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테이크 war
(1,2편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과장님은 아무도 안 싫어할 거 같으세요?"
뜬금없는 공격에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본다.
"엥? 넌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해, 술자리에서 ㅋㅋ"
지영을 툭치며 나를 바라본다.
그냥 묻힐 수도 있는 얘기를 확실시 거드는 것은 오히려 유과장이다.
"왜?"
대답이 곱지 않다. 나도 그릇이 이 정도인가 보다.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적이 많냐고 물을 수 있는 거 아닌가 해서요."
나를 보지도 않고 눈앞의 안주를 골라내며 말을 잇는다.
(쟤가 저런 식의 말을 할 줄 아는 애였나)
"과장님, 그런데 무슨 문자 왔어요?"
답을 고르는 사이, 은희가 분위기를 바꿔보려 끼어든다. 그게 오히려 독인 줄 모르고.
"어, 발신번호 없이 문자가 계속 와."
맞은편에 앉은 지영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뭐라고 오는데? 함부로 뭐 누르고 그러면 안 된다던데?"
이 질문으로 유과장은 용의자 탈락.
"아뇨, 내용이 좀 심각해서 사이버 수사대에 신고해놓았어요"
신고라는 말에 떠있던 공기가 순간 나에게 집중된다.
"경찰이 그런 것도 해결해 줘요?"
지영도 내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웃으며 말한다.
사이버수사대에 전화한 것은 사실이었다.
오전 출근하자마자 바로.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건 직접적인 위해나 욕이 아니면 신고해도 소용없을 걸요?"
지영이 대신 말을 해준다.
(아는구나, 너)
-그럼 이건 어때,
"어 욕이 있었거든. 협박이."
시종일관 웃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순간 풀리는 것을 보았지만 찰나였다. 다시 눈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과장님 안팎으로 적이 많으신가 보네요"
그래 또는 아니야.
둘 중 무슨 대답을 해도 질문자에 말려버리는 대화로 계속 유도하고 있다.
그동안 알아왔던 지영이 아니다. 아니, 나는 그녀를 진짜 알긴 했던가?
"아,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다 같이 한 잔, 같이 해요"
이미 얼큰한 표정의 정 과장과 김과장이 옆에서 넘어와 살얼음판 같은 테이블에 맥주잔을 탁 탁 내려놓는다.
그제야 나도 성에가 사라진 맥주잔을 집어 들어 순식간에 절반을 밀어 넣는다.
"아 김과장, 이따 끝나고 집에 갈 때 나도 태워주면 안 돼? 나 바로 옆 동네잖아아"
유과장은 늘 만만한 김과장을 걸고 간다.
덕분에 분위기도 느슨해진다.
"나도 술 마셨는데?"
"어차피 대리 부를 거잖아!"
하얀 얼굴을 핑크빛으로 물들인 채 유과장은 계속 김과장을 향해 웃음이 샌다.
"나 오늘 뒤에 짐 많아서 안 돼요, 자리가 없어"
그 역시 싱글거리면서도 점잖게 거절한다.
"아 왜에 잠깐 가는데 조수석 타면 되잖아"
창과 방패가 번갈아지는데 가만있던 지영이 불쑥 참전한다.
"조수석에 아무나 못 앉게 하잖아요, 결혼할 사람만 앉히겠다고-,"
(덜컹)
-아씨 김부장..
김부장 귀에 들어가면 비밀이 없다.
그런데 눈으로 봤으니...
봤구나.
"아 몰라, 봐서요, 다른 사람들은 다 어떻게 갈 건데, 고과장님은 어떻게 가요?"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조수석에 의미를 두었었어?)
나는 대답 없이 그의 얼굴만 빤히 본다.
"여기서 집 제일 가까운 사람이 고과장님 아니에요?"
한번 더 날 을 세우는 지영이다.
너는 나를 계속 부르고.
나는 너와는 싸울 생각이 없다.
애초에 비겁한 선택을 한 너는.
상대가 안돼.
"저도 오늘 오랜만에 지영이랑 술 좀 마시려고요, 가까우니까 알아서 가면 돼요"
보듬을 수 있다면, 보듬고 싶다.
"아니, 가까워서 더 택시 안 잡히잖아요"
김과장이 걱정을 얹자마자, 지영이 파르르 한다.
"김과장님이 왜 고과장님 택시를 걱정해요"
"아 왜 그래 지영씨, 너도 그럼 같이 타고 가"
김과장이 속삭이듯 말한다.
"저 남자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해서 금방 가야 돼요"
"지영언니 남자친구 있어요??"
서림은 사내 모든 일은 다 알아야 한다.
"고과장님도 남친 있잖아요"
지영이 패스하고,
"과장님? 남자친구 있어요?"
낚이는 건 서림뿐.
나는 대답 없이 맥주만 마신다.
-정말 재밌네.
"'언제나 내편'.이라고 저장해 놓은 사람이 남친 아니에요?"
이제 울리지 않는 전화목록까지 꺼내든다.
급하구나, 너.
"어? 고과장님 얼마 전에 미국에서 헤어졌다 하지 않았나?"
대답 없는 사이로 정과장이 끼어든다.
나는 그런 정과장을 보며 입꼬리를 올린다.
"그래, 그래서 헤어졌다구 먼 말만 하면 울고 그랬었잖아"
하며 우는 시늉을 한다.
"전혀 안비슷한데"
정색.
"뭐야, 그런데 언제 또 생겼어?"
역시 눈치는 없다.
정과장이 나를 보며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묻는다.
"힘들다고 남의 꺼 탐내면 안 되죠"
엄한 소리에 지영을 쳐다보니 눈을 내리깔고 씨익 웃으며 맥주를 들고 있다.
이번엔 제대로 붙어보란 듯이.
-처음 내게 말도 제대로 못 붙이고 수줍던 소녀를 이렇게까지 바꿀 수 있는 게. 사랑인가?
천천히 그녀의 눈을 보며 맥주를 들이킨다. 컵이 모두 들리는 시점에서 나의 눈도 감긴다.
메일의 내용이, 그런 거였을까?
너는 내가 당연히 읽었을 거라 전제하겠지만,
나는 이름만 확인하고 메일을 열어보지 않았어.
그러니, 네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패가 다르다는 얘기야.
너가 알고 있는 것과 나의 진짜 이야기는 달라.
전해들은 이야기로 남을 판단 하는건 이렇게 불확실 한거야.
이젠. 재미도 없고 말야.
의도를 가진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계산 속 답이 나오지 않으면 조급해진다. 그리고 조급해지면 게임은 끝이난다.
"남의 떡만 보다가 차인건 아니고요?"
그렇게 도발한다.
(내가 뭘 하긴 했던가?)
완전무장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않고 울고 있는것 같은건 너야..
(곧 끝나겠네)
"지영씨, 여기서 남의떡이 어딨어요? 다 싱글인데"
하는 김과장과,
"아 거기까진 아니다. 지영 씨 오늘 많이 취했네"
옆자리서 6개월간 내 눈물을 많이 본 정과장이 말린다.
때마침 담타를 마친 유과장도 문을 열고 들어오며 지영을 부른다.
"야, 지영아 니 오빠 왔댄다, 얼른 가봐"
짐을 챙겨 나가는 듯하다.
인사도 하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은 너보단 맥주가 가깝다.
"남친이라고 한 게 친오빠 인가 봐요, 근데 오늘 지영 씨 왜 그렇게 달려요, 다른 날이랑 다른 거 같아요"
남 일에 토다는 법 없는 은희가 조심스레 말한다.
난 맥주를 비우고 은희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함께 있으면 늘 평화로운 아이.
-방금 전쟁 끝났어.
"나 화장실 좀."
높은 나무의자에서 툭 내려와 룸을 드디어 나간다.
다만, 화장실 쪽이 아닌 바깥으로 발길을 향했다.
하늘이 보고 싶어 잠깐 앉을 곳을 찾는데 딱히 벤치도 바위도 없다.
-그냥 집에나 가야겠다.
평소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는 건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라질 때 아주 용이하다.
휴대폰을 꺼내 은희에게 내일 보자 문자하고 닫는데 가게를 나오는 김과장의 눈과 마주친다.
"뭐야, 가려고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걸어가면 20분이면 가요"
"차 타고 가면 5분이잖아, 금방 대리 부를께요"
"아냐 진짜 그냥 갈래요"
이미 걸음을 뗀다.
"아우 지영, 아니 고과장님. 1분만 기다려요 알았지?"
"지영? 풋"
(뭐가 있긴 있구나)
본인 실수에 당황한 듯 전화기를 들고 몇발치 떨어진다.
지이잉-
재킷 주머니에서 진동이 온다.
-은희?
상처 주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4885
하...끝까지..
휴대폰을 닫는다.
김과장이 검지로 담배 끝을 치며 다가온다.
"이제 대리 5분이면 도착한대요"
"과장님, 아직 제 답변 기다려요?"
재킷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물었다.
"왜? 안 좋은 말이면 지금 하지 마요"
두 손을 휙휙 젓는다.
"아니, 지금이 좋을 것 같아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과장님, 저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