는 보지만, 역시 첫 출장이라 설레는 마음이 우선 하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까다로운 여자


낯선 나라는 특유의 냄새가 먼저 반긴다.

이방인이라 맡을 수 있는 냄새일까?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어 적응할 준비를 한다.


작은 가방을 질끈 고쳐 메고, 짐 찾는 곳을 지나 밖으로 나갈 문을 찾아 두리번 거려본다.


전시 참가 업체들은 단체로 버스를 대절했을 테니, 버스비를 따로 지불하지 않은 나는 빨리 택시를 타고 빠져나가는게 서로 안 마주치고 좋다.


"저, 혹시."

한국말이다.

업체인가?


바로 인사할 준비를 하고 뒤돌아 보자, 사람 좋은 웃음이지만 뭔가 조심스러운 표정의 한 남자가 서있다.


"이번 광저우 부품전시회 건으로 한국에서 오신 분 맞으시지요?"

희안하게 마음이 놓이는 목소리다.


"차량이 저 앞 쪽에 대기 중 입니다, 다 모이면 함께 출발하시죠,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니요, 저는, 택시.."

손사래를 하는데,


"저, 혹시. 고주임 님이세요?"

이번엔 여자 목소리.


너무 오래 지체했다. 바로 나갔어야 아무도 안마주치는 건데..


"아, 안녕하세요."

허리부터 굽힌다.

얼굴이 예쁘다.


"네, 이번 전시회 담당자, 김성희라고 합니다, 서주임님이 못오고 다른 여자분이 나오신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출국장에선 안보이시더라고요"


"네, 제가 좀 빨리 들어갔어서요, 죄송합니다, "


"아니요, 그런 말은 아니고. 그래도 같은 호텔이시죠? 저희랑 같이 버스 타고 가세요. 오과장님! 오과장님!"


말하다 말고 내 등 너머에 대고 크게 외치니, 멀찍이 키가 큰 남자 한 분이 안경을 고쳐올리며 돌아본다.


(혼자 가긴 이미 틀렸다.)


가까운 거리인데도 헐레벌떡 뛰어오는 시늉을 하는 게 나와 같은 '을' 구역인가 보다.


"네, 과장님, "

"오과장님, 버스 남는 자리 있죠? 이분 저희 전시 도와주시는 분인데, 같이 타고 가도 되죠?"


옆에서 눈치 못 채게 고개를 작게 도리도리 해보지만,


"네, 그럼요 과장님, 아, 저기 버스 같이 타고 가시죠. 어차피 호텔도 같은데." 하며 양손으로 버스를 가리킨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짓지만 눈은 웃질 않고 입만 웃고 있다.


"아, 네에.. 감사합니다."


나 역시 억지웃음 지으며 답한다.

업체와 함께라면 버스 안도 근무처다.

한 시간 연장근무.


그렇게 버스를 올라타고, 내가 잘해야 하는 협회 담당자, 김성희 과장은 묻지도 않고 옆자리에 털썩 가방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질문 지옥이 시작된다.


귀로 들으며 열심히 그녀의 눈을 맞춰준다.

-가까이서 보니, 더 예쁘네.


종알종알 쉬지 않는 그녀의 빨간 입술로 자꾸만 시선이 간다.


좌우대칭이 완벽한 얼굴에 하얀 피부. 그리고 거기에 대비되는 까맣고 긴 생머리.

눈썹은 흔히들 말하는 갈매기에 입술은 미인도에서나 보던 입술 같이 유려하다.


"왜에? 나 입술 너무 빨개요? 이거 공항에서 산 건데, 한번 발라 볼래요? 색이 괜찮더라고, 요즘 이런 색이 유행인가? 처음 사봤는데, 어때, 잘 어울려요?"


질문은 많지만 모두 나를 향한 질문은 아니다.


-아니 이렇게 상큼 발랄 시끄러운 아가씨가 어디가 까다로운 거지? 다른 담당자랑 헷갈렸나.


"과장님은. 정말 예쁜 것 같아요."

칭찬은 쉽게 말하는 것이 좋다.


"어머, 어머 정말. 난 코가 맘에 안 들어서 여름휴가 때 코는 고쳐보려고요 헤헷 비밀이에요"

그녀는 조금 더 신이 난다.


이런 캐릭터면 비밀은 나에게서가 아니라 본인으로부터 깨질 것이다.


어릴때 연예인을 잠깐 준비했었다는 것만 봐도, 지나가다 한 번씩 고개 돌려 다시 볼 얼굴이다. 그러면서도 이런 공기업에서 일하는 걸 보면 머리까지 좋은 게..


신은 또 한 스푼 더 넣는 실수를 여기다 하셨나 보다.


괜스레 착잡한 마음에 귀는 열어 둔 채로 앞을 본다.

때마침, 처음 나를 불러 세웠던, 인상 좋은 아저씨가 일어나 마이크를 들고 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의 일정을 도와 안내할 000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곳을 지나가면서 간략한 안내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가이드였구나..

수줍어 하시네.

그래도 저분은 진짜 미소를 짓고 있다.


"아.. 조선족인가 보네."

옆에서 작게 말한다.


"네?"

심주임과 정주임의 대화가 퍼뜩 스친다.


"말투가 조선족인가 본데? 이따 물어봐야겠다."

성희과장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거울을 들어 예쁜 얼굴을 비춰본다.


-조선족..


그 후로도 몇 번 고막이 아프긴 했지만, 이런게 다 영업이다.

들어주는 것이 힘!

그리고 어떤 여정이던 끝은 있다.


"자, 호텔 앞에 도착했습니다, 한분씩 내려서 로비로 가시면 아까 인솔한 오과장님이 방 키를 하나씩 나눠 드릴예정입니다. 내리시면 되시겠습니다."


설명에 하나 둘 내리는데, 아구 아구 소리가 난다.


"과장님, 내리실까요?"

"어, 고주임, 나랑 같은 방 쓰자! 응?"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이미 말도 놓았다.


"네, 네."


나는 결정권 없는 '을' 일뿐.

하지만 싫지도 않다.

예쁜 여자는 나도 좋아.


가이드를 뒤로 하고 마지막으로 내려 조금 걸어가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선생님,"


나는 아니겠지, 하면서도 몸이 돌아본다.


"아, 저 이거 두고 내리셨는데, 이거 선생님꺼 맞으신가요?"


아, 내 휴대폰.


"감사합니다. 정말 큰일날 뻔 했네.."

하면서 손을 내미는데 왠지 닿을 것 같아 주춤 된다.


(왜이러지?)

지금, 난 실례했다.

하지만 손이 바로 뻗어지진 않는다.


"아, 여기 놓을게요, 가져가세요, 전 저기 정리하러 가보겠습니다."

괜찮다는 듯 옆 화단에 살며시 올려놓고 발걸음을 돌린다.


"아. 저.. 감사합니다. 저.. 어 직함이..?"


약간 어깨를 굽힌채 걷던 그분은 돌아서서 예의 그 따뜻한 눈웃음을 짓는다.


"그냥, 아저씨라 부르세요 선생님."


"아, 그럼 저도 그냥 고주임이라고 불러주세요. 선생님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네네"

다시한번 내가 무례한 건 없었다는 듯이 눈이 안보이도록 미소 지으며 로비로 걸어간다.


그냥 아저씨..


뒷모습을 보는데 시선 끝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성희과장이 보인다.

참. 해맑은 미녀다.


-나.. 친해지라는 미션은 완료 한거 같아. 심주임.


가방을 다시한번 고쳐메고 그녀를 향해 걸어간다.


.

.

(2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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