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은 동료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
라는 책을 아니?
-내가 선생이 된다면, 저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생각하게 했던, 한 선생이 내게 물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난 그녀의 이혼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린 나이지만 왜인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너무 사랑해서. 많이 아팠나 보다.
하고.
동료이자 친구
글씨만큼이나 깔끔히 정돈된 그의 빈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의자에 털썩-
-흠, 내 의자보다 편한 거 아니야? 바꿀까?
이번엔, 책상 위에 가져갈 것이 없나 한번 더 둘러본다.
볼펜, 메모지.. 쓸만한 게 없다.
-헐, 웬 책?
"야, 너 또 내 자리서 뭐 해."
동갑내기 김 과장이 어느새 다가와 자리에 담뱃갑을 내려놓는다.
씨익 웃으며 그를 쳐다본다.
"너 책도 읽어?"
"어, 너도 책 좀 봐봐"
"웩, 계발서, 제목도 리더의 자질? 트라우마냐."
괜한 시비 해본다.
"왜에, 이거 베스트셀러야. 읽으면 다 도움 돼"
정성껏 답해주니 재밌잖아
"너나 많이 봐. 자질을 못 갖춘 리더가 읽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너"
"아니, 너"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일어나라고 말할 때까지 버티는 시간도 나름 재미다.
"알았어, 그런데 좀 비켜줄래?"
"웃으면서 행복해지는 법 썼던 작가가 사실 우울증이었다는 기사 봤어?"
당연히 없는 얘기다.
"그런 기사 보지 말고, 너 자리로 좀 가라"
두 손을 깍지 낀 채 네가 어쩔 거냐는 듯 빙그르 웃으며 더 놀아보자 하지만,
"자, 회의 잠깐 하시죠"
이사의 부름에 벌떡 일어나 내 자리로 가서 다이어리를 챙긴다.
"아이구 고과장. 뭐 없어진 게 있나 봐야겠고만."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지 못한 채 다이어리를 챙겨 따라 나오는 김과장이다.
실속 없는 회의
30분이 넘도록. 관심 없는 서로의 업무를 공유하고 스케줄을 조정하고 있다.
-회의주의자들..
회의록에 끄적끄적.
옆에서 태수가 내 낙서를 보고 끄덕끄덕 한다.
"그래서, 이번에 라스베가스 출장은,,, 김과장?"
끝을 흐리는 질문에 묘한 타이밍이 느껴진다.
(뭐야, 이건 또)
느낌이 쎄하다.
짜고 치는 고스톱.
"네, 이번에 저희가 가면 좋겠지만. 독일 출장준비 때문에.. 미국 출장까진 힘들 것 같습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김과장을 정면으로 바라봐본다.
(하, 라스베가스. 개고생. 우리 팀에 넘기기만 해봐라.)
이사와 김과장, 그리고 나머지들의 시선도 내게 꽂힌다.
나는 태수를 바라본다,
(네가 가면 되지?)
"저도 그때 홍콩 출장."
"아 뭐야. 홍콩 내가 갈께"
"아무래도, 고과장 팀이 이번건만 좀 해주시면."
말하는 김과장을 노려보다 더 말 섞기 싫어 회의록만 쳐다본다.
"그럼, 두 분이 계속 더 얘기해 보시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시죠"
이사는 서둘러 회의를 마무리하는 발언을 하고, 직원들은 우르르 한 번에 회의실을 나가버린다.
"와.. 진짜 또 뭔데에."
이사와 김과장은 늘 옥상에서 담타 하는 사이.
분명 사전 모의가 있었다.
이런 식의 전달 방식 자체가 싫을 뿐.
아니 그것도 싫은 거다.
니가 가라, 베가스
그는 이미 눈으로 실실 쪼개고 두 손을 모으며 정겹게 바라보지만,
지금은 그저 재수 없다.
"고과장님-"
"싫어"
"아 왜에, 내가 가기 싫어서 안 가는 게 아니고, 독일 건 때문에 못 가는 거 알잖아."
"너네 팀에서 해결해"
"우리 애들 다 바쁘대. 태수는 홍콩 가고, 한 명은 이제 결혼한 신혼에, 한 명은 머리 수술했잖아."
"우리 집 고양이도 임신했대"
"아니, 그렇게만 말하지 말고. 알겠어. 왜 왜 뭐가 싫은 건데."
(내가 일을 좋고 싫음으로 나누는 거처럼 만드네?)
말없이 눈만 바라본다.
"힘들어서 그래?"
"장난하냐?"
아시아 출장이 그냥 커피면, 미주 유럽은 티오피.
업무의 강도가 다르다.
물론, 저렴한 이코노미에 몸을 구겨 넣고 스무 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야 하는 사정은 거들뿐.
"야 그럼 처음부터. 최대리한테 넘기지."
툭 던지듯 말했다.
첫 단추가 틀렸잖아.
처음부터 눈치싸움이었다.
우리 팀 최대리와 김과장팀 태수의 최대 실적을 노린 쟁탈전.
결국 최저가로 다수를 공략한 태수의 영업으로 최대리가 영업한 업체마저 모두 넘겨 통합으로 진행하라던 이사.
'그럴 줄 알았어요' 하며 고개 숙이던 최대리였다.
-결국 너희는 책상에서 실적만 다 먹고, 코피는 우리 보고 쏟으란 거잖아.
사람들은 이상하다.
막상 싸우자 마주 봐도,
꼭 해야 할 얘기는 꺼내지 않고
알아서 피해 주길 바란다.
"야 일에 니팀 내팀이 어딨냐. 같이 하는 거지"
탁상공론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책에서 그렇게 배웠냐"
근원적 사고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니팀 내팀 갈라서 굳이 실적을 모두 취하겠다 선포한 건 적어도 내팀은 아니었다.
(니네팀에서 다 알아서 할 수 있다더니.)
"지금 그럼 어떻게 하자고"
"니네일을 왜 나한테 생각하래"
"너희팀 지금 놀고 있잖아"
선 넘냐.
"너네처럼 시끄럽게, 나 일한다고 동네방네 안 떠들고 일하니까 노는 거 같아?"
말을 더할수록 나의 목소리는 낮게 깔린다.
"지금 뭐 하는데?"
"회의자료 봐. 뭐 하나"
"하."
웃음기는 첫마디에서 사라졌었다.
심기가 불편한 듯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는 놈.
"니 일 가지고 남이 해결 못한 거처럼 만들지 마. 네가 알아서 해."
"아니, 지금 알아서 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렇지, 넌 왜 그렇게 밖에 말 못 하냐?"
언성을 높인다.
(니네가 정말 시간이 안나? 날짜 맞춰 인원 넣다 뺏다 하면 충분히 조정 가능 한 게, 나한테 안보이겠어?)
인상을 쓰며 회의록을 구기는 그를 흘끗 본다.
(너가 솔직하지 않으면, 나도 할 말 없어.)
마음속 생각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고과장! 나 말 안 끝났어"
(어쩌라고)
"난 끝났어"
문을 확 열어제낀다. 반동에 의해 넘어질 뻔 한다.
"아우씨" 하고 혼자 휴대폰을 바닥에 내동댕이 치는 모습이 유리에 비친다.
파바바팍-
"그래서 박살나?"
걸음을 멈춰, 한마디를 더하고 자리에 가 앉는다.
사무실의 온도가 무섭게 낙하한다.
어차피가 아니야.
담담한 척 하지만 심장이 크게 두근 거린다.
서서히 발그레 지는 얼굴이 그렇다.
하지만.
불타는 고구마는 내가 아니다.
시뻘건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온 김과장은 내 자리를 돌아 본인 자리에 다이어리를 던지듯,
아니 집어던지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린다.
신경 쓰지 않고 업체에 전화를 돌린다.
"네, 제가 아까 보내드린 메일 보셨어요?"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밝은 톤을 유지하려 애써본다.
사무실 안은 키보드 소리 하나 없이 내 목소리만 울린다.
그런데 그 와중에 곰방 나갔던 김과장이 다시 씩씩거리며 곧장 내 자리로 걸어와 전화를 끊을때까지 기다리고 서 있다.
(딸칵)
"나랑 얘기 좀 해"
"나 할 말 없어"
쳐다보지도 않고 모니터만 본다.
하지만 모두의 귀는 이쪽으로 열려 있다.
"아씨, 그럼 언제 할 말 있는데"
상관없이 큰 소리로 할말을 한다.
이런 애다.
문법 상관없이 상황을 만드는 애.
말투 사이사이 씩씩거림이 느껴지면서도 귀엽다.
(여기서 웃으면 미친년이다)
"10분 뒤"
"알았어. 그럼 10분 뒤에 밖에 옥상으로 와. 기다리고 있을게"
대답은 바라지도 않는다는 듯이 액정 깨진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나간다.
-10분은 무슨.
운동선수처럼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보다, 나도 바로 휴대폰을 챙겨 따라나간다.
천천히 옥상 문을 열자, 담배를 뻑뻑 피고 있는 그가 한눈에 들어온다.
웃지 않으면서도 장난끼를 지어 보일 수 있는 김과장.
조금 더 놀리고 싶어,
말없이 벤치에 가 앉아 다리를 쭉 뻗고 앞만 바라본다.
(너가 원할 때 말하진 않을 거야.)
"고과장"
그냥 앞만 보고 앉아 있는다.
"아까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
두 발목을 왼쪽 오른쪽 까닥까닥해본다.
"처음부터 상의했어야 했는데. 하.. 미안하다."
이제 좀 진지한 말투.
"내가 갈께. 최대리는 못 가고."
어차피 누군가 가야한다면, 내가 가는게 마음 편하다.
"어? 정말? 아.. 미안해."
"너희팀 한 명은 붙여. 나 혼자 다 못하고 처음부터 진행한 사람 한 명은 있어야 돼."
"알겠어, 알겠어. 네가 직접 간다는데, 우리도 한 명 가야지."
이제서야 초승달 된 눈으로 벤치 옆에 나란히 앉는다.
"고마워. 진짜."
"고마우면 아이스크림 사 와"
"알았어, 몇 개 살까 열개면 돼?"
"네가 만든 살얼음 본 애들은 다 먹여야 하지 않겠냐?"
"아우, 그런데 아깐 왜 그렇게 무섭게 말해. 난 네가 말하면 이사나 사장이 말할 때보다 더 심장이 벌렁거려."
"좋아하면 죽는다"
장난이 나오는데, 옥상 문을 열고 태수가 들어온다.
담배는 계단에서부터 물었나 보다.
"아, 뭐야. 다 푸셨어요 두 과장님?"
"어이, 우리 고과장님이 직접 가주신댄다. 김대리 90도 감사 인사해"
오던 걸음을 멈추고 차렷 하며 고개 숙이는 김대리.
남자. 아이들이다.
"아니, 이렇게 간다고 하실꺼, 뭘 그렇게 난리를 치셨대, 김과장님만 휴대폰 또 바꾸게 생겼네"
태수는 김과장을 엉덩이로 밀어내며 사이를 비집고 앉는다.
"다르지"
"뭐가?"
"내가 어떤 마음으로 가는지 상대가 알고 하는 거랑 모르고 하는 건 다르지"
"아, 그런가?"
후-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나도 말없이 흩어지는 담배연기만 본다.
-그래도 믿으니까. 좋으니까. 그렇게 다 말할 수 있었지. 닿지 못할 거리면 시작도 안 해.
"아이스크림 안 사 오냐"
"아, 이거 한대만 더 피고 갈게. 요. 과장님."
부러 기죽은 듯 답하며 윙크한다.
내가 웃기도 전에 김대리가 옆에서 빵 터져버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