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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미지

이 죽일놈의 회사

by 아는개산책

"너밖에 없어. 할 사람은"


한 해가 시작되기 전 겨울, 12월 어느 날.

하얀 담뱃갑에서 또 한 개비의 담배를 꺼내 물며 선배는 말했다.

회장이던 부회장이던 직책을 맡게 되면, 그 해는 공부도 사생활도 모두 포기해야 한다.


그럼에도 난 선배들이 좋아, 보름간의 설득 끝에 결국 '나가겠다' 수락했다.

하지만 얼마 후,


'너는 운동권 이미지가 약해서, 이번엔 힘들 것 같아.'


-그런가.


애초 나갈 마음도 없었던 나는 부회장 후보로 얼마간 머문 후, 금세 포기를 선언하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매일 밤을 세워 선거준비를 도왔다.


그렇게 선거가 진행됐고, 내가 속해 있던 운동권이 패배하던 밤,

선배는 소주잔을 비워내며 꼬인 혀로 말했다.


"미안해, 너로 갔어야 했는데."



나간 자.


점심을 먹고 돌아온 사무실이 조금 더 어수선해진 듯하다.

오늘은 약속 있다며 함께 하지 않았던 은희도 이미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무슨 일 있어?"

자리에 앉으며 조심스레 물어보는데,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표정변화가 크진 않아도 늘 웃상의 그녀였는데.

많은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만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왜 그러는데."


"큰일 났어요, 심 과장님 건. 사고 났대요."


침을 꿀꺽 삼켰다.

심 과장은 바로 한 달 전, 이미 퇴사를 했다.

그리고 퇴사와 동시에 새로운 회사 이름을 내걸고 영업을 시작했다 들었다.


퇴사 준비와 같은 업종의로의 창업을 동시에 했다고, 안 그래도 벼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류 뭉치를 내게 내밀며 말을 잇는 은희,


"심 과장님이 저한테 인수인계 하고 간 껀이 있는데, 그게 사고나 나서. 보험을 안 들고 진행했었나 봐요."


"뭐어? 얼마짜린데?"

"잘 모르겠어요, 지금 알아보는 중인 것 같은데, 몇 억은 되나 봐요."


심 과장은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급하게 퇴사를 했다. 이미 필요한 건 다 해서 청구만 하면 된다고 했다는데, 전시종료 후 발생한 사고에 업체가 보험처리를 요청해 왔다.


그런데, 사전에 했어야 할 부보가 누락된 것을 지금 알게 된 것이다.


아주 애매한 구간이다.


"저... 아무래도 회사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너가 왜. 안돼. 그런 생각하지 마."


대화 너머로 사무실 한 켠에서는 기획실장이 임원들을 불러 모아 회의실로 가는 모습이 보인다.


-심각한데.


책임자가 퇴사했으니, 희생자만 남았다.



남은 자


은희는 심 과장이 마지막까지 데리고 나가려 했던 직원이다.

그만큼 있는 동안 둘의 손 발이 척척 맞았고, 그 사이엔 은근한 기류까지 있었다고 들었다.


-어떻게 은희한테 이럴 수 있지.


나는 그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고소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변호사 알아본다고."

"누가 그래?"

"실장님이요. 물어내라고 하겠다고."


-그렇게만 되면...너에겐 다행인 거야.


하지만, 심과장과 문제가 잘 풀리지 않으면, 다시 그 화살의 방향은 은희에게 향할지 모른다.


"그럼, 실장님이 알아서 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사실이 아니다.

인수인계를 받은 순간 그 전의 진행사항도 모두 확인하고 마무리를 지었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진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너도 이미 아니까 사직서 말 까지 나오는거지..


사람들이 우르르 저마다 얘기하며 회의실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다들 심각한 표정이다.


본인들이 해결할 것도 아니면서.


결국은 타깃만 필요할 것이다.

분노를 풀 대상.

문제해결은 힘없는 직원에게나 맡길 테지.


정 과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옆에 쭈그리고 앉는다.


"어떻게 해? 어떡할 건데?"


(아, 뭘 자꾸 물어. 이 철없는 아저씨야.)


"그래도 은희대리는 사장이 제일 이뻐하잖아. 일만 받았을 뿐인데, 뭐라 하겠어?"


맡은 일도 잘하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참한 규수. 그 자체.

나이가 있는 윗분들은 물론, 젊은 사람들까지 단정하고 고분한 그녀를 좋아하고 또 신뢰했다.


그런 이미지가 그녀를 보호해 줄 거라는 얘기다.

정말 그런가.


"고 과장, 잠깐 이리 와 봐"

회의실 앞에 선 부서장이 잔뜩 짜증 섞인 말투로 뾰족하게 나를 부른다.


(응?)


은희도, 정 과장도, 그리고 나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서로를 번갈아 쳐다봤다.



책임지는 자


"이거 어떻게 할 거야?"

회의실로 들어가자마자, 부서장은 서류를 소리 나게 탁 내려놓는다.

은희가 보여줬던 그 서류.


말없이 의자를 빼고 일단 자리에 앉아본다.


"넌 왜 이 회사 영업 안 하고 있었어?"


(갑자기?)


"영업은..."


"심 과장이 나갔으면, 네가 바로 리스트 받아서 심 과장이 하던 거 단속했어야 할 거 아냐?"


물어놓고 안 들을 줄 알았다.


심 과장과 내 사이는 데면데면 해진 지 1년이 넘어있었다.

차기 승진자 얘기 중에 '고 과장은 여자에, 혼도 안해서' 라고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부터였다.


나는 그에게 '왜 그랬냐' 묻지 않았고, 그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행동했지만 자연스럽게 멀어진 거리였다.


"제가 인수인계받은 게 아니라서요."


"은희 너희 팀 아니야?"

"맞는데요."

"그럼 너 책임이지, 아니야?"


-내가 팀장이었나?


조용히 책상 끝으로만 시선을 멈춰둔다.

내가 조용히만 하고 있으니, 끝내 칼 끝을 겨누는 부서장이다.


"너 심 과장이랑 한 패냐?"


맞은 자리 부서장을 보는 나의 눈에도 힘이 들어간다.


"맨날 동기네 의리네 하면서, 어? 심과장이랑 짜고 일부러 몇억 손배 맞게하고, 어? 너도 거기로 옮기려고 하는 거 아니냔 말이야!"

하며, 서류를 한번 들었다가 탕 내려놓는다.


(의리가 있단 소리야, 없단 소리야?)


'공산당이 싫어요'. 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은 누가 공산당인지도 모르겠다.


손 끝이 파르르 떨리는 듯하여 책상 밑으로 손을 옮긴다.


"저는. 이 회사 직원입니다."


고작 그런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처구니 없는 말에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팀장이 있었으면 이렇게는 말 못 했겠지.

나와 심 과장 사이를 갈라놓는 말을 전한 것은 팀장이었으니.


결국은 이미지였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나는 이런 사람들 주머니나 채워주자고 일하고 있었어.?


회의실을 나오는 내 마음은 분노와 실망으로 일렁거렸다.


입사 후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 죽일 놈의 회사.

그리고 심과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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