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한 수

바라던 바.

by 아는개산책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정의도. 열사도. 투쟁의 뜻도 잘 모르는 스무 살 남짓의 여자아이는, 그저 똑똑한 선배들과 함께인 게 좋아 학생운동을 따라다녔다.


민중가요가 좋았고, 밤새워 국사를 배워가는 게 좋았고, 정도를 가려는 노력도 좋았다.


하지만, 그런 운동권들도 교내 선거철이 되면, 담합에 비리, 비방, 폭로 다양한 물 밑작업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는데, 그들이 열고자 하는 시대는 그렇게라도 해서 권력을 잡아야 열리는 건가 싶었다.


결국 나는 대학시절 3년 내내 빠져있던 학생회 생활을 4학년이 되어서야 정리하며 나름 결론을 내렸다.


여기가 사회정치의 축소판이다.

그리고,

돈과 권력이 모이는 곳엔, 언제나 구린내가 난다.



판 깔기


철문을 앞에 두고 차가운 손잡이를 잡아. 비틀고. 힘껏. 민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창가를 등진 채 서 있던 서너 명의 덩치들이 돌아본다.

아닌가, 사이드마다 세명, 네 명씩 모여서서 문 쪽을 주시하고 있다.

창문을 가리던 그들이 자리를 살짝 틀자 정오의 햇빛은 문을 연 내게 정면으로 쏟아져 내린다.


나는 한줄기 햇살에 눈을 찡그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재밌겠네.


조금 전,

미동도 없이 부드러운 승차감의 외제차 안. 내비가 앞 유리에 떠 있듯 나오는 건 신 세상이다.

하지만 승차감과는 별개로 가슴은 오전부터 쿵쾅거림을 멈추지 않는다.


"고과장, 너 우리가 뭐하러 가는지 알아?"

나지막이 묻는다.


"네."

눈을 맞추며 대답한다.


"뭐하러 가는데?"

"다 죽이러요"

나는 씨익 웃으며 일주일 전 사무실을 떠올렸다.


부장의 책상 앞에 결재판을 든 채 대체 왜 안되냐 묻고 있는 것은 나다.


"아휴. 나더러 뭐 어쩌라고. 위에서 안된다는데."


"부장님, 저 이거 잘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잘해보겠습니다."

조금 더 부드러운 톤으로 바꿔보았다.


"아, 니야 맡기면 잘하겠지. 그런데 우리한테 와야 말이지."

나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요리조리 움직이는 부장의 눈만 따라간다.


"그거 다 위에서 얘기된 거야. 우리 회사는 떨어지기로 했고..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나도 몰라."


-구린내.


"입찰은 언젠데요?"


"아 몰라, 일주일 뒤인가.. 그, 저 상무가 알아서 했으니까 상무가 가서 쓰고 오겠지."


나는 입술 안쪽 잇몸을 잘근 깨문다.


"그거 이제 잊어. 그래도 네가 피티 잘해서 여까지 왔다. 그건 나도 알고 위에서도 다 알아."


".. 네."


꼭 한 번쯤하고 싶었던 프로젝트였다.

오랜 기간 공들였고, 다시 언제 이런 일을 맡아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사이즈였다.


-에휴, 내꺼가 아닌가 보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한숨이 나온다.

뭐, 난 또 포기도 빠르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른 오늘 아침, 부장은 내 뒤를 지나는 듯하다가 등을 살짝 쳤다.


"야, 준비해"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안 되는 엑셀 수식을 열심히 맞추는 중이었다.


"네? 뭘요?"

"따라와, 빨리!"


밑도 끝도 없는 건 한두 번이 아니다. 천천히 허리를 숙여 실내화를 구두로 갈아 신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다이어리를 집어 든다.


"야, 넌 또 가방 안 가져왔어?"

"하나 사주세요."

"아씨, 따라와"


따라 들어간 곳은 지하주차장이었고, 서둘러 차 시동을 켠다.


"오늘은 어디 가요?"

"입찰장"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되물었다.

"무슨 입찰이요?"


"너. 아직도 그거 하고 싶냐?"


"네. 네! 부장님이 지금 뭘 생각하든 그 두 배 프로핏 남길 자신 있어요."

더 생각도 안 하고 대답했다.


"그럼, 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웬일로 차 문까지 열어주는 부장이었다.



입찰장


가운데는 뻥 뚫린 채 기다란 사각형 모양의 회의 탁자.

그 한 면마다 일정 거리를 두고 각 회사의 대표 참석자들이 앉아 있다.


나는 부장의 옆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볼펜을 까닥까닥하고 있다.


부장은 긴장한 듯 두 손을 깍지 낀 채 연신 눌러대더니,

이내 사회자가 진행을 시작하는 틈을 타 조용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낸다.


그리고 내 앞에 살며시 놓은 그것은.


반으로 접힌 작은 종이.


"사장이 준거야. 우리가 적어야 할 금액. 난 아직 못 봤어. 네가 나중에 나한테 불러주면 돼."

눈은 사회자를 보며 작게 속삭인다.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운 조명아래 간신히 가라앉았던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자, 그럼 모두 앞에 도장이 찍힌 종이 두장, 그리고 봉투 한 장이 놓여있습니다. 확인되십니까?


약간의 웅성거림에 섞여 네, 네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럼, 입찰 시작하겠습니다. 제안하실 숫자를 적고, 옆에 한글로 함께 표기하여 봉투에 넣으시고요, 옆에 풀이 있는데 그걸로 밀봉해서 저희 직원이 지나갈 때 제출해 주시면 됩니다. 아시겠지요?"


마이크를 타고 여러 번 연습한 듯한, 하지만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옆을 돌아봤다.

이 자리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는 건 다름 아닌 부장인 듯하다.

가까이서 보니 , 얼굴은 이미 시뻘겋고 다리는 달달 떨며 손은 잡았다 놓았다 어쩔 줄을 몰라한다.


-이렇게 순수한 분이셨나..?


나는 들고 있던 다이어리로 부장의 달달거리는 허벅지를 지그시 누른다.


"부장님, 진정하세요."

"야, 얼마냐? 얼마 적으면 되냐?"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이 부장이 물었다.

나는 이미 쪽지를 열어 금액을 확인해 둔 바였다.


-그런데 직접 보면 되지, 이걸 왜...?

하는데 머리를 스치는 어떤 육감.


어차피 최저가 적어내서 떨어지면 되는 거를 왜 긴장을 하고 있는거지? 회사는..꼼수를 쓰려는건가..아니면, 부장 개인의 욕심?


"야, 얼마냐고"


하지만 무언가 더 생각해보기엔 시간이 너무 짧다.

결국 나는 작은 목소리로 적혀있던 숫자를 읊었다.

"이십 0억 0천0백....."


흠.- 콧소리를 내더니 이내 쓱쓱 숫자를 적는 부장.


나는 순간, 텅 빈 가운데를 응시하며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앉아 있다.


-내가, 여기서 ,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건, 언제고, 어떻게지? 먹어야 하는거야 뱉어야 하는거야. 부장급 까지도 몰랐다고 말 할 수 있는 한 수가 필요한거야 ?


이곳에 모인 다른 회사 사람들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

우리는 약속된 들러리로 왔다는 것을.

그럼에도 숨 막히게 느껴지는 이 긴장감.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 것 같은, 허공에 떠있는 불안.

봉투를 거둬가는 보조인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 날이 서있다.


하지만 역시 서로의 얼굴 표정은 알아볼 수 없다.

거리가 멀기도 하고, 고개를 들어 쳐다볼 여유는 좀체 생기지 않는다.


-부장이 나를 데려온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는데,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말을 꺼낸다.


"이번 입찰은... 유찰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제안가를 작성해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웅성웅성

갑자기 소란해졌다.


-유찰?!

아무도 예상 못한 듯했다.

우리는 분명 약속했다고 한 금액을 적었었다.


그런데, 유찰되었다.



포석


유찰로 인해 20분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무얼 준비하라고 주는 시간일까?


나는 아직 판을 다 알지 못한다.

회사들 간의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건, 우린 약속한 금액을 적고 입찰에서 떨어지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


-그런데 꼭. 뭔가가 더 있을 것 같다.


"넌 화장실 안 가냐?"

"네. 괜찮아요."


잠시 나갔다 온 부장은, 내 옆에 앉아 다시 두 손을 비비기 시작한다.


"하.. 이제 어떡하지? 우린 약속대로 했잖아. 이제 어떡해? 다시 그대로 적어?"


그의 질문이 곧 답이다.


회사는 뒷거래를 말 그대로 뒤로하고 이 판도 먹을 수 있다면 먹고 싶은 것이다.


그는 나를 안다.

나는 이 일이 미치도록 하고 싶고.

회사는 약속을 해놨지만 번복할 핑계가 필요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일을 저지르면서도 결국 회사에 이득이 가게 판을 뒤집을 수 있는.


-나는 쓰기 편한 돌이다.


알아서 찾아가는 바둑알.


"제가 숫자를 부를게요. 그대로 적으세요."


그런데,


"하.."

이번에 고민하는 쪽은 부장이다.

내 뜻을 느꼈는지,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쥐어뜯어 뽑힌 머리카락을 보고 이러고 있다.


"부장님."

"어?"

"장고엔 악수예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회자는 곧 봉투를 걷어가겠다고 발언했다.


부장은 마침내 무언가 결심한 듯 풀려있던 볼펜을 다시 쥐었다.


"불러봐"

"이십 X억 0천0백.."


다른 숫자를 댔다.


우리는 최고득점자 바로 다음 순위로 프로젝트를 낙찰받았다.

낙찰자가 발표될 때 우리 쪽에 손가락질하던 사람들 쪽은 굳이 쳐다보지 않았다.


누가누가 제일 구린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팀장은 계속 주장했다.


"하.. 정말 조마조마했다. 난 이제 모른다. 네가 다 알아서 해라"


"부장님. 부장님은 모르고 하는 거 하나도 없어요."


"나? 아니야, 나 정말 아무것도 몰라. 난 네가 시키는 대로만 했어"


(네, 네.. 제가 책임 질께요. 책임을 묻는다면.)


사무실로 도착한 후, 바로 회의실로 불려 간 부장과 임원들 간에 꽤 오래 시간 고성이 오가도 회의는 끝날 줄 몰랐지만, 역시나.

아무도 나를 찾거나 책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정 과장이 옆에서 더는 못 참겠는지 내게 물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난 대답 없이 웃으며 모니터만 바라봤다,


재밌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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