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하는 거.
수고하세요.
싫은데.
고생하십시오.
고생하기 싫어.
저, 그럼 뭐라고..
그냥 가.
안녕히 계세요 하고.
안녕히. 아 내일 뵙겠습니다.
안녕.
(빙긋)
1:0
날은 쨍하니 예쁘게 노랗고,
오늘따라 뻥뻥 뚫리는 도로에 막힘없이 질주했다.
팀장은 외부 미팅으로 오후부터 자리를 비웠다.
책이라도 펼쳐 빠져들고 싶은 평온한 오후다.
띠리링-
조용한 사무실 안에 외로운 전화벨 소리.
"네, 고 00입니다."
"과장님, 안녕하세요. 저 0000의 김순정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과장님."
입사 후 처음 영업했던 내 업체. 벌써 N년째 함께 가주는 반가운 목소리다.
"어휴. 다른 게 아니고.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네, 말씀하세요"
말인즉슨, 3월에 진행되는 전시회 관련 새로운 곳에서 영업이 들어왔다 한다.
항상 쓰는 곳 있다고 거절해왔고, 이번에도 그렇게 말했지만, 무작정 견적서를 메일로 보내왔다는데,
나와 하기로 한 가격의 30프로나 낮다고. ,
그게 그렇게나 미안한 듯이 그녀는 내게 전했다.
"처음엔 가격으로 영업할 수는 있겠지만, 매년 그렇게 손해 보고 하지는 못할 텐데. 그쪽을 그래도 한번 써보시려고요?"
가격이 전부일 수도 있는 업체에 무조건 거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거기서 고과장님 얘기를 하더라고요. 고과장님 바로 밑에 있었다고. 저희 일을 잘 알아서 잘해줄 수 있다고."
"네? 누군데요?"
머리칼이 쭈뼛 선다.
"김 00라고. 아세요?"
몇 달 전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해보고 싶다고 사직서를 낸 , 아끼던 부사수 이름이 수화기 너머에서 오랜만에 들려왔다.
그가 퇴사를 고민할 때,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편의점으로 데려가 맥주를 마시며 고민을 들어줬었다.
"네. 과장님 편하신 대로 하셔야죠."
괜찮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도 선택은 그녀의 몫이다.
"저는. 고과장님이랑 계속하고 싶은데. 가격도 어느 정도 맞춰줄 거라 생각은 해요. 그런데 여기서 무조건 고과장님쪽에서 제시하는 가격의 30% 저렴하게 주겠다고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하네요."
나를 걸고 넘어지는 영업방식은 김주임과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가장 편하게 해줘야 하는 업체를.
난감한 얘기를 꺼내게 만들었다.
(너가? 왜 굳이.)
전화를 끊고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이 나온다.
옆에 앉은 강훈이 책상을 톡톡 치더니, 커피 한잔 하자는 눈짓을 보내온다.
"왜요, 누군데요?"
한 층 아래 조성된 휴식터, 정자에 털썩 앉자마자, 그는 담배를 입에 물며 물었다.
"음.."
말없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난 뭘 생각하고 싶은 거지?
"김주임이 이직한 데서 과장님 꺼 영업 들어갔어?"
끄덕끄덕.
"와. 김주임님, 과장님 엄청 따르고 잘했다더만. 옮기니까 또 그게 아닌가 보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거랑. 회사에서 보여줘야 하는 거랑은 다르니까."
나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 없이 나오는 말이 내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이해한다고?"
"나도 이해하는 거랑 해야 하는 일은 다른 거겠지."
"그래서, 어떻게 한다고? 어떻게 하려고요? 응? 고과장님."
탁탁, 담배를 털어 끄며 휴지통에 던져 넣는다.
그리고 사각 케이스 안에서 두 번째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그냥 가만있을 거야? 다 가져가라고?"
말이 없으니 채근하기 시작한다.
-이럴 거면 네가 팀장해.
하지만, 마음속 생각처럼 농담할 상황은 아니다.
"아휴"
오히려 강훈이 휴- 한숨을 쉬며 뿌연 담배연기를 하늘에 뱉어낸다.
"가자."
"어딜?"
"가방 들고 따라와."
"지금 퇴근?"
"싸움을 걸어왔으니 일단 받아야지. 가자, 걔네 회사로"
"뭐? 정말?"
후- 한쪽 눈을 감은채 담배연기를 내뿜다가 놀란 채 반문한다.
더 기다리지 않고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 가자."
"오키, 고고"
그가 큰 덩치로 한 줌 가득 재미를 물고 따라 나오는 게 유리문을 통해 비친다.
1:1
"운전 내가 해?
"아무나 운전하는 차 아니야"
"아, 뭐래-"
운전석에 앉아 벨트를 조인다.
이미 이직한 직원에게 옛 상사가 먼저 전화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반갑게 받았지만, 사무실이 아닌 근처 술집으로 바로 장소를 알려주는 걸 보니, 무슨 일인지 짐작하는 듯했다.
"가서 뭐라고 할 건데?"
"벨트 좀 맬래?"
벨트는 답답하다고 투덜대며 버클을 채운다.
"과장님, 작전은 있는 거지?"
(아직 생각 못했어.)
말없이 운전에 집중한다.
"아니, 업체에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적진에 들어가서 뭐 어떡하려고.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울고 불고 할 건 아니지?"
"해야 하면 하겠지"
"뭐? 그러면 정말 실망이다."
말없이 운전에 집중한다.
입사한 첫 해, 나에게 처음 던져진 임무.
다른 회사와 오래 거래하고 있던 D사를 영업해 봐-
막 졸업해서 회사에 입사한 이십 대 초반.
영업이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답은 있는 걸까.
나라면. 어떤 사람에게 내 일을 맡기고 싶을까.
나라면..
출근하는 길도. 화장실에 갈 때도. 홈페이지와 인터넷으로 수없이 회사에 대해 찾아보면서도.
머릿속엔 사랑하는 사람 그리듯 온통 그 회사 이름뿐이었다.
-잘 모르는 길이면, 진심으로 다가가는 게 제일 쉬워.
매일 문안인사 하듯. 매일 퇴근 인사 하듯. 식사 후 어떤 메뉴를 먹었는 지도.
묻고 또 묻고 전화하고 또 전화했다.
처음엔 잘 받아주던 담당자는 나중엔 회사 이름만 듣고는 끊기도 했다.
'죄송하지만. 이 방법 밖엔 몰라서요'
어느 날 나는 막 끊으려는 담당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솔직한 나의 마음.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얻은 단 한 번의 기회.
-작은 전시 먼저. 에휴. 한번 같이 해봐요.
오늘은 이사하는 날이니 제발 전화 그만하라는 담당자가 결국 웃음과 한숨을 섞으며 말했었다.
"정과장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나한테 배울 게 없을 것 같으면 정과장 팀에 가도 좋아"
"아 또 말을 왜 그렇게 해. 내가 샤넬 신발 들고 뛰어준 거 벌써 잊었어?"
긴장한 나의 운전에 웃음을 더해준다.
철없듯. 싹수없듯. 보이지 않는 선을 밀어내기도 지워가기도 잘하는 아이.
(너는. 너만의 영업 정말 잘할 거야.)
그 말까지 하면 너도 날라가버릴까.
다시 속으로 삼켜본다.
어느새 말해준 가게 앞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시동을 끈다.
-이제 진짜네. 난.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왔어?
아직도 정리를 못했다.
영업 바보는. 맞나 보다.
내리려고 하는데 운전석에서 엉덩이가 떨어지질 않는다., 아니 발을 내밀었는데 땅에 닿질 않는다.
(뭐야?)
"과장님, 벨트 풀르고 내려야지"
아.
1:2
점원에게 회사명을 대니 2층으로 안내한다.
올라가는 내 구둣발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이대로 모든 게 끝나고 내려가는 중이었으면 좋겠다.
"안녕"
참 편한 인사말.
"과장님.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어휴. 이 먼 곳까지 와주셔서. 이렇게 뵐 생각은 아니었는데."
씩 웃으며 맞은편 자리에 , 최대한 편한 느낌으로 앉아본다.
"얘는 내 부사수, 이강훈이야. 인사해 강훈 씨"
강훈도 꽤 예의 있게 행동하질 않는다.
-짜식
어색한 인사가 오가고 더욱 어색한 공기가 한 번에 몰려온다.
"과장님, 그런데. 무슨 일로"
허허, 웃으며 묻는다.
"술이나 한잔 하려고. 너 그만두고 술 한번 먹자 하고. 이렇게 마시네"
함께 웃어 보인다.
"아, 네 그렇죠. 그럼 시킬까요"
소주와 맥주.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닭똥집과 조개탕이 깔린다.
잘하지도, 즐겨하지도 않는 소주.
그래도 오늘만은 나를 배신하지 말아 줘.
한 잔.
두 잔.
석 잔.
아무도 말이 없다.
잔이 꺾이지도 않는다.
그렇게 따르고.
그렇게 미소만 짓는다.
다섯 잔 째에나 김주임이 못 참겠다는 듯 입을 닦으며 말한다.
"아니, 과장님 정말 술만 마시려고 왔어요? 그냥 말해보세요. 들을 테니까."
"잘 지내나 해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으니 좋네. 열심히 하고"
"당연히 열심히 하죠. 누구한테 배웠는데"
여전해.
그만 머쓱해해도 돼.
영업이라는 게 뺏고 뺏기는 거지.
사과하고 사정할 일은 아니겠지.
소주 두 병이 추가된다.
우리는 늘 짝수로 시켰었지.
"으아, 저는 더 못 먹겠어요. 전 빠질게요 과장님. 그래도 되죠?"
강훈은 가방으로 배를 가리며 뒤로 물러 앉는다.
고개만 끄덕인다.
대학에서 처음 배운 술이었다.
9차 10차 까지도 가던 학생회 시절.
한 번도 알코올을 받아보지 못했던 생짜의 내 몸은 좋은 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악으로 깡으로 술을 받아냈었다.
분명 마실 때는 아무도 내가 취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고, 도망치듯 빠져나와 기숙사로 돌아와서야 온몸에서 들어간 것들을 재확인하는 시간을 겪곤 했었다.
그냥. 버티는 거다-
두병이 네 병, 그리고 여섯 병째가 되었다.
아니, 제대로 카운트되었는지 자신이 없다.
"과장님. 정말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
"한번 보고 싶어서. 너가."
다시 꺾지 않고 들이킨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넌 잘하고 있고.
나도 잘하고 싶을 뿐이야.
우리는 둘 다 진짜 해야 할 말을 꺼내지 못한다
"과장님.그대로네"
"너는 더 열심히 하나봐"
그냥 이 정도다.
이번엔 그가 한잔 들이켠다.
우리의 속도는 현저히 느려지고 있다.
"열심히 하겠다는 말, 싫어하셨죠."
"응. 열심히 말고. 잘해야 하니까"
"저도 그냥 잘하고 싶어요."
"알아. 너는 잘할 꺼야."
그는 눈을 꼭 감고 다시 술잔을 털어 넣으며 말한다.
"이제 가보세요 과장님. 그만 하셔도 돼요."
말없이, 하지만 반쯤 감긴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그를 본다. 우린 분명. 마주 웃었다.
몸이 휘청하는 듯했지만, 다시 바로 세워본다.
"계산은. 내가 할께"
주섬주섬. 미끄덩하며 휴대폰을 챙기고, 잠든 강훈이를 깨운다.
"이제 가자"
"과장님, 괜찮으시겠어요?"
말없이 웃어보였다.
고마움 반. 미안함 반.
고개를 숙였다가 들며 이 말은 해야겠다는 듯 말을 꺼낸다.
"D사 만이에요. 과장님이 안 했던 신규 업체는 계속해볼 거예요 D사는.. 어차피 안 올거 같이 얘기하더라고요. 이렇게 안드셔도 됐었는데."
"너도 보고."
어떻게 그가 돌아섰고,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리기사가 어떻게 왔고, 어떻게 차를 찾아 탄 건지도.
"강.. 훈.. 아.. 나.. 우우 욱"
"아악 과장님 참아!!"
도라에몽 가방 같은 그의 가방 안에서 비닐도 나온다.
"나 오늘까지인가 봐..."
더 나올것도 없어 노란 액체를 뱉어내며 말했다.
"아니 무슨. 정말 작전이란 게 없네. 어이가 없네"
"그냥.. 하는 거지."
"왜 이렇게 까지 해 D사가 그렇게 커 과장님한테?"
"그 업체 좋아해. 그런데 김주임도 좋아하거든."
그랬나 보다.
내가 정리하고 싶었던 나의 생각은.
좋아서. 붙잡고 싶었나 보다.
처음으로 날 알아봐 준 업체.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서로 외면하지 않았던 관계.
최선으로 보답했고. 하지만 더 해야 할 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린. 20년을 함께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