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도 블로킹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한 장면.
버스 앞 좌석에 앉아 멍하니 창문만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다른 반 여자아이,
여럿 예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또 한 명의 예쁜 아이구나 정도의 사이.
그녀는 정차한 버스에서 내리려다 나를 흘긋 보고는
-우욱
하고 토하는 시늉을 하고 서둘러 내렸다.
그리고 함께 내린 아이들과 깔깔대는 소리.
폭력이. 지나갔다.
그때 그 사무실
오늘은 웬일인지 임원들도 부장급들도 모두 자리를 채우고 앉아,
유독 조용한 하루다.
신입 한 달 차에겐, 큰 의미는 없는 일이지만.
팀장이 처음 맡긴 일을 제대로 잘 해내고 싶다.
그 생각만으로 바쁘게 엑셀 작업에 돌입하고 있다.
-엑셀 만든 사람은 천재야.
옆자리 서주임이 알려준 수식을 적용하며 하나씩 하지만 조금 더 속도를 내본다.
-정말 조용해. 내 타자 소리만 들리겠어.
하는 순간 분명 쾅이 아닌데, 쾅 소리가 들린 듯.
"고주임! 고주임 어딨어?"
(응?)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 아니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이과장에게 쏠린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다시 나에게-
"넌 뭐 하는 사람이야?"
계산서 하나를 내 자리에 내동댕이 친다.
가벼운 종이하나인데도 서릿발이 내리 꽂히 듯하다.
"네? 과장님."
잔뜩 긴장한 어깨가 일어날 정신도 못 차리게 한다.
"넌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몹시도 높게, 내지르는 말투.
무슨 짓을 했어도, 굉장한 짓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 내가.
"저, 이게.."
"이런 게 왜 나한테 날라와? 너 금요일에 내 것 보다 먼저 작업하겠다고 창고에 얘기한 게 사실이야?"
이런식이면 당장 5분 전 하던 일도 기억하기 힘들다.
"아, 저.."
"됐고, 이거 어떻게 해결할 거야?"
"네, 제가.."
"니깟게 뭘 어떡할 거냐고?"
바락바락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이는 듯하다.
최대한 침착하려 애써본다.
호랑이가 동굴에.. 아, 뭐였지? 호랑이 입속에 들어가도 인가?
"야 고주임!! 너 때문에 발생한 페널티잖아!"
떨어진 계산서를 주워들어본다.
신입 눈엔 그저 파란 종이 위에 검은 게 숫자 일 뿐이다.
"네, 저 그게.."
"너가 책임질 거야? 어? 야 고주임! 너 뭐 하는 애야?!"
자꾸 나의 존재이유를 묻는 질문에 어떻게든 대답하려 애써본다.
-나는 누구일까. 뭐 하는 애일까.
"아우 진짜 어디서 되도 않은 애가 억지 부려 들어오더니, 이따위 계산서나 날아오게 만들어?"
"..."
앞뒤 없이 맥락 없이 무조건 죄송하다고 할 순 없다.
그러고 싶진 않다.
이런 여자에게.
"과장님.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
차라리 말을 해.
죄송하단 말이 듣고 싶으면 나에게 그 말을 요구해.
"뭐? 어떻게 하면 돼?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어?"
조용한 사무실에 그녀의 외침뿐이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주임님들. 과장님들. 부장님. 이사님. 상무님. 전무님. 모두 거기 계시지요?
눈을 툭 떨구어 책상만 바라보다 이내 모니터로 시선을 옮겨 키보드를 가지런히 놓는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뭐하는거냐고오!!!!"
"일하는데요. 과장님. 제가 뭘 할까요?"
"아우씨, 됐고! 이 미친. 아우. 이거 니가 해결해 놔!"
새로운 대사가 떠오르진 않는지, 아니면 더 위협이 되진 않겠다 싶은지 휙 돌아서 자리로 가버린다.
모니터를 보고는 있지만 뒤통수가 따갑다.
손은 심장 박동만큼이나 덜덜 떨린다.
-이젠. 뭘 해야 할까. 아무 말 없는 너희들이 바라는 그림은 또 뭐냐.
나는 컴퓨터를 오프 시킨다.
나의 뇌가 이미 정지된 듯이.
그리고 서류를 한 곳에 정리해 놓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실내화를 신발로 갈아 신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문으로 향한다.
-퇴근할게요.
속으로만 말하며 문 밖을 나왔다.
-안 울꺼야. 누구 좋으라고.
무수한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나에게 이 공간은 아무도 없는 것만 같다.
"고주임! 고주임!"
멈추지 않고 걷는다.
"아, 고주임. 괜찮아?"
기어코 어깨를 붙잡고 돌려세운다.
이과장과 같은 팀의 김대리.
울듯 말듯한 표정은 절대 짓지 마라.
"네, 과장님."
"고주임.. 하. 저 이과장 또 발작했네. 너무 맘 상해하지 말고."
하나마나 한 얘기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먼저, 가보겠습니다."
"휴. 그래.."
어떻게 집까지 오긴 왔다.
순간 이동 하는 능력이 내게 있었던 건 아닐까.
퇴근 직전 일어났던 그 일이, 마치 수년 전을 회상하듯 뿌옇게 떠오른다.
흑-
흑.
새어 나온다.
멈출 수도 없고, 멈추고 싶지도 않은 눈물이 그제서야 폭포처럼 쏟아진다.
공포였다.
무서웠어.
나에게 소리 지르는 그 여자보다, 침묵하는 사람들이 더 무서웠다.
간신히 눈물을 추스른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지난주, 한창 여러 직원들의 작업 요청이 밀려 정신없다던 창고 담당자와의 통화를 기억해 냈다.
-많이 바쁘시죠? 제 작업건은 준비는 끝났는데, 언제쯤 시작이 가능할까요?
-아, 그러게. 지금 이과장 작업이 있긴 한데, 좀 기다려야 물건 하나가 온다 그래서, 그럼 고주임꺼 부터 해줄까?
-와,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일이었을까?
내 작업이 먼저 시작은 되었지만 생각보다 마무리가 늦어졌고,
그래서 이과장 작업 기사가 지체료를 청구한 걸까?
얼핏 본 계산서의 숫자가 떠오른다.
-17,500
만 칠천 오백원 때문에도 소리를 지르고 사람 얼굴에 종이를 날려버릴 수 있는 게. 회사라는 걸까.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데.
내 눈물은. 짧기도 하다.
지이잉-
전화가 울린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만 뜬다.
"네."
"고주임, 괜찮아? 나 김대리."
대답은 하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괜찮겠니?
"이과장이. 아휴. 원래 여직원들이랑 안 친해. 자기가 전시팀에선 홍일점이었잖아. 고주임 입사 전까지"
어디까지 가나 들어나 보자.
"내가 이과장이랑 얘기했어. 너무 심하긴 했어. 그런데 그냥..네가 싫다고 하는 걸. 어휴. 내가 어쩌냐."
나는 김대리란 사람도. 이과장이라는 사람만큼이나 잘 알지 못한다.
왜 이런 얘기를 전하는지 알 수가 없다.
"네. 내일 뵙겠습니다."
뭐라고 더 하고 싶은 듯했지만, 알겠다고 내일 꼭 보자며 전화를 끊어준다.
-그냥 싫다 라..
나는 청개구리다.
싫어한다고 해서 그 마음대로 움직일 생각은 없다.
고통받지 않을 권리는 내게도 있다.
나는 다시 왔던 번호로 전화를 건다.
"어? 어 고주임. 왜? 내가 술이라도 사줄까? 집 회사 옆, 거기지? 내가 갈까?"
"아니요, 저 이과장님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이과장 번호? 그건 왜?"
"부탁드립니다."
"아,.. 알겠어. 내가 문자로 보내놓을게. 그런데"
"네, 감사합니다."
말을 자르고 전화를 끊는다.
오늘 내 사정을 봤으니, 이 정도는 봐주세요.
잠시 후 문자가 울리고 전화번호 하나가 찍힌다.
그리고, 최대한 짧지만, 마음을 담아 문자를 적는다.
과장님, 고주임입니다. 오늘 제가 업무를 잘 모르고 진행해서 발생한 일. 죄송한 말씀드립니다. 저 때문에 마음까지 상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더 배우고 잘해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나는 공을 다시 넘길테니, 이제 다시 당신의 선택입니다.
정도의 마음이었다.
(SEND) 꾹.
나를 싫어하는 마음은 내가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너를 싫어하지 않을 마음은 내가 정한 것이다.
더 잘 배우고. 더 잘 따라 보겠다.
어쨌든. 선배니까.
울음이 끝난 후에야 나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나의 사무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는 건 신입의 기본이라 했다.
사랑하는 아빠가.
나는 팀원들의 책상과 임원들의 책상을 닦아내고 각 자리의 쓰레기통을 비웠다.
그리고 어제 하다 만 자료를 꺼내 복사기로 걸어가 온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데,
이과장이다.
"안녕하세요, 이과장님."
꾸벅 인사하며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 보였다.
(눈주름아 어색하지 않게 지어져 다오)
그녀는 너무 티 나게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까닥.
복사를 마치자 자리에 놓고, 그녀의 자리로 갔다.
"저, 뭐 시키실 거 있으시면 주세요. 제가 할게요"
앉은자리에서 눈을 치켜뜨는, 아니 그건 너무 개인 감상이고 나를 올려다본다.
"됐어, 지금은 없어."
새침하지만, 어제같은 악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네, 생기면 말씀하세요."
평소보다 더욱 친절하게, 말하고는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갔다.
그 어떤 곳 보다 오래 머물러야 할 자리이다.
-이곳을 스스로 지옥으로 만들지는 않을 거야.
나는 컴퓨터를 켜고 오늘의 업무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