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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을 지켜.

클래식하게.

by 아는개산책

타인이 나를 따뜻하게 바라볼 때,

나도 모르게 무척 관대한 내가 되는 것을 안다.


타인이 나를 적대감으로 대할 때,

나도 모르게 자꾸 옹졸해지는 나를 본다.


그러니..흔들지 마라.

나는 너를 좋고 싫음으로 나누고 싶지 않다.


그저 일이라는 무대가 끝나면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임시 동료 일 뿐이니까.



새로 온 사람


-배가 많이 고픈데..


희한하게 회사만 오면 배가 고프고, 구내식당은 늘 줄이 길다.


그리고, 기다림이 길어지면 수다가 는다.


"과장님, 새로 온 사람이랑 말해봤어요?"


서림이 이때다 싶어 말한다.


장기출장을 다녀오니, 못 보던 남직원이 옆 옆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출근한 나를 팀원들이 에워싸고 반길 때에도 인사 한번 먼저 하지 않던 그놈 자식.


"과장님이랑 말 틀려면 일 년은 있어야 돼"

항상 내 생각을 먼저 해주는 은희가 대신 대답한다.


"그런데 다들 처음엔 과장님 무서워하는데 걘 그런 게 없는 거 같아"


입사 후 일 년도 못 채우고 나가는 직원들이 태반이다 보니 어느새 나도 일 년 미만 직원들과는 말을 잘 섞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어려워하는 신입들이 늘어났고, 냉정하다는 프레임이 씌워졌다.

그런 이미지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강하다.


말 안 걸면 너무 편해-


...

각자 맡은 업무를 간단히 보고하고 출장 일정을 조율하는 오후 회의가 시작되었다.


새로 온 그놈도 참석이다.

신입이 뭔 할 말이 있겠냐- 싶은데 정 과장과는 벌써 농까지 주고받는 사이인 듯하다.


고개를 박고 828282만 노트에 끄적인다.

정과장은 업체에 이메일을 쓸 때도 매번 러브레터 방불케 하는 구구절절 이더니 회의 때도 말이 길다.


고만 끝내라-

다리까지 떨고 있으니, 드디어 말을 끝낸다.


"네,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추가 좀 하지 말라고!)


"아,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고개를 번쩍 들어 정과장의 눈을 노려보자 씨익 웃으며 드디어 마무리를 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도 보고를 시작한다.


"네, 저는. 이번에 상해 전시건 현장 출장이 10일부터로 잡혀있고 출장자는 본인 일인입니다"


"이번에 신입 데리고 가서 현장 일 좀 가르쳐봐"

팀장이 툭 던진다.


"네?"

10분각 회의 끝내려면, 그냥 끄덕여-


끄덕이긴 허나,


응??


"저는 다음에 정과장님 출장 갈 때 가서 배우면 안 되겠습니까?"


모두의 눈길이 신입에게 향한다.

머리를 긁적이며 순진함을 어필하려는 듯 하지만 빙그르 웃는 게 이미 고수의 느낌이 온다.


"전 고과장 보다는 정과장 한테 다 배워서.. 고과장 출장에 따라가면 잘 알지도 못하는데 괜히 제가 방해만 될 것 같아서요. 방도 따로 잡아야 하고"


예쁘게 포장하고 있지만 여자과장의 현장은 따라가도 배울 게 없을 것 같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돌멩이가 던져졌다.

이제 모두의 눈길이 나에게 향한다.

무표정으로 응수했지만, 마음속 동요가 인다.



각자의 방식


유리문 넘어 보이는 에나멜 장식의 스니커즈에 마음을 뺏긴 채 우뚝 서 있는 한 여자가 있다.


"좋은 신발 신으면 좋은 곳에 데려다준대요"

그가 한마디 말로 그녀를 깨운다.


흠칫-

"뭐야?"


-넌 하라는대로 하면 돼, 따라 다녀와.

팀장의 한마디로 결정된 출장에 더 이상 군소리 없이 '네'라고 한 것까진 좋았다.


회의 이후로도 전시에 관해서나 출장 자체에 관해서도 궁금한 건 모두 정과장에게 물어보는 것, 그것도 오케이다. 첫 방식이 마지막까지 가란 법은 없으니.


묘하게 기분이 거슬리는 것은 오히려 사소한 데서 왔다.


커피 드실 분? 제가 사겠습니다, 하고는 주위를 훑으면서도 내 쪽은 바라보지 않는다거나,


다같이 간식 타임에 피자를 먹을 때도 한 명 한 명 잘라 건네면서도 내 앞에서 순서가 끊긴다거나.


굳이 기다리는 서비스도 아니었지만, 의도한 듯 아닌 듯 거슬리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그의 알 수 없는 적대감은 내게도 역시 불편하면서도 불쾌한 공기를 만들어냈다.


그러한 불편함이 보태져 각자 알아서 수속 후 출국게이트장에서 보기로 했다.

좋다고 휙 사라지더니, 어느 틈엔가 면세점 안 샤넬 스니커즈를 넋 놓고 보고 있는 내 곁으로 와 말을 붙이고 있는 그 자식이었다.


"그래도, 과장이라도 저런 거 턱턱 한 번에 살 형편까진 안되지 않아요? 하하"


저런 식이다.

혼잣말인 듯 아닌 듯 묘하게 기분 나쁘게 던져놓고 혼자 웃으며 갈 길을 가버린다.


-쟨 뭐야.

하면서도,


"이거, 주세요."

결제하고 있다?


(나, 턱턱 살 수 있는 사.. 사람이야.!)


손이 떨린다.


상해 전시장-

전시 부스 공사중인 전시장 내부는 후끈후끈 열기와 먼지로 가득하다.

한 여름 상해는 50도는 그냥 찍기도 하고, 비할 데 없이 습도는 치솟는다.


덩치가 산만한 그는 이미 흠뻑 젖은 티셔츠에 연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대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다.


-요즘 애들은 소통은 안돼도 일은 다 열심히 하네.


가져온 엑셀파일에 진행상황을 체크하며 중얼거려본다.


"혼자 뭘 그렇게 중얼거려요?"

땀을 닦으며 다음 부스 확인을 위해 다가왔다.


"어, 다음엔 여기 여기, 이 부스 가서 이거 열어주고, 여기는 이거 갖다주고 한 바퀴 돌고 나면 끝날 거 같아"

엑셀을 보여주며 말한다.


"어? 아, 여기 빨간 부분이 다 한 곳이에요?"

"어, 이렇게 색으로 구분해 놓으면 글로 다 적지 않아도 한눈에 들어오니까 구분이 편해. 업체가 많을 수록 특히."


으음.

뚫어져라 보던 그는 가방에서 손선풍기를 꺼내어 나에게 내민다.


"아아- 이런 건 또 정과장님이랑 다르네요, 난 정과장님이 정석이라 생각했는데, 이게 더 낫네~" 한다.


나도 모르게 선풍기를 받아 들지만, 나 역시 무심히 파일만 보며 말한다.


"누가 더 낫고 아니고는 니고., 정석을 배워야 요령도 이지. 각자의 변주는 그 후에 아서 하는거고. 정과장이 잘가르친거야."


"아하.. 넵, , 그럼 여기 여기 돌고 올게요."


"아 참 , 신입, 이거 가져가, 담배 하나씩 돌려"

담배 한 보루를 내밀며 뛰어가려는 그를 불러 세웠다.


"헐, 제 이름도 몰라요? 강훈이잖아요. "


더 하려는 그의 말을 끊어버린다.


"얘네들 한국 담배 좋아해, 인부들이 한숨 돌리고 오면 몰라보게 빨라지기도 하고."

"흠, 이것도 팁이네. 난 또 과장님이 피려고 면세점에서 산 줄. 그냥 과장 단 건 아니네"


다행히 덧붙이지 않고 다 젖은 수건을 들어 흐르는 땀을 닦으며 부스 쪽으로 걸어간다.

쉬지 않고 일하는 그의 체력 덕에 오늘은 생각보다 일찍 끝날 듯하다.


-쟤는 왜 한마디를 하면 열마디를 해.


그래도 부정적인 말은 잊고, 긍정적인 태도는 높이 평가한다. 그것이 직장에서 멘탈을 지키는 나의 방식이었다.


눈 뜨기 힘들 만큼 가득 메우고 있던 공사 먼지들이 어느새 저녁 공기에 사라진 것처럼, 준비를 마친 참가자와 공사자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오늘 작업은 끝이 났다.

나의 고생을 반으로 줄여줬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에게, 저녁을 사주마 ,

세 번 네 번 고민하다 말을 던져놨었다.


(내 소중한 저녁시간...)



샤넬을 지켜


전시장을 나오니, 어마어마한 천둥소리와 함께 굵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집에 어떻게 가냐.."


택시가 보통은 로비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지만, 강한 빗줄기 덕에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이미 사람들이 들어오는 차들을 낚아채고 있다. 이래선 한 시간이 지나도 한 대도 그 사이를 뚫고 로비까지 오진 못할 것 같다.


"제가 뛰어가서 택시 잡고 있을게요, 잡고나면 그때 뛰어 오세요"


하지만 그를 그대로 쳐다볼 뿐 긍정의 끄덕임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내 시선이 아래, 나의 발끝에 떨어진다.


"아..샤넬. 아니 그러니까 전시장에 왜 샤넬을 신고와요. 그것도 새거를? 특이한 분이네 아주"


소리 들을 만 하다.

인정하겠다.


"아니 니가.."

뭘 그걸 변명을 찾고 있어?

입을 다문다.


"아이, 벗어요"

"?"

소리에 고개를 퍼뜩 쳐든다.


그는 매고있던 가방을 앞으로 옮겨 뒤적이더니 슬리퍼 하나를 꺼내 내게 건낸다.


"이거 하나 챙겨다니는건데 이거라도 신어요"

"이런걸 왜 들고 다녀?"

"땀이 많아서 예비로.아 빨리. 벗고 이걸로 신어요. 싫음 나 먼저 간다"


냉큼 슬리퍼를 받아신고 주섬주섬 샤넬을 벗어 든다.


"어쩌려고.."

"뭘 어째, 들고 가야지"

"?"

-들고 뛰어도 비 다 맞는데 ..


"내가 샤넬 지킬테니까 나중에 소원하나 들어줘요. 가요!"


그는 샤넬을 가방 깊숙히 넣은 뒤, 그래도 젖을새라 품 안에 꽉 안은채 뛰기 시작한다.

머뭇거리던 나도 그 뒤를 따라 철퍽철퍽 빗길로 뛰어든다.


온 몸으로 내리는 비를 모두 맞아보는 건 졸업이후 처음 있는 일 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르는 바람은 시원하고 아지는 비는 사람을 어린아이로 만들고 있다.


웃지 않으려해도 웃음이 어나오는 건 왜일까.


그렇게 두명의 한국인이 난리통인 중국인들 틈에서 한명은 가방을 꽉 끌어안고, 한명은 맨발에 맞지도 않는 쪼리를 신고 속을 달린다.


"그런데 너 이름이 뭐라고?"


"아놔, 마지막으로 말해요. 강훈 , 이.강.훈!, 샤넬 지켜준 사람- 이제 잊어먹지 않기!"


저녁비를 타고 이름 세글자가 날아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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