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흐르게
소중히 여겨지는 마음을 설명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한 단어로 충분하지 않아.
그러니,
갇히지 말아.
단어의 정의 따위.
아름다운 시간
중국이 처음이니 광저우는 더욱 처음이다.
하지만, 시장은 어딜 가나 비슷한 톤의 에너지를 유지한다.
그래서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굳게 닫힌 문에도 스며들 것 같은 산만한 웃음들이 좋다.
"와우, 냄새"
...
"네, 냄새가 좀 있죠?"
한 발짝 반씩 뒤쳐지는 아저씨가 한 박자 반 늦게 답한다.
냄새보다 더 빨리 와닿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말린 머리들, 내장들 기타 등등 그리고 고르지 못한 바닥과, 바닥에서 뭐가 밟힐지 모른다는 은근한 두려움.
(내 신발 비싼건데..)
"주임님, 보이차 사야 한다 하셨죠? 제가 몇 군데 아니까 한 군데서 사지 말고 따라오세요."
물론 나를 위한 보이차는 아니다.
"아 전시 마지막날에 참가업체들한테 선물로 보이차 하나씩 돌리고 싶은데, 난 내내 전시장에 갇혀 있어야 돼서, 저녁엔 만찬 행사 준비도 해야 하는데 말이야."
성희 과장은 밤새 같은 이야길 여러 번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네에. 제가 대신 사 올게요.."
나는 반쯤 졸며 의무적으로 대답했었다.
그렇게 몇 시간 못 잤는데도 눈이 일찍 떠졌다.
오늘의 미션이 또 있으므로-
로비에서 나 홀로 열심히 서치를 해본다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잘 주무셨어요?"
"아, 네에"
반쯤 일어난 자세로 꾸벅.
"네에,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하고 지나가는 아저씨를 불러 세운 건 나였다.
"아저씨, 혹시 보... 무슨 차인데 유명한 차 아세요?"
"차 필요하십니까?"
헤헤, 끄덕끄덕.
그렇게 우린 각자의 오전 업무를 마치고 점심시간에 맞추어 함께 시장에 나왔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좀 무서웠는데.
쉽게 도와준다 하니
빛보다 빠르게 풀리는 마음의 빗장.
드디어 나를 앞장서 걷기 시작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하얀 셔츠에 아이보리 점퍼가 그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느낌과 잘 어울린다.
-무서워 보이지가 않아. 조선족이라도 다 다른가?
그는 모퉁이에 작은, 구멍가게 같은 곳이 나오자마자 불쑥 안 쪽 카운터로 들어가 버린다.
-이런데가 보이차 집?
가게 앞에는 분명 말린 지네 같은 것이 잔뜩 걸려 있고, 안에선 샤벗 만드는 기계가 뱅뱅 함께 돌아가고 있다. 따라 들어갈 용기는 없이 빼꼼히 안 쪽을 들여다본다
가게 주인은 아저씨와 아는 사이라도 되는 듯이 함박웃음 지으며 또 시선을 내게 머물리고 있다.
-편한 사람이랑 있을 땐 저렇게도 웃네.
눈이 감길 듯 웃으며 얘기하는 아저씨의 표정이 편안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내쪽으로 다가와 준다.
"주임님, 여기 사장님이 지금 뭐라 하는지 알아요?"
고개만 저어 본다.
"주임님이 예쁘대요."
말하며 다시 아이처럼 키득댄다.
(아저씨. 그런 말 하고 바로 웃음 어떡해.)
"아, 네에."
"여기 시장 오는데도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요. 예뻐서 그런 거예요."
이, 동네 시장에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시나?
여긴 다 엄마뻘 아니면 할머니 할아버지인데... 그중 제일.. 이라는건가.
주인아줌마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웃으며, 꼬치 하나를 건넨다.
뭐라 뭐라 중국어로 계속 말하고 있지만 적어도,
-나 납치해서 몰래 팔자거나 그런건 아니겠지..?
보기보다 더 쓸모없는 몸입니다.
"그거, 닭 턱 쪽. 볼살이에요. 맛있어요. 먹어봐요."
불안한 눈빛을 읽은 아저씨가 얘기한다.
하지만, 닭도 볼이 있었는지 물어볼 때가 아니다.
일처리가 우선인 나는 한시가 급한 사람이다.
"저.. 이럴 시간이."
"네네, 바로 보이차 집으로 갈 겁니다 주임님, 걱정 마십시오."
그제야 아저씨는 마저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와 앞장선다.
그 이후에도 여기저기 아는 인사를 하는 게, 꽤 다감이 살아온 사람인걸까.
이번엔 진짜 보이차 가게로 들어간다.
입구의 향부터가 다른 게.
문득,
함께 전시장을 나오는 아저씨의 뒤에 대고 늦지 말고 오라던 오 과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떠오른다.
(빨리 차만 사가지고 나가자.)
하지만,
하얀 천 조각 사이 너머 안쪽에서는 주인과 아저씨가 차 한 모금.
그리고 내려놓고. 또 한 모금.
그리고 진지하거나 다정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다.
기십여분 후에나 천을 걷고 나온 아저씨는 이제부터 차를 시음해보자 한다.
끓이고 따르고 식히고 잔을 옮기고.
-그걸 또 기다리라고?
"아저씨, 저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안 마셔도 괜찮아요. 믿고 살게요."
"아이, 아닙니다 주임님, 똑같은 이름이어도 맛이 다 다르고 향이 다 달라요, 같은 차래도 수십 종류가 있으니까 다 드셔보세요. 시간은 많습니다."
"수십?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음. 그럼 제가 가장 괜찮은 걸로 한 세 가지만 골라볼게요. 그거 드셔보시고, 결정하세요"
차부심을 가지고 있는 주인은 옆에서 여유 있게 차를 우리고 있고,
두 번 세 번 거절은 예의가 아닌 듯하다.
결국 그곳에서 한 시간 여가 더 소요되었다.
생각보다 지체된 시간에, 결국 내가 보고 싶었던 기념품 열쇠고리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저녁 만찬 장소로 바로 이동하기로 한다.
그렇게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차에 올라타 문을 탁 닫는데 아저씨의 전화가 울린다.
+아이씨 × 뭐 하는 분입니까? 5시까진 와서 세팅해야는데 어디예요 지금?
전화기 밖까지 날라드는 짜증섞인 목소리.
(오과장님?)
"네, 지금 이제 들어가는 중입니다. 과장님"
그 후로도 알아듣지 못할 상스러운 말들이 섞여 흘러나왔지만, 아저씨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차분하다.
나 혼자 아저씨가 민망할까 고개를 돌려 창 밖만 본다.
"네, 빨리 들어가겠습니다. 과장님."
겨우 전화를 끊고 출발하려는 아저씨에게 나도 해야 할 말을 전한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아닙니다 주임님, 업체들 필요한 거 사시는 거면 제 일이도 합니다. 제가 여기 제일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부담 갖지 마세요. 금방 가면 됩니다."
"네. 죄송합니다."
하하, 또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시동을 건다.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시동 거는 모습마저도 느리게 흘러가는 건 기분 탓일까.
"저, 조금만 빨리 갈까요?."
"하하, 빠를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전혀 속도를 낼 생각이 없는 안정적인 속도.
좋지만.
불안하다.
불안하지만.
아저씨의 느릿함이 어딘지 모르게 나를 안심시키기도 하는 듯한.
"주임님은 항상 빠르게 움직이시죠? 제가 너무 느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그리고 오늘은 제가 시간 뺏은 거라 제가 죄송하죠."
"하하, 그건 괜찮습니다. 이건 다른 얘기지만, 너무 급하게만 가시면 얼굴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느릿느릿. 하지만 또박또박 말하는 아저씨.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아저씨를 돌아본다.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다 못 보고 지나가면 주임님 예쁜 표정도 금방 사라집니다"
안정적으로 운전 하면서 계속 다정한 말을 한다.
"저는 그렇게 예쁜 얼굴이 아닌데요.."
"하하, 네에. 주임님 얼굴도 예쁘지만. 주임님 주변에 모든 것들이 지금 다 아름답습니다. 조금 천천히 가면 다 느끼면서 지나갈 수 있어요."
말은 느릿한데 운전은 수준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수준급 이었나.
하지만 나는 그런 도 닦는 말엔 취미가 없다.
빨리 오늘도 무사히 일을 마치고 침대에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만찬장에서 오 과장이 소주병을 들어 그를 위협하는 것을 보기 전까진 분명-
평온했으니까.-
알수 없는 불안감.
그리고 따뜻함.
모든 순간은 이중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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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