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벌
"엄마는 왜 맨날 꽃을 갖다 놔?"
"예쁘니깐. 안 예뻐?"
"버릴 때 귀찮잖아"
"그래도 꽃이 있으면 집 안의 온도가 달라져."
(온도?)
"안 그래, 여보?"
엄마와 내가 거실의 아빠를 쳐다보자 아빤 그저 씩 웃을 뿐이다.
-엄마 말은 다 맞다지 아빤.
그리고 티브이에선 축구경기가 한창이었다.
오래된 집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타원형의 식탁.
하지만 어두워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진 않는다.
괜히 두리번거려진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어떻게 잘 찾아오셨네요"
식탁 맞은편 가운데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일어나 반갑게 맞아준다, 내 뒤의 그 아이를 힐끔거리며.
"아 안녕하세요."
꾸벅.
"엄마, 아빠는요?"
뒤에서 내 캐리어를 끙차 내려놓으며 말한다.
(응?)
흠칫 놀라 뒤돌아 그 아일 본다.
+저희 둘째가 역으로 데리러 나갈 거예요. 그런데 걔가 말을 못 해서. 그냥 따라 차 타고 오시면 되세요.
라는 문자에, 역에서 만났을 때부터 손짓과 휴대폰으로만 소통하면서 온 건데.
"아, 잘 오셨네요. 환영합니다. 피곤하시죠? 비행을 몇 시간을. 어떻게, 저녁 그래도 드셔야 하죠?"
주인아저씨로 보이는 분이 주방에서 행주에 손을 닦으며 뒤따라 나온다.
요리를 하고 있던 사람은 아주머니가 아닌 아저씨인 듯하다.
"아 네네 괜찮습니다."
비행기 13시간. 공항에서 중앙역 40분. 중앙역에서 이곳까지 기차 3시간.
밥 숟가락 들 힘도 업..
(아, 고파)
어둠을 밝히고 있는 건, 주황색 전구 하나라 미처 몰랐다. 엄청나게 맛있는 냄새가 집안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네 간단히 뭐라도 드시고 주무세요, 일단 방에 짐부터 푸시고요, 우도야 안내해 드려"
표정에서 배고픔이 나왔나 보다.
남들은 배에서 나오던데.
아저씨의 말을 들은 아이는 다시 내 캐리어를 가볍게 들고 계단을 올라간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삐걱 소리가 알림음처럼 박자를 맞춘다.
나도 꾸벅 인사를 하고 서둘러 그를 따라 올라가려고 하는데,
으윽-
또 허리가 찌릿한다.
허리를 부여잡고 끙차 하는데 우도가 힐끔 쳐다보는게 느껴진다.
-밖에선 안 커 보였는데, 방이 많네...
한 개, 두 개를 지나 세 번째 방 앞에서 문을 확 여는데 페인트 냄새에 우드향이 섞여 난다.
그리고 한쪽 벽을 가득 채운 하얀 매트리스들. 병원씬에 많이 나오는 침대들 같다.
-독일엔 간호사하시는 분이 많으니까. 그런 건가.
옷장 앞에 캐리어를 둔 아이는 나를 돌아보더니 꾸벅하고 나가버린다.
-말은 할 줄 아는 거야. 못하는 거야. 아니, 하는 걸 봤으니까. 나한테만 안 하는 거야?
(그래, 뭐,)
지이잉-
-이 시간에 문자?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다리를 조금 다쳐서 내일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전시 마지막날에는 갈 수 있습니다.
"장난하냐고"
말이 툭 튀어나온다.
피곤해 죽겠는데, 알바까지 말썽이다.
당장 내일이 일하는 날인데.
거래
"차린 건 많이 없어도, 많이 드세요."
드라마에서 배우는 멘트일까.
어머님들은 비슷한 대사를 잘 이용하신다.
꾸벅하고 자리를 찾는데 이미 그 아이 가 앉아서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
-바로 옆자리는 그렇고. 아, 알바나 부탁해 볼까?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으며 후루룩 그를 훑어본다.
앳된 보이긴 하지만, 큰 키와 다부져 보이는 몸이 전시 아르바이트엔 딱인 듯하다.
수저를 들고 접시 한번, 우도 한번.
말을 꺼내야 하는데, 고개를 들 생각도 없이 노트북에 집중하는 그를 어떻게 부르지.
"우도야, 이제 넌 들어가서 공부해. 여기 과장님 밥 편하게 먹게"
주방에서 다시 나온 아저씨가 그를 툭툭 치며 얘기한다.
"아, 아니요. 저."
급하게 말하려고 수저를 들다가 밥알이 날아간다.
둘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본다.
"저 혹시. 내일 아르바이트., 아 전시 일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일당은 드릴게요!"
"전시일? 그걸 우리 아들이 할 수가 있어요?"
"네, 어려운 건 아니고, 어차피 저랑 같이 하니까 제가 혼자 하기 힘든, 힘쓰는 일만 좀 도와주면 돼요. 어렵지 않아서요."
거짓말도 아닌데 말이 빨라지네-
알바 펑크 때문에 일을 망칠 순 없다고. 내 허리는 더더욱 망치면 안 되고.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은 왜 5초도 5분 같고, 5분도 50분 같고,
"할 수 있어요"
한 글자씩 천천히 또박또박 그가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예쁘게 웃고 싶지만, 비굴해 보일 듯하다.
"조 건 이 있어요"
"네?"
"나중에 저희 아버지한테 치료받으세요. 허리."
씩 웃으며 아버지와 눈 맞춘다.
"네?"
"아휴, 우도야 넌 무슨. 손님 부담되신다. 뭐, 여하튼 우리 아들이 내일 같이 따라갔다 오면 되는 거죠? 그 정도는 해드릴 수 있지요, 여기서 오래 묵어주시는 것도 감사한데."
"아, 네에."
다행이닷 헤헷-
무슨 말인진 잘 모르겠지만, 일도 도와주고 허리도 치료해 준다는 말인 것 같다.
-아저씨가 의사셨던가?
고개를 갸웃해 보지만, 드디어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니 행복한 미소가 나온다.
이 집의 온도
아. 나는 또 왜 여기 누워 있는 거지?
독일이란 낯선 땅. 병상 위에서.
나 이제 두 발로 걸을 수 없게 되는 건가?
그보다, 내가 여기서 사라진다 해도 아무도 못 찾는 거 아닐까?
"대체 나는 왜 출장만 오면 이 모양인 거야."
기다리는 아저씨는 들어오질 않고, 나는 낮에 있었던 일부터 천천히 되짚어 보기로 한다.
4 시간 전-
"오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둘 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이제 막 전시장에서 나오는 길이다.
잠깐 본 아이폰에는 이미 3만 보라는 숫자가 찍혀 있는 걸 보니,
오늘도 대단히 수고했다. 고 과장-
"별 거 없던데요."
"아 네에."
그는 말수가 없다.
그리고 아마 나도.
후들후들 하며 도착한 집은 어젯밤에 보았을 때랑 또 다르다.
집 전체가 비계와 철근 계단으로 둘러져 있어,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인지, 짓고 있는 중인지 분간이 어렵다.
"400년 된 집이거든요. 아직도 대출 갚고 있어요 호호"
아주머니가 다시 하얀 접시 위에 밥과 소시지. 전과 나물을 조금씩 담아 건네주며 말한다.
(조선왕조가 500년이고...)
"그래서 계속 고쳐가면서 살고 있어요. 아마 애들한테 물려주기 전까지 계속 고칠 거 같아, 남편 고쳐 살듯이?. 호호"
아주머니 표정이 즐거워 보여 따라 웃게 된다.
그러다 순간,
히익-
가위손?
분명 영화 가위손에나 나올 법 한 커다란 가위를 한 손에 덜렁거리듯 들고 다른 손엔 방금 뽑은 듯한 꽃 한 다발을 든 아저씨가 몸을 드러냈다.
(저기, 부엌 아니었어?)
아저씨와 주방 쪽을 번갈아 본다.
꽃 뭉치, 아니 꽃다발은 식탁 위에 무심히 툭 놓으며 아주머니에게 말한다.
"아휴 저거 가지 치는데 하루이틀 될 게 아니야, 많이도 넘어갔더라고 그 옆집에. 할아버지 집"
"그러니까요. 한 달은 고생해야 한다니깐."
"고생은 무슨. 우리 집 나무인디. 우리가 안 하면 할아버지가 어떻게 하겠어. 그리고 이거 꽃, 정원에서 정리하는 김에 가져왔어"
아주머니는 꽃을 보고 함박웃음을 진 채 장에 놓여 있는 유리병 하나를 들고 온다.
"꽃, 예쁘다"
혼잣말도 하면서-
"아가씨처럼 젊을 땐, 괴로운 일만 많이 보였어, 그런데 나이 들다 보니, 이렇게 예쁜 순간에 더 오래 머무르게 돼. 그냥, 그렇게 되더라니깐? 호호"
엉덩이가 둥근 화병에 꽃을 풀어헤치며 아주머니는 다시 한번 호호 웃으신다.
-예쁜 순간에 머무르는 나이..
철마다 꽃을 갈아 장식하던 엄마가 생각났다.
나이가 들면
모두가 시인이 되는 건가.
"오늘 일은 잘하셨고?"
손장갑을 벗어 식탁에 놓으며 내게도 말을 거신다.
"아저씨, 그런데 저, 말 못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누구? 아 둘째요? 아-, 한국말을 잘 못한다고. 여기서 바로 나고 자라 가지고, "
(아아..'한국'을 빼 버리시면 어떡해요..)
-삐걱 삐 삐 삐걱삐걱삐걱
빨라진다 했더니 우도가 계단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무슨 무슨 말을 독일어로 하기 시작하는데. 아저씨는 다행히 한국말로 대답한다.
"지금?"
하고 나를 쳐다보는 아저씨. 그리고 우도.
-'다행'이 아닌가.
"지금 하실 수 있겠어요 과장님?"
어느새 아주머니도 바로 옆으로 다가와 있다.
"네? 뭐, 뭐를요?"
"누나, 허 리 치 료"
-내가 왜 너 누나.. 아니 치료? 오옷?
"어디서요?"
아저씨를 돌아본다.
"아, 그럼 우도야, 그 방으로 안내해 드려, 저는 손만 씻고 갈게요."
현재-
그리고, 안내된 방안에는 침대와 기능성의자들로 가득 차서 설 공간이 부족하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한 침대에 누워있는 나. 그 옆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우도.
"저. 우도야. 아버지가 의사 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피식- 웃어버린다.
(아냐, 웃지 마. 그럼 심각해지잖아.)
"아니면. 간호사신가?"
(남자가 간호사 할 수도 있지.)
"아니요, 저기"
문이 열리고 아저씨가 들어온다. 손에는 유리통 하나를 들고서.
사람 긴장되게-
"아저씨, 그게 뭐예요?"
"아, 우도가 말 안 했어요? 이거, 벌"
"네에?"
누워있다가 벌떡은 못하고 상체를 들어앉았다.
"봉침인데, 이게 효과가 좋을 거예요"
"아니요, 저..."
"괜찮아, 얼른 누워봐요. 금방 끝나요."
무언가 홀린 듯, 다시 바닥을 짚으며 눕기 시작한다.
"저... 면허는 있으시죠?"
"면허? 무슨 면허? 아이, 걱정 마, 저-기 옆 집이랑 건너편 할아버지도 다 맞고, 멀쩡히 걸어 다녀"
(누가, 누가, 누가 아아아.!)
"아저씨, 저 꼭 돌아가야 해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제가 하루라도 보고 안 하면 회사에서 바로 연락 올 거예요"
뭔가 다급해진다.
"네? 하하하하"
보통 영화에서도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전에 이런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누나, 걱정 하지 마요."
"뭐? 넌 맞아봤겠구나?"
밑을 향하던 고개를 조금 들어 우도를 바라본다,
여전히 휴대폰만 보고 있는 그는 분명히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있다.
-이 자식이.
"자, 그럼 할게요. 긴장 푸시고요. 조금 따끔 합니다."
"어디가? 어디가 따끔해요? 어느 정도?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난 3초 뒤면 기억을 잃는 것일까.
아니면, 허리에 마비가 와서 119 아니 독일 응급차를 불러야 하는 거 아닐까.
그래서 우도가 저렇게 휴대폰을 들고 대기하는 걸까.
"끝났어요."
"네?"
벌떡 일어나 눈물 맺힌 눈을 쓰윽 닦으며 아저씨를 본다.
그런데 그전에, 유리통 옆에 죽어있는 벌 몇 마리...
(내가 죽인 거야?)
"아저씨, 저 벌이.."
"네, 벌로 직접 쏜 거예요. 많이 아프다 해서 여러 방 쐈어. 얘네들은 쏘면 죽잖아"
벌과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보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나가야 하는 게 아닌가?
통증이 사라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